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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7)화 (7/133)

이런 건

“너 말이야, 왜 그렇게 잠에 집착해? 꿈에서 바람이라도 피우냐?”

토끼풀을 만지던 미렌의 손이 순간 움찔거렸다.

그녀는 속으로 바람이 아니라 본처를 만나러 가는 거라며 반박했지만, 그걸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대신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제가 연애를 해 봤어야 바람이겠죠.”

“뭐야! 너 연애도 안 해 봤어?!”

아주 조그맣게 중얼거렸던 미렌의 말을 용케도 들은 헤겔이 단숨에 그녀의 뒤까지 다가왔다.

미렌은 어서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 숲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자리를 뜨기 바쁜 미렌을 두고 헤겔이 말끝을 올리며 놀려 댔다.

“스물다섯이 되도록 연애도 안 해 보고 뭐 했냐?”

“……저도 해 봤는데요.”

“누구랑? 응? 대체 누구랑? 너희 어머니가 너 남자 친구 한번 데려온 적 없다던데?”

“대체 저희 어머니랑은 언제 그렇게 대화한 겁니까?”

미렌이 머리가 아픈 듯 제 이마를 붙잡았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연애도 안 해 봤냐며 놀렸던 주제에 이제 와서 어머니에게 다 들었다고 말하는 걸 보면, 자신이 헤겔의 말장난에 넘어간 게 분명했다.

헤겔은 이미 놀림감을 포착해 히죽거리며 웃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연애는 누구랑 하셨을까, 꿈에서 했나?”

“…….”

그 농담 같은 질문에 순간 미렌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라이언이 떠오른 건 왜였을까.

그녀는 숲속의 밤이 빨리 찾아와 얼굴빛이 보이지 않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풀벌레 소리가 숲속을 가득 울리고 있었다.

말없이 걸어가던 미렌은 제 곁에 있는 헤겔을 힐끗 보며 넌지시 물었다.

“보통은 연애하면 뭘 하죠?”

“너 진짜 연애 한 번도 안 해 봤구나? 음…… 보통은 맛있는 걸 먹으러 가거나. 어, 야! 앞에 나무!”

은근히 헤겔의 말에 집중하고 있던 미렌이 순간 제 발 앞의 나무뿌리를 보지 못하고 걸려 넘어졌다.

그녀의 몸이 앞으로 넘어가는 순간 헤겔이 재빨리 그녀의 팔목을 붙잡았다.

겨우 헤겔의 도움으로 넘어지는 것을 면한 미렌이 서둘러 중심을 잡았다.

그사이 헤겔이 씩 웃으며 잡았던 미렌의 팔목에서 손을 움직였다.

어느 순간 헤겔은 미렌과 손을 맞잡고 있었다.

“이렇게, 손을 잡기도 하지.”

자세를 바로잡은 뒤 미렌이 제 손을 내려다봤다.

헤겔은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가만히 미렌을 응시하고 있었다.

순간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이윽고 팍 하며 미렌이 헤겔의 손을 밀쳐 냈다.

그러자 서로 간의 공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미렌은 자신이 순간적으로 너무 과하게 반응했나 싶어 사과하려 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먼저 움직인 것은 헤겔이었다.

헤겔은 거칠게 내쳐진 제 손을 도로 가져와 울상인 얼굴로 그것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불쌍한 내 손. 고운 것만 만져야 하는데.”

“아, 예. 제가 죄송하네요. 곱지 않은 걸 만지게 해서요.”

“거기다 그리 쳐 낼 건 또 뭐야? 어? 손에 금이라도 발랐나?”

결국 헤겔의 농담으로 분위기가 무마됐다.

미렌은 그의 유들유들한 반응에 저도 모르게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헤겔 씨 말대로 제가 남자 손을 처음 잡아서요.”

“처음이면 그럴 수 있지. 너, 남자 친구 손은 그렇게 치면 안 된다?”

“주의할게요.”

주의하겠다며 말하는 미렌의 목소리에 미약한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헤겔도 그녀의 웃음을 보고서 마주 웃었다.

둘은 제법 오랫동안 산속을 걸어갔다.

순식간에 차오른 달이 미렌의 머리 위를 비췄다.

그녀는 보름달의 위치를 보며 슬슬 시간이 자정이 되어 감을 깨닫고 헤겔에게 말했다.

헤겔은 왜인지 잠시 멈춰 서서 눈을 감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찾기가 힘들 것 같은데, 이만 내려갈까요?”

“잠깐.”

헤겔이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다 문득 눈을 뜨며 고개를 돌렸다.

“꽃이 피어났어.”

“지금요? 그게 느껴지십니까?”

“응, 마력이 강해졌으니까. 방향은 저쪽.”

미렌도 자연스레 헤겔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둘의 귓가에 조그만 물소리가 들려왔다.

헤겔이 가리키고 있는 방향은 분명 산에서 유일하게 물이 흐르는 곳이었다.

결국 미렌과 헤겔은 물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몇 발자국 가지 않아 조그만 계곡이 둘의 앞에 나타났다.

“여기 있어.”

“여기요? 대체 어디……. 꽃이랄 게 보이지가 않는데요?”

“알아. 그렇지만 분명히 있어.”

헤겔이 웬일로 진지한 얼굴을 한 채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미렌은 그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진짜 개 같네요.”

“……뭐?”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꼭 냄새를 맡고 뭔가를 찾는 강아지 같다고요.”

“내가? 이 헤겔 카르너가? 개 같다고?”

“강아지라니까요.”

개 같다는 말이 어쩐지 묘하게 들리자 미렌은 한 번 더 강아지라는 말을 강조했다.

둘은 차마 물속으로 들어가진 못하고 물가 주변을 돌아다니며 열심히 아르테미스를 찾았다.

그러나 한 시간이 지나도록 성과가 없었다.

헤겔은 분명히 이곳에 있다고 했지만 주변에는 이름 모를 잡초만 가득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미렌은 조금씩 초조해졌다.

어젯밤 라이언을 두고 잠든 게 마음에 걸린 탓에 일찍 잘 생각이었건만, 시간은 점점 촉박해지고 있었다.

이미 라이언이 업무를 마치고 돌아와 제 옆에 누워 있을 시간이었다.

“대체 왜 안 보이는 거야? 없나? 아닌데, 분명히 있는데…….”

“헤겔 씨, 오늘은 이만하고 돌아가는 게…… 어?”

헤겔에게 다가가 말을 하던 미렌이 문득 대화를 끊었다.

헤겔이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나 미렌은 별다른 말 없이 그저 그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헤겔도 그 시선을 눈치챘는지 뒤로 돌았다.

그의 뒤에는 그저 물이 흐르는 계곡이 있을 뿐이었다.

“아르테미스. 보름달이 뜨는 밤, 꽃을 피운다…….”

“그건 왜?”

“폈네요, 꽃.”

미렌이 제 짧은 손가락을 들어 계곡을 가리켰다.

그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물이 흐르고 있는 계곡 한가운데였다.

그 순간 헤겔의 두 눈이 커졌다.

계곡의 물 한가운데에 보름달이 있었다.

아니, 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을 흐르는 물이 담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보름달의 중심에 꽃 한 송이가 펴 있었다.

“보름달이 뜨면 꽃을 피우는 게 아니라, 보름달이 떠야만 꽃이 보이는 거였네요.”

물속에 자라난 꽃은 환하게 비추는 보름달이 아니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거기다 물속에서 피어난 탓에 낮에는 그저 지나치기 십상이었을 터다.

미렌이 허탈하게 웃었다.

“여기서 기다려요. 제가 꺾어 오겠습니다.”

“뭐? 너무 위험할 것 같…… 어이, 미렌!”

발목 쪽 옷을 걷어 올린 미렌이 재빠르게 물속으로 발을 담갔다.

밤이라 그런지 시릴 정도로 차가운 물이 발에 닿아 왔다.

이 계곡은 미렌이 어릴 적부터 심심하면 산을 타고 올라와 놀았던 곳이라 누구보다 익숙한 곳이기도 했다.

미렌은 어서 꽃을 꺾고 산을 내려가 라이언을 만날 생각에 초조해졌다.

이제 곧 손만 뻗으면 꽃이 닿을 것 같았다.

허리를 조금 숙인 미렌이 꽃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물속에 들어가면 빛이 굴절되는 탓인지 눈에 보이는 것보다 꽃이 멀었다.

아무리 손을 휘저어도 손끝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결국 그녀가 흐르는 물 중심에 피어난 꽃을 향해 한 발짝 더 내디딘 순간이었다.

“미렌!”

이상했다. 강 아래가 순간적으로 깊어지며 미렌의 몸이 휘청거렸다.

꼭 강 아래에 계단이 있는 것처럼 발이 푹 빠졌다.

그제야 미렌은 몇 주 전 큰 폭우가 내렸다는 걸 깨달았다.

망가진 밭을 살피느라 미처 계곡에 올라올 새가 없었다.

유난히 물살이 빠르다고 느껴졌다.

발이 빠지며 중심을 잃은 미렌이 순간 몸의 힘을 잃고 넘어지는 건 금방이었다.

그녀가 미처 일어서기도 전에 미렌의 몸이 물살에 휘말려 아래로 떠밀려 내려갔다.

“아……! 헉, 읍!”

미렌이 필사적으로 수영을 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지만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인 데다 다급한 탓인지 자세를 잡기가 어려웠다.

설상가상으로 물은 아래로 갈수록 빠르게 깊어져 이제는 미렌의 발도 닿지 않았다.

그때였다.

무언가 허리에 닿아 왔다.

미렌은 물에 젖어 잘 보이지 않는 시야 사이로 누군가 보인다는 것을 깨닫고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야, 토끼! 정신 차려! 가만히 있으라니까!”

“허, 읍, 헉!”

“나 수영 못 한다고!”

수영도 못 하는데 왜 들어오는 겁니까!

미렌은 물을 먹느라 그 말을 하지 못했다.

허리에 닿아 온 것은 헤겔의 팔이었다.

그는 미렌의 허리에 팔을 감은 채 눈을 질끈 감고 벌벌 떨고 있었다.

수영을 하지 못한다는 말은 사실인 것 같았다.

이대로 가다간 계곡 아래 호수까지 떠밀려 갈 터였다.

미렌이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수영을 하려 했을 때였다.

물속에서 손을 들어 올린 헤겔이 손가락을 부딪쳤다.

“떠올라라.”

나지막한 목소리에 미렌이 저도 모르게 눈을 떴다.

그러자 장엄한 광경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강 속에 있던 모든 물이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다.

그녀가 서 있던 곳은 어느새 물이 모두 빠져 돌이나 부러진 나무 따위가 바닥을 굴러다니는 채였다.

미렌이 멍하니 물이 떠오른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뭐 해? 안 나오냐?”

“예? 아…….”

물속에서 수영도 못 하는 주제에 미렌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있던 헤겔은 어느새 일어나 물 밖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하늘만 올려다보던 미렌도 결국 천천히 그를 따라 계곡 밖으로 걸어갔다.

둘 모두 밖에 나가자 헤겔이 젖은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자 하늘로 떠올랐던 물들이 모두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계곡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다.

“……미친.”

“뭐? 뭐?! 야, 토끼! 너 뭐라 했어! 욕했지?!”

“진짜 대마법사셨네요.”

“그럼 가짜냐…….”

그 놀람 섞인 한마디에 헤겔이 픽 웃었다.

미렌은 흐르는 강을 바라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수영은 못 하는 대마법사…….”

“이! 수영을 왜 할 줄 알아야 하는데?! 위험하면 물을 들어 올리면 되지!”

“물보다 우리 둘만 올리는 게 쉬웠을 텐데.”

“난 쉬운 것보다 어려운 걸 더 잘해.”

헤겔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대답을 들은 미렌이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하…… 콜록. 헤겔 씨, 너무 춥지 않나요.”

“추워? 마법으로 불이라도 지펴……. 야. 야?”

왜인지 멍해진 미렌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꼭 당장이라도 잠이 들 것처럼 꾸벅거리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던 헤겔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갔다.

미렌의 다리가 잠깐이나마 휘청거렸다.

“헤겔 씨, 저요.”

“응.”

“조금만 자겠습니다…….”

“뭐?!”

그 말을 하자마자 미렌의 몸이 아래로 쓰러졌다.

자칫하면 자갈이 깔린 바닥에 머리를 박을 것 같자 성큼 달려간 헤겔이 그녀의 몸을 받아 들었다.

물속에서와 마찬가지로 허리를 감싸 안은 채 그는 미렌을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문득 헤겔의 눈에 그녀의 조그만 손 사이로 무언가 쥐어져 있는 게 보였다.

헤겔이 손을 뻗어 미렌의 손을 펼치자, 툭. 무언가 떨어져 나왔다.

아르테미스였다.

“……그 와중에.”

꽃은 물살에 휘말려 꽃잎이 몇 개 떨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온전한 편이었다.

그것을 보며 고개를 내저은 헤겔이 제 품에 안긴 미렌의 얼굴을 깊게 들여다봤다.

“야.”

어두운 밤 사이로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는 미렌을 내려다보며 희미하게 웃다 그녀를 들어 올렸다.

그녀를 품에 안은 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런 건 연애하면 하는 건데.”

넌 그것도 모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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