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12)화 (12/133)

미렌, 그리고 미렌

“그러니까 정확히는 다른 사람의 마나도 같이.”

“……그게 무슨 말이죠.”

“한 몸에 두 개의 마나가 흐른다는 뜻이야.”

헤겔은 답지 않게 진중한 얼굴로 제 턱을 매만졌다.

미렌이 긴장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그가 자신의 추론을 하나씩 늘어놨다.

“그런데 하나는 엄청 가늘어. 꼭 금방이라도 끊길 것처럼……. 나머지는 정말 일반인 정도의 평범한 마나고.”

“사람한테서 마나가 끊기면, 어떻게 되는데요.”

그 질문에 헤겔이 눈을 끔뻑였다. 그리고 당연한 대답이 들려왔다.

“죽어.”

헤겔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는 일반인인 미렌도 이해하기 쉽도록 마나의 원리를 차근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람마다 마나를 타고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어. 보통은 타고나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 마법사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몸에 마나가 있는 사람은 그게 끊어지면 죽어.”

“꼭이요?”

“응, 대부분은. 그래서 마법사들은 마나가 희미한 사람을 두고 곧 죽을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해.”

짐짓 걱정스러운 얼굴이 된 헤겔이 그녀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툭 짚어 왔다.

꼭 열이 나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이마를 짚었다가, 그다음엔 볼을 꾹 찔렀다.

“너 어디 아파?”

“……제가요?”

“아니, 그냥 보기엔 엄청 건강해 보이는데……. 어쨌든 마나가 희미하니까. 병이라도 있어? 숨기는 거 있으면 지금 말해.”

성큼 다가온 헤겔이 미렌의 얼굴 이곳저곳을 살폈다.

볼 수 있는 것이라고 해 봐야 고작 미렌의 말랑한 볼 살뿐이겠지만.

본의 아니게 헤겔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워지자 미렌이 훌쩍 물러났다.

다가간 만큼 도로 멀어지자 헤겔이 달빛 아래에서 얼굴을 잔뜩 구겼다.

어딘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보면 몰라요? 제가 건강하지 않으면 이 세상 누가 건강하다고요.”

“대답 똑바로 해.”

농담처럼 말한 미렌과 달리 헤겔로부터 날카롭다 못해 차가운 대답이 돌아왔다.

순간 헤겔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자 미렌이 저도 모르게 놀라 ‘예?’라고 되물었다.

그러나 헤겔은 미렌이 멀어진 만큼 다시 다가갔다. 꼭 도망간 그녀를 잡으려는 것 같기도 했다.

다가간 헤겔은 미렌의 바로 위에서 허리를 굽혀 얼굴을 내려다봤다.

둘의 거리가 무척이나 가까웠다.

“물었잖아. 병이라도 있냐고.”

“……없습니다. 없어요.”

미렌의 연이은 대답에도 의심스럽다는 얼굴로 자꾸만 눈을 응시하던 헤겔은 결국 자신이 먼저 그녀에게서 물러났다.

겨우 거리가 생기자 미렌이 속으로 놀란 제 심장을 가다듬었다.

“없으면 됐어.”

“어디 아프기라도 하면 어쩌게요? 죽을병이라도 걸렸으면?”

질문에는 별다른 의도가 없었다.

단지 방금 전 대화가 평소와 달라서 어색해진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한 질문이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헤겔은 왜인지 미간까지 좁혀 가며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다 결국 대답이 나왔다.

헤겔이 제 겉옷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고급스러운 천 조각이었다.

“너 줄게.”

“그거…… 아르테미스 아닙니까?”

“맞는데?”

고급스러운 천을 헤집자 그 안에서 나온 건 미렌과 헤겔이 그간 한참을 찾고 다녔던 아르테미스였다.

헤겔은 아무렇지 않게 그것을 건네며 어서 받으라는 듯 들이밀었다.

“……누가 의뢰해서 찾은 거잖아요.”

“그게 뭐가 중요해.”

“안 중요해요? 얼마나 받기로 했는데?”

“백만 골드쯤?”

근데 안 중요하다고요?

미렌이 저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백만 골드면 적어도 수도의 비싼 땅 하나는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녀가 받을 생각이 없어 보이자 헤겔이 먼저 미렌의 손을 잡고 그 위에 아르테미스를 올렸다.

미렌이 그걸 멍하니 바라보자 헤겔이 그녀의 이마를 툭 쳤다.

“나한테 백만 골드면 별로 안 커.”

“……근데 왜 의뢰를 받았대요. 그렇게 힘들게 산을 뒤지면서까지?”

“의뢰한 사람이 너무 절박해 보였거든. ……옛날 내 모습 같기도 했고.”

헤겔이 씁쓸하게 뒷말을 덧붙였다.

어딘지 괴로워 보이는 모습에 미렌이 냉큼 다가와 도로 그의 손에 아르테미스를 쥐여 줬다.

“저, 진짜로 안 아픕니다. 멀쩡하다 못해 너무 건강해요.”

“……진짜?”

“예, 정말로.”

그럼에도 헤겔이 어딘지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로 아르테미스를 쥐고만 있자 결국 미렌이 움직였다.

헤겔의 손에서 다시 천을 감싸 안주머니로 넣어 주기까지 한 미렌이 그의 가슴팍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 필요하다는 사람한테 주세요. 간절하다면서요.”

“그래, 뭐. 사실 아르테미스는 건강한 사람한테는 오히려 독이 될 수 있거든.”

“저한테 지금 독을 먹이려 했다고요?”

“야, 그게 아니라!”

헤겔의 다급한 부정에 미렌이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그러자 결국 헤겔도 마주 웃기 시작했다.

슬슬 그와의 헤어짐이 다가오고 있었다.

“헤겔 씨, 안녕히 가세요.”

“……응.”

그녀가 어서 가라는 듯 손짓하자 어딘지 아쉬운 얼굴로 뒤를 돌아보던 헤겔도 결국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미렌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점차 멀어지자 집 안으로 들어갔다.

떠났던 헤겔은 문득 뒤를 돌아봤다.

저 멀리 미렌이 밝게 불이 켜진 집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이상한 자식.”

백만 골드를 그냥 준다는데 욕심도 안 나냐?

너, 진짜 이상해.

***

미렌은 요즘 들어 이상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황후 쪽이 이상했다.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숨쉬기가 벅찰 정도로 힘이 들었던 게 미렌 에드가의 몸이었다.

그런데 최근엔 당장 눈을 떠도 쉽게 움직일 수 있었고, 거기다 머리도 개운했다.

최근 아버지의 복숭아밭 수확이 끝나며 농한기가 다가왔다.

겨울철에는 딱히 할 일이 없어 그녀는 자주 낮잠을 자거나 일찍 잠들었는데 그 바람에 미렌 에드가의 활동이 늘어났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몸이 가벼워지자 기분이 좋기는 했다.

라이언과 그간 하지 못했던 아침 식사를 할 수도 있었으니까.

“……라이언?”

오늘도 밤에 깨어난 미렌은 자신이 유달리 일찍 일어났음을 깨달았다.

저녁을 먹은 뒤 바로 잠든 탓에 오늘은 달이 뜨자마자 미렌 에드가로서 깨어날 수가 있었다.

라이언은 아직 업무를 보고 있을 시간이었다.

다른 이들도 자신이 이 시간에 깨어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마리아라도 찾을 생각으로 그녀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마리아, 거기 있는가?”

분명 방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 텐데.

나지막이 불러 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어쩌면 잠깐 자리를 비운 걸 수도 있겠다 싶었다.

라이언을 마중하러 갈까.

문득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다.

요 몇 달간은 눈을 뜨면 한밤중인 탓에 언제나 라이언이 자신을 기다렸다.

그러니 오늘쯤은 제가 먼저 그를 마중하러 가도 좋을 터였다.

결정을 내린 미렌은 당장에 실내용 슬리퍼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

몇 걸음 움직였지만 벽을 짚지 않아도 걸을 수 있을 만큼 몸 상태가 좋았다.

“……이쪽이 정원이었나.”

그런데 막상 하지 않던 일을 하려니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8년이나 이곳에 살고 있었지만 자주 돌아다니지 않았던 탓에 길이 헷갈렸다.

라이언과 엇갈리지는 말아야 할 텐데.

결국 한참을 걸은 끝에 밖으로 나올 수는 있었다.

다른 때보다 날씨가 좋아서 그다지 춥지도 않았다.

정원으로 나오기는 했는데 막상 여기가 중앙 정원인지, 아니면 바깥과 이어지는 정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날이 어두워서 더 그랬다.

미렌이 시종이라도 한 명 만나길 바라며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거기.”

낮은 목소리가 뒤에서 그녀를 멈춰 세웠다.

미렌이 고개를 뒤로 돌리자 거의 라이언만큼이나 키가 큰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마침 달빛이 들지 않는 곳에 있던 탓에 상대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황궁에서 황후를 두고 ‘거기’라고 부를 사람은 없을 테니까.

“저요?”

“그럼 여기 그쪽 말고 누가 있다고. 길 좀 물어도 되나?”

……건방지다 못해 싸가지가 없는 질문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남자는 마침 길게 자란 꽃가지에 가려 눈과 코 부분이 교묘하게 보이지 않았다.

대신 머리카락은 보였는데, 가슴까지 길게 내려와 있었다. 색깔은 밤이 어두워 무슨 색인지 확실하지가 않았다.

가슴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

문득 헤겔이 생각났다. 그가 떠난 지는 어느새 한 달여가 흘러 기억이 희미해져 있었다.

미렌이 혹시나 싶어 그에게 한 걸음 다가서려 했을 때였다.

“미렌!”

누군가 순식간에 다가와 그녀를 등 뒤에서 감싸 안았다.

익숙한 향기에 그가 라이언이라는 것을 안 미렌은 고개를 들어 제 뒤를 바라봤다.

역시나 라이언이 얼굴을 잔뜩 구긴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렌, 왜 여기까지 나와 있는 거야? 마리아는 어디에 두고!”

“마중하러요. 매번 라이언이 저를 기다렸지 않습니까.”

“……당신이 방에 없어서 심장이 떨어졌어.”

느리게 눈을 감은 라이언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미렌은 미안한 얼굴로 손을 들어 그의 뺨을 쓸어내렸다.

그러자 둘의 앞에서 잊고 있던 이가 목소리를 냈다.

“미렌, 이라고?”

아직 자리를 떠나지 않은 남자가 미렌과 라이언을 바라보고 있었다.

타인의 목소리에 경계심 어린 얼굴로 눈을 떴던 라이언이 그를 확인했다.

미렌에게는 교묘하게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키가 큰 라이언에게는 상대가 보이는 것 같았다.

얼굴을 확인한 라이언이 그에게 말했다.

“당신이 왜 여기 있지?”

“길을 잃어서. ……여긴 대체 어디야?”

남자가 작게 투덜댔다.

그러자 라이언이 한쪽 손을 들어 올려 뒤에 시립해 있던 기사에게 그를 안내하라 명령을 내렸다.

그것이 끝나자 라이언은 한 번 더 제 품 안 가득 미렌을 껴안았다.

뒤에서 그녀를 안은 라이언이 미렌의 뒷목에 제 얼굴을 묻었다.

꼭 미렌이 이곳에 있는지 확인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아, 근데.”

기사와 함께 떠나려던 남자가 문득 멈춰 섰다.

그는 힐끗 뒤를 돌아보더니 묘한 얼굴로 질문했다.

“이름이, 미렌이라고?”

“네가 알 필요는 없을 텐데.”

“그렇기는 한데……. 아는 사람이랑 이름이 같아서.”

순간 라이언이 미렌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가 무척이나 경계하는 것 같자 남자가 두 팔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게까지 경계할 필요는 없잖아. 내가 관심 있는 건 다른 미렌인데.”

“황후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아…… 그쪽이 황후? 그 시한부인?”

그 순간 라이언이 제 우측에 차고 있던 검을 빼내어 그를 겨눴다.

“죽고 싶은 건가, 카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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