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나의 작은 복숭아
라이언과 미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시간은 흘러 어느새 방 안의 창 너머로 해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 내내 날씨가 흐린 탓에 구름이 끼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아침이 다가오는 건 분명했다.
라이언은 제 품에 안긴 미렌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새벽까지만 해도 그가 미렌의 품에 안겨 있었지만, 그녀가 잠들자 위치는 뒤바뀌어 이제 라이언이 미렌을 안고 있었다.
품에 안겨 있는 걸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녀를 제 품에 안아야만 이 줄어들지 않는 갈증이 조금이라도 가실 것 같았다.
문득 구름 사이로 햇빛이 드리워지자 미렌이 눈을 찡그렸다.
“……미렌이 깨겠어.”
미렌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팔을 빼내던 라이언은 문득 웃음이 터졌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깨어나지 않는 그녀가 두려워 정신이 나가지 않았나.
고작 몇 시간 동안 깨어난 그녀를 보았다고 어느새 제 심장은 안정되어 있었다.
그래도 오늘은 제법 오래 깨어 있었다.
아침 해가 뜰 때까지 대화를 나눈 것은 부부가 된 뒤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비록 오늘도 아침 식사는 함께하지 못했지만.
자리에서 일어난 라이언은 커튼을 내려 다시 방 안을 어둡게 하고서 발소리조차 내지 않고 밖으로 향했다.
문 바로 앞에는 마리아가 서 있었다.
“황후는 다시 잠들었다.”
“예, 폐하.”
“오전 중으로 영양을 챙기도록 하고, 오늘은 진찰을 보는 날이었지. 약의 내용이 바뀌거든 보고를 올려라.”
“예.”
언제나와 같은 명령이었다.
마리아는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인 채 담담히 대답했다.
그녀가 아는 황제는, 에드가 황후에 한해서라면 너무 나서는 것도, 그렇다고 방치하는 것도 싫어했다.
모든 것은 적당히.
황제는 그것을 바랐다.
황후에게 쏟는 관심은 그 자신을 제외하고 누구도 가져서는 안 되었다.
“아.”
말을 마친 라이언이 떠나려다 문득 걸음을 멈췄다.
마리아가 의아한 기색으로 고개를 숙이자 그가 낮게 웃으며 물었다.
“네가 알려 주었나?”
“……황송합니다.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지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고개를 숙인 마리아에게 보이는 것은 라이언의 발뿐이었다.
머리 위에서 그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한 번 더 말했다.
“연인 사이에는 손을 잡아야 한다고.”
“네?”
손을 잡아?
마리아는 순간 그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 몸을 움찔 떨었다.
그러자 라이언도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했는지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네가 가르쳐 주지 않았나?”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폐하.”
그 순간 아래로 떨어져 있던 라이언의 손이 마리아의 턱을 잡아 들어 올렸다.
그와 눈이 마주친 마리아는 순간 오늘 새벽의 그가 떠올라 공포로 떨리는 제 손을 꾹 말아 쥐어야 했다.
라이언이 무미건조한 얼굴로 그녀의 눈을 살폈다.
마리아는 그렇게 한참을 그에게 붙잡힌 채 있어야 했다.
라이언은 마리아를 탐색이라도 하는 것처럼 내려다보다 마침내 이야기했다.
“네가, 아니라고?”
“……예, 폐하. 폐하께서도 아시듯 전하께서는 낮 동안 깊은 잠에 빠지십니다. 오랜 지병이셨던 탓에 깨어나는 일은 거의 전무하십니다. 제 아래 시녀들이 돌아가며 전하의 방을 지키지만, 최근엔 낮에 깨어나신 적이 없습니다.”
침착하게 보고하자 라이언이 한 번 더 그녀를 탐색하듯 살폈다.
마리아는 그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검다 못해 빛 한 점 들지 않는 라이언의 눈동자는 종종 죽은 사람의 동공 같아 두려웠다.
이윽고 라이언이 마리아로부터 손을 떼어 냈다.
미렌을 모신 지 가장 오래된 시녀인 마리아는 익숙하게 다시 중심을 잡았다.
“황후는 깨어난 적이 없다…….”
“깨어나셨다면, 제가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대답에 라이언이 픽 웃었다.
그는 결국 뒤돌아 황후의 방 앞을 떠났다.
***
“헉.”
벌컥 자리에서 일어난 미렌이 주변을 살폈다.
그러자 익숙한 제 다락방의 정경이 보였다.
그녀는 그곳이 자신의 방이라는 것을 깨닫고서 안심한 듯 숨을 내쉬었다.
아니, 안심하려 했다. 그러지 못한 것은 제 손 위로 흰색의 털 뭉치가 쌓여 있기 때문이었다.
놀란 미렌이 그곳에서 번뜩 손을 빼냈다.
“……음. 일어났냐.”
낮은 목소리가 들리고서야 그 흰색 털 뭉치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건 털이 아니라 헤겔의 긴 머리카락이었다.
그가 제 침대 옆에서 엎드려 잠들어 있는 통에 머리카락이 손등을 간질이고 있었다.
졸지에 그와 두 밤이나 함께 보낸 미렌이 미간을 좁혔다.
“왜 또 여기 있습니까?”
“뭐? 기억 안 나?! 내가 널 살렸잖아!”
“아, 수영을 못 해서 물을 모두 들어 올리셨죠.”
“쓸데없는 건 기억하지 마.”
헤겔이 투덜대듯 말하며 고개를 모로 돌렸다.
익숙하게 그것을 무시한 미렌이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침대 아래로 발을 뻗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가 중심을 잃고 몸을 휘청거렸다.
그런 미렌을 부축한 건 헤겔이었다.
제 뒤에 있는 의자까지 넘어뜨리며 일어난 헤겔이 재빨리 미렌의 팔과 허리를 잡았다.
“너 어제 물 잔뜩 먹었어. 오늘은 좀 쉬지 그래?”
“저보다 헤겔이 더 많이 먹었던 것 같은데요?”
“쓸데없는 건 기억하지 말라니까!”
그 외침에 미렌이 웃으며 헤겔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자연스럽게 홀로 서는 미렌을 보며 어쩐지 허전해진 헤겔은 저도 모르게 손을 몇 번 쥐었다 펴다가, 그런 자신을 깨닫고서 눈을 크게 떴다.
물론 미렌이 눈치채기 전에 어서 주먹은 펴 버린 뒤였다.
오늘도 흰 양말을 챙긴 미렌이 당장 나가기 위해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요 며칠 헤겔 씨 도와 드린다고 농사일이 많이 밀려서 바빠요. 아, 그런데요.”
“응?”
“그…… 언제 가십니까?”
방문을 나서던 미렌이 문득 뒤를 돌아봤다.
헤겔도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는 채였다.
미렌은 눈을 끔뻑대다 나직이 물었다.
“약초를 찾으면 바로 떠난다고 하셨는데.”
“갈 거야. 말 안 해도 간다고!”
“아, 예.”
그 말을 끝으로 볼일을 마친 미렌은 빠르게 1층으로 내려갔다.
혼자 남은 헤겔이 투정 섞인 말을 중얼거리다 결국 그녀를 따라 내려갔다.
미렌은 이미 1층에서 부모님과 인사를 하고서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헤겔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미렌의 뒤에 바짝 따라붙었다.
그녀는 제 뒤에 붙은 헤겔을 한번 보고는 되었다는 듯 제 갈 길만 향했다.
“따라오셔도 재밌는 거 없습니다. 그저 밭일이라서요.”
“그 정도는 알아.”
“모르는 것 같은데요?”
중얼거린 미렌은 바쁘게 움직여 밭에 도착했다.
저 멀리 그녀의 아버지가 도착한 미렌을 확인하고서 크게 손을 흔들었다.
미렌도 짧게 고개를 숙이고선 밭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홀로 밭을 개간해 복숭아나무를 키우고 있었다.
그 일을 시작한 지가 미렌이 열 살이었을 때니, 벌써 15년째였다.
처음에는 나무가 자라지 않거나 복숭아가 벌레로 인해 죄다 썩어서 문제였지만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다.
어렸을 적부터 그런 아버지를 따라 복숭아밭에 왔던 미렌도 능숙하게 그곳을 살폈다.
복숭아는 습기에도 약하고 병충해에도 약해서 조금이라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간 썩어 버리기 일쑤였다.
나무에는 마침 복숭아들이 탐스럽게 열려 있었다. 미렌이 하나씩 조심스럽게 수확하기 시작했다.
그걸 보던 헤겔도 슬쩍 그녀를 따라 손을 움직였다.
그렇게 헤겔이 막 복숭아 하나를 나무에서 떼어 냈을 때였다.
“헤겔 씨.”
“어?”
“거기, 벌레.”
은근히 자신이 수확한 복숭아를 뿌듯하게 바라보고 있던 헤겔이 미렌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순간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멍을 때리다가,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따라 눈동자를 움직였다.
그리고 발견했다.
그의 팔을 타고 오르는 애벌레 한 마리를.
“으아아아악!”
“가만히 좀 있어 봐요! 떼어 줄 테니까.”
“아, 안 떨어져! 이거 안 떨어진다고!”
“예예, 제가 떼어 드리겠습니다. 뚝.”
다가온 미렌이 손을 뻗어 헤겔의 팔에서 애벌레를 떼어 냈다.
복숭아는 당도가 높아서 벌레가 꼬이기 쉬운 과일이라 애벌레 정도는 당연했다.
미렌이 애벌레를 손에 쥔 채 헤겔에게 말했다.
“됐어요.”
“매, 맨손으로 그걸 잡아?”
“장갑이라도 드릴까요?”
“아니. 난 장갑 줘도 못 잡아.”
복숭아를 팔 한쪽에 낀 미렌이 빈 장갑을 건네자 헤겔은 단호하게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헤겔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슬쩍 애벌레를 정리하고 돌아왔다.
그동안 헤겔은 자신이 따 낸 복숭아 하나를 손에 꼭 쥔 채 미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 주변에 가득한 나무에서 벌레가 나올까 무서운지 연신 주변을 살피는 중이었다.
미렌이 돌아오자 헤겔이 단숨에 그녀의 옆에 붙었다.
“내 머리에 안 붙었지? 등에는? 나 좀 간지러운 것 같은데.”
“없어요. 헤겔 씨가 복숭아도 아닌데 벌레가 왜 붙어요?”
“응, 나 엄청 달콤하잖아.”
“아, 네에.”
가볍게 그 말을 무시한 미렌은 그 뒤로도 헤겔을 제 뒤에 붙인 채 빠르게 복숭아들을 수확하기 시작했다.
슬슬 해가 넘어가며 바구니 하나를 가득 채우고 난 뒤에야 그녀가 밭을 빠져나왔다.
물론 헤겔은 여전히 미렌의 뒤에 바짝 붙은 채였다.
그렇다고 그동안 가만히 있지는 않았는지 품에 복숭아 세 개 정도가 안겨 있었다.
“아, 더럽게 힘들다.”
“농사가 쉬울 리가요.”
“그러게. 난 마법이 쉬워서 좋아.”
휴.
짧게 한숨 쉰 헤겔은 제 옆에 있는 미렌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녀는 햇빛 때문에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복숭아가 가득 담긴 바구니를 힘겹게 들고 있었다.
물론 그의 머릿속에 그걸 대신 들어 주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 대신 헤겔은 손가락을 부딪쳤다.
그러자 미렌의 무거운 바구니가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알아서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걸 바라보던 미렌이 헤겔을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그, 혹시 농사일 해 볼 생각 있어요? 시급은 100실버.”
“저 복숭아 하나에 100실버인데? 지금 그걸로 날 고용하겠다고? 이 헤겔 카르너를?”
“더 못 줘요. 저거 팔아서 벌면 얼마나 번다고.”
허! 헤겔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주제에 연봉 협상도 안 된단다.
일반 마법사 한 명이 황성에서 받는 주급은 무려 9000골드였다.
복숭아 10000개를 팔면 버는 돈이었다.
미렌은 뻔뻔한 얼굴로 고용을 제안하고는 싫으면 말라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고서 헤겔을 뒤에 둔 채 저 멀리 날아가는 바구니를 따라 뛰어가기 시작했다.
“야!”
“헤겔 씨, 곧 가시죠?”
“뭐? ……오늘 저녁에 가긴 하지. 너 그만 눈치 줘라? 알아서 간다고!”
달려가던 미렌이 자리에 멈춰 섰다.
오늘 수확한 복숭아 바구니들을 모아 둔 곳이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잠시 쪼그려 앉더니 복숭아 몇 개를 헤집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조그만 바구니 하나를 헤겔에게 내밀었다.
“이거.”
“뭐야?”
“오늘 치 일급인데요.”
총 복숭아 5개였다.
미렌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동안 고생했어요.”
“……헤겔 카르너를 복숭아 다섯 개에 고용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너뿐일걸.”
“그럼 고마워서 주는 걸로.”
뭐가? 헤겔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미렌은 대수롭지 않게 복숭아 하나를 제 팔로 대충 슥슥 닦더니 한입 베어 물고서 대답했다.
“어제 구해 줘서요.”
헤겔이 놀라서 작게 입을 벌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복숭아를 베어 문 미렌이 헤겔을 바라보며 활짝 웃고 있는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