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단 하나뿐인 복숭아
카르너? ……내가 아는, 헤겔 카르너?
아직까지 라이언의 품에 안겨 있던 미렌이 두 눈을 크게 떴다.
헤겔 카르너가 어째서 이곳에?
그녀가 다급히 머리를 굴리는 사이 라이언과 헤겔의 신경전은 계속됐다.
둘 사이로 미묘한 눈빛이 오가며 살기까지 내려앉았다.
그 순간, 헤겔이 문득 두 손을 들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가 건성으로 고개를 까닥이고서 입을 열었다.
“그래, 방금은 내 실수. 미안하게 됐습니다.”
헤겔이 먼저 잘못을 인정했는데도 라이언은 그의 목을 겨눈 검을 거두지 않았다.
결국 미렌이 먼저 손을 올려 라이언의 손등을 감싸 쥐었다.
그녀가 그것을 내리자 놀라울 정도로 순순히 검이 떨어졌다.
철컥이는 소리와 함께 검이 그의 허리로 돌아갔다.
“분명 멋대로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을 텐데.”
“난 여기가 황후의 정원인 줄도 모르고 들어왔다고. 알았으면 안 들어왔을 겁니다. 누가 죽고 싶어서 제 발로 황제 폐하의 ‘그’ 황후 전하를 보러 들어오나?”
라이언의 일갈에 헤겔이 농담이라도 하듯 가볍게 대꾸했다.
그런데 그 대답이 묘했다.
‘그’ 황후?
죽고 싶으면 들어온다고?
분명 이곳에서 사람을 본 적이 없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저 황후의 정원이니 그런 줄 알았다.
헤겔의 말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뉘앙스가 마음에 걸렸다.
“입, 다물어라.”
“아…….”
픽.
‘아…….’라고 대답하는 헤겔의 말끝에 짧은 웃음소리가 담겼다.
나뭇가지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헤겔의 턱이 순간 까닥이며 아래로 내려왔다.
미렌은 그 조그만 행동이 자신을 보기 위한 것임을 알았다.
다시 말해서, 그는 미렌을 바라보며 웃은 것이다.
미렌이 순간 눈썹을 들어 올렸다.
헤겔의 성격이 꽤 재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막상 다시 처음 보는 사이가 되자 아주 거슬렸다.
“그럼, 미천한 마법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카르너.”
“예?”
“네가 알고 있는 사람도 미렌이라고 했나.”
쿵. 쿵. 쿵.
라이언의 나직한 질문에 미렌의 심장이 떨어졌다.
그의 품에 안겨 있던 미렌은 자신의 심장 소리가 라이언에게 들릴까 두려웠다.
날이 어두워 다행이었다.
그가 만약 제 얼굴을 보았다면 사색이 된 얼굴을 두고 어딘가 이상했음을 눈치채었을 것이다.
라이언은 자신의 얼굴색을 기가 막히게 알아챘으니까.
그녀가 긴장했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손을 말아 쥐었다.
“고귀하신 황후 전하와는 다르게 평범한 농부의 딸이죠.”
“……농부의 딸?”
“세상에 미렌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헤겔의 대답은 자연스러웠다.
그는 자신이 황후와 그녀를 비교했다는 것 자체가 우스웠는지 짧게 웃기도 했다.
상황이 일단락되는 것 같자 미렌도 안심하려 했을 때였다.
라이언이 문득 그의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름이 정확히 무엇이라고?”
“미렌 우…….”
“라이언!”
미처 헤겔의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미렌이 그것을 끊어 냈다.
그러자 두 남자의 시선이 동시에 그녀에게 닿았다.
내내 헤겔에게 집중하던 라이언도 미렌이 자신을 부르자 곧장 고개를 내렸다.
다정하게 그녀와 눈을 맞춘 라이언이 ‘응, 미렌’, 하고 나직이 불러 왔다.
그런 라이언과 눈을 마주하던 미렌은 제 눈동자가 떨리진 않는지 걱정이 되면서도 입을 열어야만 했다.
헤겔과 라이언의 대화가 계속될수록 어딘지 불안했다.
“이만…… 들어가고 싶습니다. 날이 추워서요.”
“내가 당신의 생각을 하지 못했어. 어서 들어가지.”
그 한마디에 라이언이 당장 제 외투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둘렀다.
체격 차이가 완연히 나는 탓에 어깨에 걸친 옷이 떨어질 것 같자 라이언이 그녀의 어깨를 제 손으로 감쌌다.
이제 라이언에게 ‘평범한 농민의 딸’인 미렌의 이야기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그는 오로지 미렌의 추위만을 걱정하며 그녀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라이언에게 어깨를 감싸인 채 들어가던 미렌은 문득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아직 헤겔이 서 있었다.
달빛이 교묘하게 겹쳐지며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자 미렌은 눈을 찌푸려 그쪽을 자세히 바라봤다.
그제야 헤겔의 입과 코가 보였다.
그때였다.
그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움직이더니, 무언가를 말해 왔다.
‘안녕.’
소리 없이 전해진 인사였다.
***
“미렌, 엄마 부탁 좀 들어주겠니? 지금 빨리 시장에 가서 여기 적힌 것 좀 사 오렴.”
“……지금요?”
“얘는! 그럼 지금 가야지. 언제 가니?”
그렌의 바지에 난 구멍을 꿰매고 있던 미렌이 고개를 들고 어머니의 등을 바라봤지만, 더 이상 들려오는 말이 없었다.
이럴 때는 잠자코 다녀오는 게 나았다.
오늘은 달마다 몇 안 되는 큰 장이 서는 날이었다.
볼거리야 많겠지만 이미 수십 년째 봐 온 미렌에게는 그다지 흥미가 되지 않았다.
그녀가 꾸역꾸역 양말을 신고 있을 때였다.
문 뒤에서 얼굴만 삐죽 내민 그렌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렌, 같이 갈까?”
“응!”
그렌이 기다렸다는 듯 얼굴을 활짝 펴며 웃었다.
제 동생이지만 저럴 때만큼은 정말 한입 물어 주고 싶을 만큼 귀여웠다.
나이 차가 거의 열일곱 살이나 나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그렌의 겉옷을 입힌 미렌이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아직 겨울이 다 오지는 않아서 가벼운 겉옷으로도 충분했다.
“누나.”
“어, 왜?”
“누나는 수도로 안 가?”
“수도? 갑자기?”
“옆집 형이랑 누나들은 다 갔대.”
어딘지 시무룩한 말이었다.
그렌의 말대로 이 근처에 사는 아이들은 모두 스무 살이 되면 수도로 떠났다.
작정하고 농부가 될 게 아니라면 이 프레니티 영지에서 할 일이라곤 없으니까.
미렌은 픽 웃으며 그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누나는 안 가.”
“왜? 수도로 가면 돈 많이 번대.”
“어…… 그렇기는 한데. 그렌, 누나가 생각하기엔 말이지.”
“응.”
“사실 돈은 그렇게 안 중요해.”
언제였더라.
그래, 처음 아버지가 복숭아밭을 시작했을 때였다.
복숭아가 모두 썩는 바람에 집안에 돈이 한 푼도 없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미렌은 에드가 공작가의 재산을 탐냈다.
아무리 어릴 때더라도 얼굴도 자주 보지 못하는 또 다른 아버지 에드가 공작보다는 우드 가족을 더 사랑했으니까.
물론 어린 미렌에게 마차를 타고도 몇 달씩 걸리는 에드가 공작 성의 재산을 빼내 올 방법은 없었다.
단지 속으로 바랐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미렌 아가씨, 복숭아가 드시고 싶다 하셨죠? 마침 복숭아가 들어왔답니다.’
‘보, 복숭아요? 아버지께서 사 오셨어요?’
며칠간 집을 떠났던 에드가 공작은 돌아와 그녀의 방으로 찾아왔다.
미렌은 시녀들이 아버지께서 보러 오신다며 수선을 떠는 통에 덩달아 설레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공작이 내민 것은, 황금으로 만들어진 복숭아였다.
고급스러운 함에 담긴 그것을 내민 에드가 공작이 그녀에게 말했다.
‘베르체 가문에서 보냈다.’
‘……저한테요?’
‘그 가문의 셋째 영식이 곧 약혼할 나이라지.’
어린 미렌의 입매가 움찔거렸다.
에드가 공작은 꼭 그녀가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훑어보며 말했다.
‘걱정 마라. 가장 값비싸게 결혼시켜 줄 테니.’
에드가 공작은 복숭아를 바닥에 내려 둔 채 그곳을 떠났다.
차마 울지도 못하는 그녀에게 시녀들이 다가와 값비싼 장난감을 내밀었지만, 마음마저 달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다음 날이 되었을 때였다.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 일어난 미렌은 좁은 집에서 제 어머니와 아버지가 모여 있는 것을 보곤 서둘러 다가갔다.
그중 아버지가 먼저 미렌을 발견하고서 그녀를 제 다리 사이로 앉혔다.
얼떨결에 품에 안기고서야 미렌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토록 소중히 바라보고 있던 걸 볼 수 있었다.
‘미렌! 이것 좀 보렴, 복숭아란다!’
‘보, 복숭아요……?’
‘혹시 멀쩡한 게 없나 싶어서 밭을 둘러보는데, 네 아빠가 이렇게 찾았지 뭐니.’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던 듯 과도를 들어 복숭아를 깎기 시작했다.
이윽고 예쁘게 깎은 한 조각을 미렌의 입가에 들이밀며 어서 먹어 보라 재촉했다.
어쩔 수 없이 두 손으로 한 조각을 고이 받아 든 미렌이 차마 먹지 못하고 어머니와 아버지를 올려다봤다.
그녀가 울상인 얼굴로 물었다.
‘엄마는요? 아빠는요?’
‘우린 이미 먹었지. 다 먹고 우리 딸 거 남겨 둔 거니까, 어서 먹어 보렴.’
‘지, 진짜요?’
눈치를 보던 미렌이 결국 야금야금 복숭아를 먹었다.
복숭아의 맛이 너무 달콤해서 미렌은 그만 어머니가 깎아 두신 걸 모두 먹고야 말았다.
접시가 비자 아버지가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딸, 아빠가 다음엔 잔뜩 먹게 해 줄게!’
‘당신도 참. 딸아이가 좋아한다고 복숭아 농사를 하겠다는 사람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어요?’
‘내 딸이지만 너무 예뻐.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가 우리한테 왔다니, 너무 신기하지 않소.’
미렌은 그날을 끝으로 에드가 공작가의 재산을 욕심내지 않았다.
꼭 돈이 전부가 아니란 것을 어린 나이에 깨달았던 것이다.
“누나한테는 돈보다 그렌이랑 우리 가족들이 훨씬 더 중요해.”
“진짜? 그럼 누나는 안 가?”
“어. 안 가.”
그러자 그렌이 겨우 시무룩한 기색을 걷어 냈다.
이제껏 녀석이 시무룩한 이유가 당연히 시장에 가고 싶어서라고 생각했던 미렌은 낮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남매는 해가 지기 전에 시장에서 돌아왔다.
집까지 가는 길이 험해서 어두워지면 위험하기도 했고, 별로 시장에 관심이 없는 탓도 있었다.
그렌과 함께 집 안에 발을 들였을 때였다. 주방 쪽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올해에는 보내야지 않겠소?”
“……그래야죠. 남들 다 가는데 우리 애만 이렇게 시골에서 농사나 짓게 할 수도 없고.”
“수도에 내가 아는 사람이 있어. 방은 그쪽으로 구하면 되니까…….”
“이게 무슨 소리예요?”
주방으로 성큼 들어선 미렌이 얼굴을 구긴 채 어머니를 바라봤다.
마주 앉아 있던 두 분이 미렌을 향해 당혹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미렌, 벌써 왔니?”
“제가 어딜 가는데요.”
“엄마, 아빠! 누나는 수도에 가고 싶지 않대요!”
짧게 소리친 그렌이 달려가 어머니의 품에 안겼다.
어머니가 그렌의 외투를 벗기는 사이 미렌이 제가 사 온 물건을 들이밀었다.
가벼운 이불이며 옷들이 굴러 나왔다.
“왜 멀쩡한 이불을 사 오라 시키나 했더니, 절 보내신다고요.”
“미렌, 다른 집 아이들은 모두 수도로 가서 살잖니. 너도 평생 농사나 짓는 것보다는…….”
“제가 가기 싫다잖아요.”
미렌이 답답하다는 얼굴로 낮은 숨을 내쉬었다.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화내고 싶지 않았다.
“제가 가기 싫다고요, 아버지. 어머니.”
“딸, 아빠 말은 그러니까…….”
“여보, 됐어요. 그만해요.”
그렌을 안고 있던 어머니가 문득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서 아버지에게 그렌을 안고 잠깐 산책을 다녀오라 말하자 얼마 가지 않아 집 안에는 둘밖에 남지 않았다.
잠시 말이 없던 어머니가 문득 입을 열었다.
“미렌, 넌 수도에 가야 해.”
“그러니까 어째서요. 남들이 다 가니까?”
“곧 전쟁이 난다지 않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