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은 복숭아
“오늘은 더 오래 자는군.”
라이언은 미처 예복도 벗지 못한 채 미렌의 옆에 반쯤 누워 있었다.
잠든 미렌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잠든 그녀를 보고 있자면 아직까지도 심장이 한가득 뛰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병색이 짙었던 미렌의 얼굴만 보고 있는 게 벌써 15년째였음에도 그러했다.
물론 미렌은 제가 고작해야 8년쯤 봤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가 미렌을 처음 봤던 건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라이언이 고작 여덟 살이 되었을 때였다.
‘전하. 전하, 어디 계십니까?’
황성에서 수업을 듣기보다 뛰어노는 걸 더 좋아했던 라이언은 그날도 멋대로 수업을 빼먹고 도망쳤다.
자신의 보좌관이 잠깐 눈을 뗀 사이 황궁을 빠져나가 어느 이름 모를 공작가로 숨어든 터였다.
물론 그때에는 공작가인 줄도 알지 못했다.
공작가라기에는 너무나도 경비가 허술했던 탓이다.
라이언은 이후 조금 크고 나서야 그곳이 에드가 공작가의 별관이라는 것을 알았다.
숨어든 라이언은 예복은 입고 있었지만 개구멍 사이를 지나다닌 탓에 옷과 머리가 엉망진창이었다.
혹시 보좌관이 자신을 쫓아왔을까 싶어 숨을 죽였던 라이언은 조금만 더 이곳에서 몸을 숨겼다가 거리로 놀러 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라이언은 그녀를 만났다.
푹.
푹.
푸욱.
‘모종삽?’
‘거기 누구 있어요?’
나무 뒤에 숨어 있던 라이언의 몸이 움찔 떨렸다.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탓에 위치를 발각당했다.
라이언은 슬며시 고개를 내밀어 그녀를 확인했다.
‘누구세요?’
‘라, 라이언.’
‘라이언?’
어려 보이는 얼굴에 비해 길쭉한 여자아이가 정원 한가운데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고개를 든 여자아이와 눈이 마주친 라이언이 머쓱하게 제 뒷머리를 긁적이며 나왔다.
‘안녕, 라이언.’
……안녕, 이라고?
사실 라이언은 그때 처음 안녕이라는 말을 들었다.
일단 또래를 만날 기회도 적었고, 더군다나 만나더라도 그는 언제나 ‘전하’라는 위치 탓에 공손한 인사를 받는 게 전부였다.
그래서 처음 만난 이의 안녕이라는 인사는 라이언의 기억 깊숙이 박혔다.
그가 어색하게 마주 손을 흔들었다.
‘아, 안녕.’
‘…….’
‘뭐 해?’
‘농사.’
아이는 그 인사를 끝으로 라이언을 보지 않고 제가 하던 일에 집중했다.
아이로부터 관심을 잃어버린 라이언은 도리어 자신이 흥미가 생겨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 옆에 쪼그리고 앉자 여자아이는 힐끗, 시선만 주고는 다시 모종삽으로 퍽퍽 땅을 파냈다.
‘아빠가 그랬어. 땅을 파서 씨앗을 뿌리면 나무가 자란대.’
‘무슨…… 나무?’
‘복숭아나무. 나 복숭아 먹고 싶거든.’
쭈그린 아이의 옷이 대충 보기에도 저렴해 보이지는 않았기에 라이언은 그럼 아빠한테 사 달라고 하면 되잖아, 라고 생각했다.
물론 일찌감치 매너를 배운 그는 그 말을 조용히 속으로 삭였다.
‘근데 이거 자라려면 한참 걸리겠지?’
‘음…… 나무니까. 한 계절은 지나야 하지 않을까.’
‘한 계절이나? 난 지금 먹고 싶은데.’
모종삽으로 땅을 파는 아이의 손목이 가녀리다 못해 부러질 것처럼 얇았다.
얼핏 보기에도 뼈만 남은 아이의 모습에 라이언은 순간 애처로워서 손을 뻗었다.
땅이 딱딱하니 여자아이의 힘으로는 파기가 힘들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어린 라이언의 힘으로도 역부족이었다.
자신 있게 모종삽을 빼앗아 갔던 라이언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자 옆에 있던 아이가 고개까지 젖혀 가며 웃었다.
‘아하하! 너 진짜 웃기네. 콜록, 콜록. 라이언? 라이언이라고 했지. 일어서 봐.’
‘……응.’
라이언과 미렌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서 서로를 마주 봤다.
그때의 라이언은 또래보다도 키가 작아서 어머니께서 걱정하실 정도였기에, 세 살 많은 미렌이 한참은 더 키가 클 수밖에 없었다.
일어서서 라이언의 정수리에 손을 올렸던 미렌은 그 손날을 제 쪽으로 가져왔다.
그러자 딱 미렌의 목 언저리에서 걸렸다.
둘의 키 차이는 한 뼘 정도로 제법 많이 났다.
미렌은 라이언을 내려다보며 활짝 웃었다.
‘라이언, 너 진짜 작구나.’
‘…….’
라이언이 멍하니 그 웃음을 바라봤다.
그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의 웃음보다도 아름다운 웃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았다.
그때부터였다. 라이언은 거리로 나가 노는 것은 모두 잊은 채 미렌의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물론 사람 한 명 없이 쓸쓸한 곳이라 아이들이 놀기엔 심심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그날 라이언은 시간이 조금만 천천히 가게 해 달라고 빌었다.
그러다 결국 헤어질 시간이 되자 보좌관이 떠오른 라이언은 미렌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 내일 또 와도 돼?’
‘미안, 그건 안 돼.’
‘왜? 왜?!’
미렌은 애매하게 웃으며 이유를 말해 주지 않았다.
결국 시간이 촉박해진 라이언은 더 캐묻지 못하고 자리를 떠나야 했다.
다음 날, 그는 결국 미렌의 말을 어기고 다시 에드가 공작가에 찾아가고야 말았다.
라이언의 품에는 보좌관을 졸라 얻어 낸 복숭아 한 바구니가 안겨 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공작가에 잠입한 라이언은 처음 미렌을 봤던 장소에서 애타게 그녀를 불렀다.
‘미렌, 미레엔.’
그러나 아무리 불러도 미렌은 보이지 않았다.
기다려도 오지 않자 라이언은 복숭아 한 바구니를 내려 둔 채 그곳을 떠나야 했다.
자신을 마중 나온 보좌관의 손을 잡은 채였다.
라이언은 공작가를 떠나며 몇 번이고 돌아봤다. 오늘이 안 되면 내일 오면 되지만, 어쩐지 아쉬웠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두 번 다시 기회가 없었지.”
그 뒤로 라이언은 뼈아픈 시간을 견뎌야만 했다.
그의 사랑하는 어머니는 암투로 인해 돌아가셨으며, 그는 살아남아 황위를 차지하기 위해 형제들을 죽여야 했다.
라이언의 행복했던 어린 시절 이야기의 끝은 미렌이었다.
그래서 라이언은 약혼식 날, 처음 그녀가 베일을 걷었을 때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그의 미렌은 여전히 아름다웠으며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살아남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완전히 달라져 버린 라이언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녀는 라이언의 기억 속 그대로였다. 달라진 것은 오직 비슷해진 눈높이뿐이었다.
미렌은 모르겠지만 그는 떨리는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그녀와 키스했다.
그게 라이언의 첫 키스라고는 아마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황후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지?”
옛 생각을 떠올리던 라이언이 커튼 너머에 서 있는 마리아에게 질문을 던지자 그녀가 조심스레 대답했다.
“……18시간입니다.”
“어제보다 4시간이 늘었군.”
라이언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이를 악물었다.
해가 바뀔수록 미렌이 잠들어 있는 시간이 늘어나고 있었다. 심지어 오늘은 평소보다 더 늘어 있었다.
이럴 때마다 그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그는 잠든 미렌을 보고 있자면 꼭 그녀가 자신을 두고 갈까 봐 두려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밤이 되면 언제나 잠든 미렌의 옆을 지켰지만 단 한 번도, 그는 잠들지 못했다.
라이언이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미렌.”
이름을 불러도 미렌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 같기도 했다.
결국 손을 든 라이언이 조심스럽게 미렌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럼에도 미렌은 일어나지 않았다.
“미렌?”
반쯤 몸을 일으킨 라이언이 그녀를 내려다봤다.
이상했다.
분명 미렌은 라이언이 깨우면 적어도 몇 분 내로 깨어났다.
그런데 오늘따라 미렌은 꼭 죽은 사람처럼 라이언이 흔들면 흔드는 대로 움직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라이언의 두 눈동자에 공포가 서렸다.
벌벌 떨리는 손을 주먹 쥔 라이언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심장 위로 제 귀를 가져갔다.
쿵.
쿵.
쿵.
미렌의 심장이 아주 약한 박동으로 뛰고 있었다.
그것을 듣고서야 라이언의 손 떨림이 다소 잦아들었다.
“미렌, 일어나 줘.”
“…….”
“미렌!”
라이언이 몇 번이고 미렌의 어깨를 흔들었다.
목소리가 커지자 커튼 너머에 서 있던 마리아가 놀라 달려왔다.
마리아가 침대 발치에 왔을 때에는 이미 라이언이 미친 사람처럼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쥔 채 흔들고 있었다.
그런데도 미렌은 일어나지 않았다.
숨만 쉬는 인형 같았다.
그런 미렌의 어깨를 잡고 있던 라이언이 천천히 뒤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순간, 마리아는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미렌, 죽지 마. 미렌, 제발.”
그의 눈이 새카맣게 죽어 있었다.
미렌의 앞에 서면 한없이 쑥스러워하던 라이언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미렌을 껴안은 채 떨리는 손을 멈추지 못하고 그녀를 흔들었다.
그 손길은 점점 격해져 병자를 대하는 것 같지 않았다.
저렇게 두었다간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진 미렌의 몸이 어딘가 상할지도 몰랐다.
마리아는 두려움을 접고서 그를 말리기 위해 한 걸음 다가갔다.
그러자 라이언이 읊조렸다.
“가까이 오지 마라.”
“……폐, 폐하. 전하께서는 몸이 약하십니다. 그러니, 제발…….”
“마리아라고 했나?”
미렌을 안아 든 라이언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그가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마리아를 돌아봤다.
“목을 잘라 줄까?”
“…….”
“아니면, 네 다리를 잘라 줄까.”
그는 무성의한 태도로 마리아의 목숨을 논했다.
제 품에 안긴 미렌의 등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태도로, 느릿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
“미렌이 네가 좋다 하더냐?”
“……아, 아닙…….”
“널 좋아하지 않으면 어째서 내가 너를 살려 둬야 할까.”
“…….”
미렌이 그의 품에 안겨 있지 않았다면, 라이언은 이미 언제나 가지고 다니는 검으로 마리아의 목을 쳤을지도 모른다.
그 살기에 마리아는 숨조차 쉬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그 순간 정적이 깨지듯 실낱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 이언.”
“미렌?”
라이언의 두 눈이 커졌다.
미렌이 제 품에서 눈을 뜬 것을 확인한 라이언이 활짝 웃었다.
그는 그대로 그녀의 목덜미에 제 코를 박고 애교라도 부리듯 강아지처럼 굴었다.
아직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한 미렌은 잠시 천장을 바라보다 제 목덜미를 간질이는 존재를 깨닫고서 손을 들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라이언의 뒷머리를 쓸어내렸다.
“미렌.”
“라이언, 제가 너무 늦었습니다.”
“응……. 오늘은 너무 늦게 일어났어.”
조금만 더 늦었으면, 당신이 싫어할 짓을 할 뻔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