소설리스트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16)화 (16/133)

잠에서 깨어날 때

“라이언?”

“헤겔 카르너의 소견은 차후 내가 따로 듣도록 하지. 그리고 그의 진찰은 앞으로 내가 함께 있을 때에만 받아.”

“……저는 밤늦게나 겨우 일어나는걸요.”

“괜찮아. 그쪽도 잠드는 시간이 엉망진창이니까.”

헤겔이 그랬던가.

자신과의 생활을 떠올려 봤지만 아침에 조금 힘들어하기는 했어도, 잘만 일어나서 제 뒤를 따라다녔었다.

아마 그가 아침잠이나 더 자겠답시고 일어나지 않아도 미렌은 별말 하지 않았을 터였다.

한번은 그를 말리기도 했었다. 그런데도 꿋꿋이 따라다닌 건 헤겔이었다.

“너무 괴롭히지는 마세요.”

“……헤겔 카르너가 좋아?”

헤겔의 이야기를 하는 내내 라이언의 얼굴이 어딘가 딱딱하게 굳어 있어서, 미렌은 짧게 웃으며 농담하듯 한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라이언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러자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라이언도 그 사실을 알았는지 재빨리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가 불퉁한 얼굴로 투정이라도 부리듯 말했다.

“내 앞에서 다른 남자의 편을 들지 말아 줘.”

“편을 든 건 아니었습니다.”

“알아.”

그간 제법 오랫동안 라이언을 지켜봐 온 만큼 그에 대해선 모르는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바깥에서 들려오는 무정한 황제의 소문은 그저 황제이니 그런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지.

방금 전 보았던 라이언의 싸늘한 얼굴은 그녀로서는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아주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서 잘못 보았나 싶기는 했지만.

“내가 목이 많이 말라서 그래.”

“예?”

“미렌, 당신이 흘리는 조그만 애정에도 침을 흘리며 기다리는데, 그 애정이 다른 놈에게 갔다간 눈이 돌아가는 게 당연하잖아.”

다른 놈에겐 시선도 주지 마.

응?

갑작스레 고개를 돌린 라이언이 속삭이며 그녀와 이마를 맞대었다.

그러느라 서로의 코끝이 닿자 그는 애교라도 부리듯 제 코끝을 그녀의 코에 대고 문질렀다.

꼭 커다란 강아지 한 마리가 제게 매달린 것 같은 모습에 미렌이 저도 모르게 웃었다.

이제는 위협적일 정도로 커진 그가 사실은 이런 남자라는 건 어쩌면 자신만 아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미렌은 방금 전 보았던 싸늘한 모습은 새까맣게 잊었다.

누구보다 연약한 라이언. 그가 그런 얼굴을 했을 리가.

“라이언, 궁금한 게 있습니다.”

“무엇이? 부디 우리의 합궁일이 언제인가, 그런 질문이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것도 있었습니까?”

미렌이 되묻자 라이언이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어떻게 그것도 몰라줄 수 있냐며 그녀를 원망했다.

전통적으로 달마다 한 번 합궁일이 정해지지만 그간은 미렌의 몸이 약해 의례적으로 넘어간 날들이었다.

물론 합궁일이 아니어도 라이언이 매일같이 찾아와서 덜 특별해진 것도 있었지만.

라이언의 반응에 미렌은 그를 한번 토닥이고서 품에서 빠져나갔다.

묻고 싶은 게 있는 터라 그의 품에 안겨 있기보다 제대로 마주 보고 싶었다.

품에서 미렌이 빠져나가자 라이언은 제 빈손을 내려다보며 혀로 제 입 안을 아쉽게 훑었다.

그리고 그녀가 뒤돌아보기 전, 어서 제 얼굴을 수습하고 침대로 다가갔다.

“무언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거군. 일찍 일어난 것도 그래서인가?”

“……설마요.”

그의 말대로 묻고 싶은 게 있어 유달리 일찍 잠자리에 들었던 미렌은 당황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가 침대에 앉자 털썩, 라이언도 마찬가지로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이전에 말했던 테룬 공국 말입니다.”

“요즘 들어 그쪽에 관심이 많군. 가 본 적이라도 있는 건가?”

“그건, 아니지만……. 영지민들이 신경 쓰여서요.”

이상하진 않겠지?

어쩌다 보니 자꾸만 라이언의 눈치를 살피게 되었다.

한 나라의 황후로서 국민을 아끼지 않은 적은 없었지만, 사실 권력이 없는 그녀에게 황후로서 허락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와서 뜬금없이 영지민들을 챙기는 게 라이언에게 이상하게 보일까 신경이 쓰였다.

슬쩍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그만 라이언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러자 라이언은 커다란 입으로 호선을 그리며 웃어 보였다.

“당신이 드디어 황후 자리에 관심을 가져 주는 건가.”

“……그동안 제가 너무 무심했던 것 같습니다.”

“미렌은 몸이 좋지 않았잖아.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무엇이든 말해. 지금이야 대신들이 황후의 일들을 하고 있지만, 언제든 원한다면 돌려줄 수 있으니.”

“하하.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서요?”

라이언의 말을 그대로 믿고 행했다가는 대신들의 원망과 소문을 동시에 살 수 있을 터였다.

그러자 라이언이 웃음기를 거두며 나직이 말했다.

“정말이야.”

“…….”

“당신이 원한다면 무엇이든 손에 쥐여 줄 테니.”

그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무겁고 진중한 목소리를 듣고 있자면 꼭 심장이라도 내어 줄 것 같아서, 미렌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결국 라이언이 먼저 분위기를 풀었다.

고개를 까닥인 그가 흐음, 하는 소리를 가볍게 내었다.

“테룬 공국 사람들이라면……, 프레니티 영지민들 말인가. 그러잖아도 고민이 많아. 아직 테룬 공국과 협상을 하는 중인데 자꾸만 돌아가고 싶다는 상서가 올라와서.”

“……테룬 공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요?”

“그래. 그들은 대부분 테룬 공국이 고향일 테니까.”

“어딘가 잘못된 게 아닙니까? 돌아가고 싶다고 할 리가……!”

미렌의 다급한 어조에 라이언이 고개를 기울였다.

“꼭 당신이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기라도 한 것 같군.”

“예? 그게, 아니라…….”

“알아. 방에만 누워 있던 당신이 최남단인 프레니티 영지에 가 봤을 리가 없지. ……하지만 미렌, 사실이야. 그들은 정말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해.”

그의 단호한 말에 미렌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굳은 얼굴을 보던 라이언이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목소리를 내어 밖에 있을 시종을 불렀다.

이윽고 들어온 이는 미렌도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벌써 수십 년째 라이언의 시중을 드는 이, 애들러였다.

“애들러, 오늘 본 서류를 가져오도록.”

“아니요, 폐하.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미렌, 괜찮아. 무엇 하고 있는가, 애들러. 어서 가져오거라.”

침대에서 엉덩이까지 떼어 가며 놀란 미렌을 라이언이 침착하게 앉혔다.

그사이 시종은 어느새 방을 떠났다.

“당신이 내가 하고 있는 일에 관심을 가져 주어서 기쁘기만 해.”

“……라이언.”

“사실 그 무엇도 재미가 없어. 황좌? 아무나 가져가라지. 미렌, 당신이 건강했다면 나는 벌써 황위를 승계하고 물러났을 거야.”

라이언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미렌은 심장이 떨어졌다.

자신이 건강했다면.

황제와 정반대의 가문인 에드가 공작가의 유일한 영애가 아니었다면.

……그는 정말, 그대로 실천했을까.

라이언의 반질하고 새까만 두 눈은 꼭 무언가를 꿰뚫어 보는 것 같아서, 미렌은 이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의 눈을 피했다.

보고 있다간 저도 모르게 모든 사실을 토해 낼 것 같았다.

“폐하, 서류를 가져왔습니다.”

“이쪽으로.”

라이언이 손을 내밀자 시종이 공손하게 그것을 내밀었다.

두꺼운 종이들을 빠르게 뒤로 넘기던 라이언은 그중에서 몇 장을 꺼내 미렌에게 보여 줬다.

<……프레니티 영지민 모두를 테룬 공국으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그것을 빠르게 읽어 내린 미렌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다음 장을 넘겼다.

그곳엔 동의하는 영지민들 대부분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름이 너무도 많아 차마 부모님의 성함을 찾을 겨를까지는 없었다.

그 부분을 자세히 읽고 있다간 라이언에게 의심을 살 수도 있어서, 미렌은 어서 그것을 도로 돌려줬다.

“……사실이었군요.”

“어쩌면 다행이지. 제국 내에서도 프레니티 영지에 대한 소문이 좋지 못해. ……몰래 옆 영지의 약탈을 일삼는다는군.”

라이언의 말 기저에는 프레니티 영지민, 그러니까 테룬 공국 사람들을 향한 미약한 혐오가 서려 있었다.

그것을 알아챈 미렌은 입을 다물었다.

어딘가 이상했다.

제 부모님이 제게 해 준 말과는 조금도 맞지 않았다.

거기다 약탈이라니. 시장과 마을에 자주 내려가진 않았지만 모두 따뜻하고 소박한 사람들이었다.

문득 방문 너머에서 가볍게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 실례하겠습니다.”

“……애들러인가?”

“예. 다급히 나와 보셔야겠습니다.”

애들러의 긴급한 목소리가 들리자 라이언이 미렌에게 눈짓으로 실례를 구하고서 일어섰다.

미렌은 그저 침대에 앉아 그가 얼굴을 찌푸린 채 애들러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바라봤다.

그러다, 쿵.

육중한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문 사이로 본 라이언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았다.

“전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마리아? 들어오도록 해.”

헤겔과 대화를 하는 사이 떠났던 마리아가 차분한 몸짓으로 들어왔다.

아마도 라이언과 대화를 하는 동안 부러 자리를 피해 준 모양이었다.

마리아는 눈치가 빠르고 입이 무거운 편이라 그녀가 가장 아끼는 시녀이기도 했다.

들어온 마리아의 손에 흰 찻잔이 담긴 트레이가 들려 있었다.

“마법사님께서 가져오신 약초를 빻아 만든 찻물입니다. 사흘에 한 번, 한 잔씩 드시라 말씀하셨습니다.”

“……아르테미스 말인가.”

“예. 약초를 알고 계셨습니까?”

그야 당연하지. 그걸 찾겠다고 몇 시간이나 산속을 헤맸는데.

……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었기에 미렌은 잠자코 찻잔을 받아 들었다.

목 뒤로 넘기자 걸쭉한 무언가가 눈이 찡그려질 정도로 기분 나쁘게 목에 걸렸다.

순간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아서 미렌이 다급히 그것을 삼켜 냈다.

“약이 너무 써.”

“주치의님께 처방받은 약재도 함께 달여서 그렇습니다. 폐하께서 명하신 것이라…….”

“알아, 마리아의 잘못이 아니라는 건. 단지 너무 쓰다는 거지. ……마리아, 물 한 잔만.”

말없이 테이블로 간 마리아가 물병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어쩐지 그녀가 미세하게 당황한 것 같자 미렌이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왜, 물이 없어?”

“예.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제가 주방에…….”

“함께 가자. 오랜만에 주방에도 가 보고 싶고.”

미렌의 말에 잠시 입을 다물었던 마리아가 이내 모시겠다며 고개를 숙여 왔다.

자리에서 일어서자 아르테미스를 마셔서인지 묘하게 몸이 가벼웠다.

부축하러 온 마리아에게 괜찮다며 거절한 미렌이 발걸음을 움직였다.

문을 열고 나가자 아직 저녁이라 그런지 복도를 걸어 다니는 시종들이 가끔 보였다.

그들은 고개를 숙이면서도 평소에는 보기 힘든 황후가 직접 걸어 다니는 게 신기한지 힐끔대기 바빴다.

어깨를 으쓱인 미렌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주방으로 향했다. 마리아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

얼마가지 않아 황후의 궁에 있는 주방으로 들어가는 문이 보였다.

본래라면 마리아가 여는 게 맞았지만, 유달리 몸이 좋아진 덕분에 미렌이 먼저 그 문을 열었다.

“……제 죽을까?”

“하아, 본인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이 기원하고 있단 걸 알려나 모르겠네. 맨날 한가롭게 잠이나 자잖아.”

“신하들이 죄다 폐위해야 한다고 읍소하고 있다는 것도 모를걸. ……근데 진짜 얼굴 볼 때마다 구토가 올라와서 고생이야. 못생겨도 너무 못생겼잖아. 그것도 황후라고…….”

“이보게!”

놀란 마리아가 먼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그들에게 소리쳤다.

그래 보여도 마리아는 미렌이 직접 지정한 시녀장이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들보다는 직위가 높았다.

그제야 대화를 나누던 시녀들이 돌아봤다.

그들은 뒤늦게 미렌을 발견하고서 눈을 크게 치떴다.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살…… 살려만 주세요.”

자꾸만 걱정스러운 얼굴로 미렌의 기색을 살피는 마리아와 달리 미렌은 무덤덤했다.

그녀는 가라앉은 얼굴로 허리를 굽힌 세 시녀들을 내려다보더니, 한 걸음 다가섰다.

그중 한 명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미렌이 나지막이 물었다.

“신하들이, 나를 폐위하라 한 게…… 사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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