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는 초식 동물이다
침대 커튼을 헤집고 들어왔던 마리아는 어느새 뒷걸음질 쳐 물러났다.
미렌이 들어온 마리아에게 이만 가 봐도 된다며 손을 내저은 덕분이었다.
라이언은 마리아가 떠날 때까지 미렌의 목덜미에서 얼굴을 떼어 내지 않았다.
꼭 커다란 강아지 같은 라이언의 모습에 미렌은 웃음이 났다.
기침이 섞인 웃음소리에 라이언이 고개를 들었다.
“미렌, 호흡이 좋지 않아.”
“그렇습니까? 제가 물에…….”
아.
거기까지 내뱉은 미렌은 자신이 물에 들어갔다 온 건 반대편 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말을 하다 말자 라이언의 의아한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물이 마시고 싶어요.”
그 말과 동시에 라이언이 주저하지 않고 침대에서 내려갔다.
침대 옆 테이블에 있는 주전자로부터 미지근한 차 한 잔을 따라 그녀에게 건넸다.
미렌은 알맞게 식은 차로 칼칼한 목을 가다듬었다.
그제야 한결 말을 하기가 수월해졌다.
그사이 라이언은 일어선 김에 침대의 커튼을 하나씩 걷기 시작했다.
찬 기운이 들어올까 싶어 창문을 열 수는 없었지만 그나마 덜 답답하게 해 주고 싶은 탓이었다.
마리아가 문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시립해 있었다.
“라이언, 집무는요?”
“이미 끝내고 당신이 깨어나기를 기다렸어. 미렌, 오늘은 한 숟갈이라도 좋으니까…….”
“최근 들어 바쁘셨잖습니까.”
“모두 해결했어.”
“정말요?”
정말요, 폐하?
미렌은 그에게 진실을 구하듯 한 번 더 물었다.
옆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던 라이언은 이내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피했다.
“그래. 요즘 들어 남쪽 경계선이 심상치 않아. 곧 전쟁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지.”
“그런 분이 왜 제 침실에 계십니까? 조금이라도 쉬셔야죠.”
라이언의 얼굴 구석구석에 피로가 묻어 있었다.
미렌은 손을 뻗어 그의 뺨을 매만져 주려다 닿지 않는 바람에 제 손을 거뒀다.
그러다 문득 라이언이 먼저 그녀의 손을 잡아 왔다.
그는 미렌이 하려다 만 것을 알아채었는지 그 조그만 손에 제 뺨을 가져다 대었다.
차갑게 식은 미렌의 손과 달리 라이언의 볼은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머니께도 부리지 않았던 어리광이야.”
“부리지 않았던 게 아니라 못 하셨던 겁니다.”
미렌의 담담한 대답에 라이언이 픽 웃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태어난 이후 언제나 그는 황제가 될 것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황제가 될 것이니 울어서도, 투정을 부려서도 안 되었다.
제 아내는 그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리고 어떻게 이토록 쉽사리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 건지.
“그런가. 그럼 당신에게는 조금만 더 어리광을 부려도 될까.”
말을 마친 라이언이 미렌의 침대 위로 올라왔다.
출렁이던 침대는 그와 미렌이 조금의 틈을 두고 가만히 앉자 곧 잠잠해졌다.
그 뒤로 어쩐지 어색한 침묵이 오갔다.
미렌은 잠시 고민했다. 나란히 앉은 둘 사이에 놓인 손이 이불 아래에서 자꾸만 스쳤기 때문이다.
‘이렇게, 손을 잡기도 하지.’
헤겔의 말이 문득 떠오른 것은 왜였을까.
주저하듯 손가락을 움찔대던 미렌이 갑작스레 라이언의 손등 위를 제 손으로 덮어 버렸다.
물론 그의 큼직한 손이 모두 가려질 리는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둘 다 순간 숨을 멈추었다.
라이언이 딱딱하게 굳어 가는 게 미렌에게도 느껴졌다.
“그, 라이언. 이건 그러니까.”
“…….”
“보통 연인 사이에는 손을 잡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잡아 보았는데…….
설마 헤겔이 잘못 가르쳐 준 것인가? 장난스러웠던 그의 태도를 기억하자면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그래, 너무 진도가 빠르잖은가.
아니면 조금 더 대화를 나누고 상대의 동의를 구하는 게 옳았던 걸지도 모른다.
그런데 라이언에게선 이상할 정도로 말이 없었다.
제 생각에 잠겨 미처 그를 살피지 못했던 그녀가 뒤늦게 라이언의 안색을 살폈다.
그렇게 고개를 든 순간이었다.
“미렌.”
아, 하는 순간 미렌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순식간에 침대 위에 쓰러진 미렌의 위로 라이언이 올라탔다.
색소가 빠져 버린 머리카락이 침대 위를 어지럽혔다.
라이언은 맞잡은 미렌의 손을 그녀의 머리 옆으로 놓았다.
그러고서 미처 잡지 않은 반대편 손도 슬며시 제 손을 끼워 넣어 깍지 끼듯 맞잡았다.
어느 순간 미렌은 양손을 라이언에게 잡힌 채 그의 아래에 깔려 있었다.
“왜…….”
“라이언?”
“왜 나를 괴롭혀.”
괴롭혀?
미렌은 자신이 했던 행동을 곰곰이 되짚어 봤지만 그의 손을 잡은 것밖에는 없었다.
혹시 손을 잡기 싫었던 건가. 아니면 손을 잡는 게 사실 누군가를 괴롭히는 행위였나?
그녀는 다시 잠이 들면 헤겔에게 따져야겠다고 결심했다.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던 라이언은 진실로 괴롭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미렌이 슬쩍 제 손을 빼내려 했다. 그가 괴롭다면 더는 손을 잡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라이언은 미렌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도리어 힘을 주어 붙잡았다.
“당신이 아프니까…… 참는 중이잖아.”
“예?”
“행여나 내가 손을 대었다가 이성을 잃어버릴까 봐. 짐승처럼 내가 나를 자제하지 못하고 당신보다 내 욕심을 우선할까 봐 꾹 눌러 참았어. 그게 자그마치 8년이야.”
그의 목소리가 꼭 으르렁거리듯 낮게 가라앉았다.
“감당할 수 없다면 건들지 마.”
“…….”
“미렌, 이런 내가…….”
내가 당신을 집어삼킬까 두려워.
라이언의 말끝이 희미하게 떨리었다.
그녀의 위에 올라탔음에도 라이언은 혹여나 미렌이 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까 싶어 무릎을 세운 채였다.
그가 무언가 참고 있음을 증명하듯 라이언의 목과 팔뚝에 굵은 핏줄이 곤두섰다.
그는 결국 더는 미렌의 얼굴을 보지 못하겠는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면서도 맞잡은 그녀의 손은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놓칠 수 없다는 듯 덜덜 떨며 꽉 잡을 뿐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건강했을 때 당신을 좋아할걸 그랬습니다.”
“……그런 말 마.”
“제가 조금 더 건강했다면, 콜록. 당신이 원하는 만큼 내 모든 걸 내어 줄 수 있었을 텐데.”
라이언은 더 대답하지 않고 조금 더 고개를 숙여 미렌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뼈가 불룩 튀어나온 쇄골 위로 입술이 닿았다.
그 입맞춤마저도 너무도 조심스러워서, 꼭 금방이라도 부서질 사람을 대하는 것 같았다.
입을 맞춘 라이언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이제는 조금 진정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에 미약한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내가 원하는 만큼?”
“예, 당신이 원하는 만큼…….”
“얼마나 되는 줄 알고.”
일어선 라이언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 모습이 꼭 처음 만났던 열몇 살의 라이언 같아서 미렌도 마주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내 욕심이 얼마나 되는 줄 알고 그런 말을 함부로 해.”
“제가 줄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주고 싶습니다.”
겨우 라이언에게서 한 손이 풀려난 미렌이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길을 받으며 목 안으로 웃던 라이언이 이내 옆으로 푹, 쓰러졌다.
라이언과 미렌은 한 손을 맞잡은 채 나란히 침대에 누웠다.
“쉽게도 말하는군.”
“쉽지 않습니다. 조금도요.”
“나는, 미렌. 당신을 살릴 수만 있다면 황위를 포기해도 좋아.”
“라이언!”
“하지만 우습지. 당신을 살리기 위해서 나는 황제로 남아야 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신관을 데려오고, 전설로만 남은 약을 찾으려면.”
라이언과 미렌의 위로 높은 천장이 있었다.
둘은 가만히 누워 그곳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지난 8년간, 서로의 속에만 담아 두었던 이야기들이었다.
미렌은 라이언과 대화를 나누며 사실 몇 번이고 고민했다.
그에게 자신의 다른 생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할지.
그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이 결혼이 그저 정략결혼이라고만 생각했기에 조금도 말할 생각이 없었다.
고민하는 사이 라이언이 문득 제 팔을 베고 그녀를 향해 돌아누웠다.
“미안해, 미렌. 내가 잠시 흥분했어. 요즘 전쟁이다, 뭐다 해서 일이 많았더니.”
“남쪽 경계선에서요?”
“그래. 선대 황제께서 살아 계셨을 때 영지를 빼앗긴 테룬 공국이 나를 만만하게 보는 건지, 이를 악물고 있거든.”
“테룬 공국이 빼앗긴 영지라면, 프레니티 영지를 말하시는 겁니까?”
미렌의 얼굴이 순간 얼어붙었다.
프레니티 영지는 그녀의 또 다른 가족들이 사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 걸 제게 말씀해 주셔도 되는 겁니까?”
“못 할 건 없지.”
그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이럴 때면 그가 황제라는 게 표가 났다. 자신감이 가득 찬 라이언의 모습은 누구보다도 빛이 났다.
다만, 그는 프레니티 영지민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조금씩 얼굴을 찌푸렸다.
“프레니티 영지가 워로덴 제국에 속한 지는 벌써 수십 년이 지났지만……. 테룬 공국은 아마도 영지의 반환을 원하는 모양이야.”
하아. 그는 최근 들어 프레니티 영지로 고민이 많았는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으로는 프레니티 영지민 중 하나이기도 한 미렌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영지민들을 넘겨줄 생각도 하고 있어.”
“넘겨준다고요?”
“알아. 이제 막 제국민으로 적응하고 있는 이들에겐 충격이겠지. 하지만 선대 황제가 무리한 전쟁으로 강제 귀속시킨 영지이니, 그들은 애초에 테룬 공국 사람들이야. 아마 테룬 공국도 일단은 제 영지민들이 명분일 테고.”
라이언의 말은 옳았다.
그녀의 부모님들은 모두 테룬 공국 출신이었다가, 겨우 워로덴 제국의 시민이 되신 분들이었다.
물론 미렌은 프레니티 영지가 귀속된 후에 태어난 터라 애초부터 워로덴 제국민이었다.
“돌아가고 싶다면 허락해야겠지. 의견도 계속 올라오고 있어. 영지는 귀속하되 사람들은 보내는 쪽으로. 마을 측에선 모두 의견을 모았다더군.”
미렌으로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녀가 사는 집이 워낙 마을과 떨어진 곳에 위치한 탓도 있었다.
자주 마을에 내려가는 부모님은 어쩌면 알고 계실지도 몰랐다.
“당신도 제국민이니 알고 있을 거야. 워로덴 제국 사람들이 테룬 공국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워로덴 제국과 테룬 공국은 오랫동안 갈등을 빚었다.
워로덴 제국이 마지막 전쟁에서 승리해 테룬 왕국에서 공국으로 그 지위가 격하되긴 했지만, 그래도 테룬 공국 사람들은 자신들이 왕국이던 시절을 잊지 못했다.
그 때문에 맞닿은 경계령 지점에서는 잦은 약탈이 일어났다.
애초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 국민들 간의 불화는 이제 걷잡을 수 없이 커진 터였다.
이야기를 듣던 미렌이 천장을 바라보며 나직이 물었다.
“폐하……께서는요. 폐하께서는 테룬 공국이 어떻습니까?”
“황제인 내가 사적인 감정으로 국정을 논할 수는 없지. ……그래도 라이언 토르 워로덴이라는 사람의 개인적인 감정을 묻는다면, 글쎄.”
라이언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내 국민을 죽인 이들을 용서할 수는 없어.”
그 뒤로 잠시간 대화가 끊어졌다.
라이언도, 미렌도 무언가 생각하는 듯 고민에 잠긴 탓이었다.
조심스럽게 자신의 다른 생에 관해 이야기하려던 미렌은 그 마음을 접었다.
애초부터 좋지 않은 생각이었다.
라이언을 차치하고서라도 다른 모든 이들은 어서 그녀가 죽기를 바랐다.
미렌이 오래 살수록 라이언의 정치적 입장은 점점 나빠질 게 분명했다.
그러니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 건, 무척이나 이기적인 일이었다.
또한 그가 제 말을 믿어 줄지도 미지수였다.
미렌은 목 끝까지 올라왔던 자신의 이야기를 도로 삼켜 냈다.
“미렌, 손을 잡는 건 누구한테 배운 건가. 마리아?”
“……예, 마리아가 그랬습니다.”
“상을 내려야겠군. 수도에 집을 사 주면 적당할까.”
“마리아의 성격상 부담스러워할지도 모릅니다. 폐하를 두려워하기도 해서요.”
자신을 두려워한다는 말에 라이언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저를 가리키며 물었다.
“나를?”
“예. 마리아에겐 너무 먼 분이 아닙니까.”
“……하긴, 신하들 사이에서도 내가 무섭다는 소문이 돌더군. 미렌, 정말인가? 내가 그리도 두려운 황제야?”
라이언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가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미렌이 픽 웃었다.
그녀는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몸을 돌려 라이언을 제 품 안으로 이끌었다.
팔을 두른 미렌이 천천히 그의 등을 토닥였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손길만으로도 그녀의 마음은 충분히 전해져 왔다.
라이언은 미렌에게 안긴 채 그 손길을 만끽하듯 배부른 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이 꼭 사냥을 마친 맹수 같았다.
그럼에도 라이언은 그녀의 품에 숨어 나약한 초식 동물처럼 몸을 웅크렸다.
적어도 미렌의 앞에서는, 라이언은 나약한 초식 동물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