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놈, 미쳐 가는 놈
“아…… 혼자서.”
“예, 물속에 난 아르테미스를 꺾겠다고 들어갔다가 물살에 휩쓸려 위험할 뻔도 했습니다.”
“아…… 진짜요.”
영혼 없는 진짜요 행렬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자신도 익히 알고 있는 모험담이라 헤겔의 이야기에 턱을 괴어 그럴듯한 대답만 내놓았다.
그게 이어지자 헤겔도 그제야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잠시 손을 놓고서 그녀를 올려다봤다.
무릎 꿇은 그는 보랏빛 눈동자로 미렌을 가만히 응시하더니, 이내 말했다.
“전하께서는 이런 이야기에 별로 관심이 없으시군요.”
픽 웃은 헤겔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아르테미스를 마리아에게 건넸다.
그것에 대해 무어라 설명을 들은 마리아는 꾸벅 고개를 숙이더니 물러서 방을 떠났다.
쿠웅.
육중한 방문이 닫힘과 동시에 이제 방 안에는 둘밖에 남지 않았다.
마리아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느라 뒤돌아 있던 헤겔이 미렌을 향해 몸을 돌린 것은 그때였다.
“야.”
“……야?”
“존댓말 귀찮아.”
“아…… 그러세요.”
웃음기가 사라진 헤겔이 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그 모습이 미친놈답지 않게 고상해서 그제야 헤겔이 대단한 작자라는 걸 상기해 냈다.
무려 대마법사였다.
그런 대마법사에게 대체 어떤 미친놈이 100만 골드씩 쥐여 줘 가며 아르테미스를 구해 오라 명령했나 했더니, 그건 제 남편이었다.
기가 막힌 우연에 미렌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왜 한숨 쉬어?”
“뭐, 몸이 고되어서요. 고장 날 대로 고장 난 몸이잖습니까.”
“아…… 그래?”
대답에 미묘하게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꺼림칙한 기분에 미렌이 그를 올려다보자 헤겔은 히죽 웃으며 한 걸음 다가섰다.
그가 앉아 있는 미렌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난 반말이 익숙한데. 넌 존댓말이 익숙한가 보다?”
“…….”
마법사는 공로를 세운 기사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인 작위를 수여받는다.
거기다 헤겔은 미렌보다 네 살 연상이었다.
그러니 평민인 미렌 우드일 때는 익숙하게 존댓말을 써 왔지만, 지금은 달랐다.
황후는 황제를 제외하고 그 누구에게도 존칭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녀가 황후가 된 뒤로 가장 힘들어했던 점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시종들에게 매번 존칭을 사용하다 들켜서 교육해 주는 이에게 매번 혼났으니까.
양쪽의 미렌을 모두 아는 이를 만난 것은 살면서 처음이라 순간 실수하고 말았다.
대답을 망설이던 미렌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예. 시종들에게도 자주 존댓말을 써서요.”
“아, 그래? 아까 그 시녀에겐 안 그렇던데.”
“보는 눈이 있을 때에는 주의를 하는 편입니다.”
흐음.
헤겔은 어딘지 탐색하는 눈으로 미렌을 살폈다.
그러느라 어색한 침묵이 감돌자 미렌이 입을 열려 했을 때였다.
성큼, 헤겔이 한 걸음 다가왔다.
앉아 있는 미렌의 발끝과 그의 발끝이 닿았다.
그가 서 있는 덕분에 올려다봐야 했지만 자칫하다간 무릎이 닿을 것 같아서 자꾸만 몸이 움츠러들었다.
“근데.”
“……예.”
“너, 나 알아?”
그녀가 앉아 있는 의자의 양 손잡이에 그의 손이 올라왔다.
손잡이를 짚은 그가 허리를 굽히더니 어느새 미렌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얼굴이 너무 가깝자 흠칫 놀란 미렌이 어서 옆으로 고개를 틀었다.
헤겔은 짙은 속눈썹을 드리우며 그녀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럴 리가요. 모르는 분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눈을 피해?”
“이렇게 가까우면 누구든 피할 겁니다. 부담스러우니까요.”
“아아, 그래?”
어쩐지 대화를 나눌수록 헤겔의 웃음기가 짙어졌다.
아직까지 허리를 굽힌 그와 얼굴이 너무 가까워서 그녀가 먼저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려 했다.
그것보다 먼저 헤겔이 중얼거리듯 말해 왔다.
“그럼 내 이름은 어떻게 알까.”
무릎 위에 올려 두었던 미렌의 손가락이 움찔, 떨렸다.
그녀는 그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부러 반대편 손을 가져와 감쌌다.
그사이 헤겔은 고개를 옆으로 갸웃하더니 옆으로 돌려 버린 미렌과 눈을 마주했다.
그의 보라색 눈동자 속으로 광대가 툭 튀어나온 못난 얼굴이 보였다.
“황제는 어제 오로지 내 성만을 불렀는데.”
“…….”
“너는 나를 헤겔이라 불렀잖아.”
이상하다, 그렇지?
웃음기가 섞인 그 한마디에 미렌은 심장이 떨어졌다.
당장 헤겔이 이미 알면서 장난을 치는 건지, 아니면 정말 모르고 물어보는 건지 헷갈렸다.
제발 헤겔이 자신을 알아본 게 아니길 바랐다. 누구에게도 들켜 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침을 삼킨 미렌이 침착하게 그의 의중을 물으려던 순간이었다.
헤겔의 뒤에서 큰 소리가 나며 문이 벌컥 열렸다.
“미렌, 지금 일어났다고……!”
익숙한 목소리였다.
라이언의 낮지만 어딘지 다급한 목소리가 헤겔의 등 뒤에서 울렸다.
그가 들어왔음을 안 미렌이 어서 헤겔의 가슴팍을 밀어 그와의 사이를 벌렸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들어와 모든 상황을 지켜본 라이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헤겔, 카르너.”
“아, 잠깐만. 나한테 설명할 기회를 주……! 억!”
헤겔의 귀 옆으로 장검이 스쳐 지나갔다.
훅, 그의 머리카락 몇 가닥을 자르며 어깨 위를 스친 장검이 벽에 꽂히자 헤겔이 눈을 크게 치떴다.
“잠깐, 자…… 야!”
두 손까지 들어 가며 자신의 무죄를 피력하던 헤겔을 무시하고 라이언이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섰다.
그러며 옆에 있는 의자를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마법 시전할 시간이라도 달라고, 아니, 소설에서도 변신할 시간은 주잖아!”
라이언이 한 손으로 든 의자는 황실에서 직접 제작한 특별한 의자로, 무려 금으로만 제작한 것이었다.
장식과 함께 한눈에 보기에도 무척이나 무거워 보이는 의자를 그는 한 손으로 들었다.
그리고 가볍게 그것을 헤겔에게 던졌다.
벽에 기대 있던 헤겔이 저도 모르게 주르륵 앉아 그것을 피했다.
벽을 맞고 퉁 튕긴 의자가 옆을 나뒹굴었다.
맞았다간 당장에 머리가 으깨져도 이상하지 않을 크기와 무게였다.
헤겔이 이미 넋이 나간 얼굴로 자리에 주저앉자 미렌이 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는 와중에도 라이언은 이미 헤겔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아마 그의 앞에 다다랐다간 주먹으로 사람을 죽이는 진귀한 모습을 볼 수 있을 터였다.
놀란 미렌이 먼저 뒤에서 라이언을 불렀다.
“라이언, 그만……!”
바쁘게 돌아가는 상황에 미렌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은 그녀의 몸이 건강한 반대쪽 신체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저도 모르게 다급하게 일어섰던 미렌은 그만 다리가 꺾여 앞으로 넘어졌다.
아니, 넘어질 뻔했다.
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등을 보인 채 걸어가던 라이언이 어느새 그녀의 허리를 잡은 뒤였다.
넘어가는 몸에 저도 모르게 앞에 있는 것 아무거나 잡았던 미렌은 정신을 차리고서야 그게 라이언의 손이라는 걸 알았다.
고개를 들자 라이언이 얼굴을 구긴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그리 다급하게 일어서? 내가 듣지 못했으면 어찌하려고. 당신은 넘어지는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위험하다고 했잖아.”
“……상황이 급박한 것 같아서요. 라이언의 귀에 제 목소리가 안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당신의 목소리가 내 귀에 들리지 않은 적은 없어.”
단 한 번도.
그의 단호한 눈빛이 그녀를 향했다.
알고 있었다. 라이언은 단 한 번도 미렌의 목소리를 무시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방금 전에도 말이 끊겼다는 이유만으로 돌아와 자신을 받아 든 것이겠지.
미렌은 라이언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방금은 내가 있어서 괜찮았지만, 만약 내가 없으면 어쩔 뻔했어. 마리아라도 함께……, 마리아는 어딜 간 거야?”
“라이언.”
“안 되겠어. 이제껏 시종을 줄여 왔지만 이제는 늘리는 게….”
“언제나 제가 넘어질 때에는 당신이 있어 주셨잖아요.”
초조하게 말하던 라이언의 말이 뚝 끊겼다.
입을 다문 라이언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입매를 일자로 다문 그는 결국 더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먼저 옆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눈을 피해 버린 것과는 별개로 그녀의 허리를 조금 더 꽉 잡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미렌은 그가 평소대로 돌아왔음을 알았다.
제 앞에 서면 한없이 쑥스러워하는 라이언, 그가 맞았다.
“방금은 왜 그러고 있었던 거야.”
“헤겔 말입니까?”
그러며 미렌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아마도 헤겔이 주저앉아 있을 방향이었다.
그런데 그곳엔 바닥을 나뒹구는 의자만 있을 뿐 헤겔은 사라진 뒤였다.
다급히 문 쪽을 바라봤지만 열린 흔적이 없었다.
미렌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헤겔 씨?”
문을 열거나 창문으로 나갔다면 모를 리가 없을 테니 아무래도 마법을 사용해 나간 모양이었다.
그녀가 얼굴을 찌푸린 채 고민하자 라이언이 부드럽게 그녀의 고개를 당겼다.
“벌써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되었나?”
“이름이요? 아…….”
저도 모르게 헤겔 씨, 라고 불렀던 미렌은 그제야 제 실수를 깨달았다.
라이언의 입장에선 아직 대화를 나눈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은 그를 이름으로 부르는 게 이상했을 터였다.
미렌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도 모르게 그리 부른 거라…….”
어쩔 수 없이 라이언에게 거짓말을 하게 된 그녀는 차마 그의 눈을 바라보지 못하고 눈을 아래로 내렸다.
그래서 라이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가 차갑게 식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한없이 쑥스러워하던 이라곤 생각하지 못할 반응이었다.
아직까지 미렌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있던 라이언은 그곳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애써 노력해야 했다.
결국 라이언이 그녀의 허리를 당겨 완전히 제 품 안으로 넣었다.
와락 끌어안자 얼떨결에 그의 어깨에 고개를 올리게 된 미렌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라이언?”
“미안해. 당신이 나를 폐하나 토르가 아닌 라이언으로 부르기까지 1년이 넘게 걸렸어서, 나도 모르게 질투를 했어. ……당신을 의심해서는 안 되는데.”
그의 목소리가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제 앞에서만 이리 약한 모습을 보여 준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미렌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그의 등을 토닥였다.
“괜찮습니다.”
느릿하게 토닥이자 그녀의 머리 위에서 긴 숨이 토해졌다.
그는 미렌의 손길에 온몸에 들어갔던 힘을 풀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미렌, 가끔 내가 당신을 힘들게 하면.”
“예?”
“그러면 당신이 꼭 나를 말려 줘야 해.”
“라이언이 저를 힘들게 할 리가요.”
미렌은 오늘 처음으로 그의 무력을 목격했다.
라이언이 황제이며, 걸출한 검사임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눈으로 목격한 적은 몇 번 되지 않았다.
그는 단 한 번도 미렌을 권력과 힘으로 누른 적이 없던 탓이다.
그래서 그녀는 알지 못했다.
자신을 끌어안은 라이언의 눈빛이 싸늘하게 죽어 있음을.
그는 차갑게 식은 얼굴을 한 채 뜨겁게 열망하는 목소리를 내었다.
“당신이 나를 말려 줘야 해.”
그래야만 해,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