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밤
미렌은 바쁜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갔다.
저 멀리 비 오는 정원을 홀로 걷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비가 오고 있었나.
바닥에 튄 빗물이 종아리까지 닿았다.
창을 닫은 채 방에서 누워 지내는 이에겐 내리는 비조차도 어색했다.
감기에 걸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미렌은 그 모든 이유를 차치하고 그를 향해 달려갔다.
몇 걸음을 떼지도 않았는데 숨이 차올랐다.
차박, 차박.
문득 앞서가던 라이언이 고개를 돌렸다.
뒤에서 자신을 따라오는 기색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라이언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미렌! 이렇게 비가 내리는데 무슨……!”
막아 주는 천장이 없어 서로의 머리가 빠르게 젖어 갔다.
놀란 라이언이 제 큰 손으로 그녀의 우산을 자처했다.
그는 자신이 화를 내고 나갔다는 사실도 잊었는지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
“날이 추워. 오늘은 이만 들어가. 다음에…… 응? 이러다 또 쓰러지면 내가 무너질 거야.”
정작 젖은 건 라이언이었다.
이제 막 침실에서 나와 그에게 달려온 미렌과 달리 라이언은 이미 한참 동안 비 오는 정원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젖은 제 몸보다도 더 안달을 냈다.
그의 두꺼운 예복이 비를 먹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미렌의 마음도 물을 먹은 것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는 이곳에서 이토록 처량하게 비를 맞고 있을 남자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미렌, 왜 그래. 우는 건가?”
“…….”
“미렌, 울지 마. 당신이 울면…….”
다가오던 라이언은 차마 몸이 젖은 채로 미렌을 안을 수 없던 건지 손만 뻗었다가 도로 거둬들였다.
미렌이 그대로 고개를 숙이자 라이언이 그나마 젖지 않은 손을 제 옷에 조금 닦고서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단 한 번도 욕심껏 그녀를 안으려 든 적이 없었다.
제 옷이 젖으면 그녀가 감기에 걸릴까 두려워 안지조차 못했다.
아픈 그녀에게는 고작 감기조차도 치명적인 병이었기에 무엇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미렌은 그게 못내 가슴 아팠다.
그럴 때마다 그에게 자신은 다른 인생이 있다고, 그러니 괜찮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정작 이 생의 주인인 자신은 어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죽을 생각밖에 하지 않았는데, 그 못난 인생을 사랑해 주는 라이언이 마음에 걸려 어서 죽지도 못했다.
“……라이언.”
“미렌? 이런, 미렌. 가까이 오지 마. 내가 지금은 젖어서…….”
“라이언.”
고개를 숙이고 있던 미렌이 손을 뻗어 그의 옷자락을 쥐었다.
차마 침대 위에선 잡지 못했던 것이었다.
먹먹히 젖어 든 옷을 쥔 미렌이 그대로 라이언을 올려다봤다.
그의 퍽 난처해하는 눈이 걱정스럽게 미렌을 살피고 있었다.
정작 젖은 건 자신이면서.
그녀는 그를 바라보다 한 걸음 성큼 다가섰다.
그 한 걸음조차 쉽지 않아 붙잡은 그의 옷에 기대야만 했다.
다가간 미렌이 라이언을 두 팔 가득 껴안았다.
“라이언.”
“……미렌, 당신이 먼저 안아 줘서 날아갈 듯 행복해. 그런데 이대로 있다가는 당신이…….”
“우리, 사랑할까요.”
다급하게 나오던 라이언의 말이 뚝 끊겼다.
미렌은 결국 라이언의 품에 제 고개를 묻었다.
차마 그의 두 눈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가 어떤 눈으로 자신을 볼지 두려웠다.
“제 인생은 이제 한 계절도 남지 않았을 겁니다.”
“왜 그런 소리를 해. 내가 살려 내. 당신이 죽어도 내가……!”
“라이언, 제 목숨은 제가 압니다. 이제는 일어날 때 숨조차 쉬기가 벅차요. 제 삶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라이언의 두 눈이 질끈 감겼다.
미렌이 그의 품속에서 가쁜 숨을 내쉬었다.
차마 그녀를 마주 안아 주지 못하고 있던 라이언이 결국 제 손을 들어 그녀의 등을 천천히 두드렸다.
숨을 쉬라고, 천천히, 그 얕은 숨을 이어 가라고.
“우리……. 그 한 계절 동안, 그렇게 사랑할까요.”
“……미렌.”
“제가 만약 일주일 뒤에 죽는다면, 이번 한 주만 사랑할까요.”
안 된다면 오늘 하루만이라도.
8년.
그의 마음을 모른 척 넘긴 게 어느새 8년이었다.
누군가는 그런 그녀를 두고 멍청하다며 욕할지도 모른다.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헛되이 흘려보냈다고.
그러나 미렌은 누구보다 자신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사랑하지 않겠다고 늘 다짐했지만,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를 사랑했기에 그간 끈질기게 라이언의 마음을 모른 척했다.
‘……폐하, 밤이 되었으니 이만 가셔도 괜찮습니다. 다른 이들도 모두 눈감아 줄 겁니다.’
‘이만 가라니? 내 신부를 두고 내가 어딜 갈까. 이거 면목 없군. 첫날밤부터 소박을 맞다니.’
신부의 베일이 벗겨진 순간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비웃었다.
비쩍 말라 광대가 튀어나온 데다 또 키는 얼마나 크던가.
어린 라이언의 키가 아주 작지는 않아 망정이지, 그녀는 결혼식 날 라이언과 키스하기 위해 제 허리를 숙여야 했다.
그런 그들을 두고 남들은 모두 어울리지 않는다며 웃었다.
황제인 라이언에게 미렌 에드가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손가락질했다.
그렇기에 미렌은 그날 밤, 제 방에 들어온 라이언을 이만 가 봐도 좋다며 밀어냈다.
‘미렌, 오늘은 복숭아나무에 꽃이 폈어. 당신만큼이나 예쁘더군.’
‘당신이 이 수프를 좋아한다던데. 마리아에게 도움을 받았지. 음, 치사한가?’
‘왜 창문을 열어 두었어? 감기에 걸려 고생한 게 일주일도 안 되었는데! 이럴 게 아니라 시종들을…….’
한 달을, 1년을, 그렇게 8년을 밀어냈다.
그럼에도 라이언은 끈질기게 그녀의 방을 찾았다.
해가 지날수록 눈을 뜬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시간은 짧아졌는데도 불구하고.
미렌은 점차 헷갈렸다.
처음에는 그를 믿지 못했고, 해가 바뀌었을 때에는 이유가 알고 싶었다.
그러나 라이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그녀를 기다렸다.
그때부터였던가. 라이언이 오는 시간에 맞춰 자신이 일어나기 시작했던 것이.
그를 사랑한다면 이대로 죽음을 받아들인 채 사랑한 적이 없던 것처럼 끝내는 게 맞았다.
그가 더는 미련을 갖지 못하도록.
‘미렌.’
‘……미렌.’
그런데 복숭아나무 앞에 서서 자신 때문에 젖은 그를 앞에 두고 결국 무너지고야 말았다.
그를 위해 쌓았던 단단한 벽이 손쉽게 허물어졌다.
도저히 그를 안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었다.
“라이언.”
그의 품에 안긴 미렌은 점차 눈이 감겼다.
미렌 에드가로서의 시간이 끝나 가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곧바로 잠들까 두려워 어서 말을 이었다.
“다음번에는……. 당신이 부디 황제가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생에서 말이야?”
“아니요. ……그저, 당신이 황제가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나도…… 황후가 아니고.”
미렌은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꼭 죽은 것처럼 숨을 작게 쉬는 통에 라이언은 빗소리 사이로 미렌의 숨소리를 귀 기울여 들어야 했다.
그는 그녀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서야 꽉 끌어안았다.
아주, 조심스럽게.
“이거면 됐어.”
“…….”
“미렌, 나는 이걸로 만족할게.”
***
“……야.”
“이언, 깨우지…….”
“야, 지금 안 일어나면 내가 너 들고 움직인다.”
그 순간 미렌의 눈이 확 뜨였다.
저도 모르게 침대에서 튕겨지듯 일어난 미렌이 옆을 돌아봤다.
그러자 자신의 좁은 침대 위 옆으로 누운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헤겔이 있었다.
옆을 보자 분명 헤겔이 어제 잠들었던 그렌의 침대는 텅 비어 있었다.
헤겔은 실실 웃으며 미렌과 바짝 붙어 있는 채였다.
처음으로 제 침대에서 누군가를 재워 본 미렌이 놀라 벽 쪽으로 물러섰다.
“당신이 왜 여기 있어요?!”
“나도 몰라. 일어나 보니까 여기던데.”
“그건 몽유병 아닙니까?”
“그런 거 없거든!”
헤겔이 벌컥 화를 냈다. 그러자 더욱 얼굴을 찌푸린 미렌이 말했다.
“그런데 왜 제 침대에서 잤냔 말입니다. 몽유병도 없는데.”
“내 마음이지. 됐고, 대체 라이언이 누구야?”
“예?”
대수롭지 않게 라이언의 이름을 꺼낸 헤겔이 제 귀를 새끼손가락으로 긁적였다.
순간 자신이 이름을 잘못 들었나 싶었던 미렌이 다시 물었다.
“누구요?”
“라이언 말이야, 라이언. 자는 내내 그 이름만 불러 대서 시끄러워서 깨웠잖아. 뭐……. 남자 친구? 정혼자?”
“아닙니다.”
미렌이 단호하게 끊어 냈다.
다행히 라이언의 이름이 아주 특이하진 않은 터라 바로 알아채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황제의 이름이었다.
미렌은 혹시 헤겔이 무언가 눈치라도 챌까 싶어 빠르게 말을 돌렸다.
“어서 일어나죠. 아르테미스를 찾아야 하니까.”
“말 돌린다? 남자 친구야? 솔직하게 말해, 비밀로 해 줄게.”
“비밀로 안 하셔도 되고, 남자 친구 아닙니다. 저 친구 없어요.”
미렌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재빨리 양말을 신고 있었다.
홀로 남은 헤겔이 제 뒷머리를 긁적이며 그녀를 따라 일어섰다.
대답이 단호해도 너무 단호해서 더 묻기가 뭐했다.
미렌의 가족들과 아침 식사를 마친 뒤 헤겔과 그녀는 바로 집을 나왔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곧장 산으로 올라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산속에 막 들어왔을 때였다.
“그런데 아르테미스라는 거, 이 산에 있는 게 확실합니까?”
“확실해. 마나를 품은 꽃이라 느껴지거든.”
“마나가 느껴진다고요?”
그 질문에 헤겔이 씩 웃었다.
웃음에서부터 느껴지는 ‘나 잘났어요.’라는 기운에 미렌은 못 볼 것을 봤다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물론 헤겔은 신경도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마법사면 모두 다 느끼지. 마나는 동물이든 식물이든 살아 있다면 가지고 있는 힘이니까. 물론 나는 남들보다 더 예민한 편이지만.”
“마나가 많으면 대마법사가 되는 겁니까?”
“설마. 그렇게 쉬웠으면 개나 소나 대마법사게?”
헤겔이 어깨를 으쓱였다.
질문을 던지고도 정작 관심이 없는 미렌은 이름 모를 나무 아래에 나 있는 약초를 캐냈다.
“마나는 기본이고, 머리. 머리가 똑똑해야지.”
“아아, 그래서 그쪽은 똑똑하시다?”
“어. 영재, 수재, 천재. 그건 다 날 위해 존재하는 단어거든.”
미렌이 슬며시 중얼거렸다.
“그런 사람이 왜 아르테미스가 있는 위치는 정확히 못 느끼시는 건지.”
“……그건 다른 이야기지. 내가 개도 아니고 어떻게 느껴지는 마나만으로 꽃을 찾아?”
그 뒤로 둘은 특별한 대화 없이 꽃 찾기에 돌입했다.
산은 어제와 다름없이 수풀이 우거져 있었다.
조그맣게 난 도랑과 계곡, 그리고 산속 곳곳을 돌아다녔지만 별다른 수확이 없었다.
결국 슬슬 지쳐 가던 헤겔이 먼저 미렌에게 물었다.
“……야, 토끼. 곧 해 지겠다.”
“어쩔 수 없네요. 내일 다시 찾아봅시다.”
“이렇게 해서 찾을 수 있는 건 맞아?”
“약초든 꽃이든, 찾기가 쉽나요.”
전문적인 약초꾼은 아니지만 그래도 근방에서 제법 유명한 미렌이었다.
그런데 헤겔이 자꾸만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자 짧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렇게 찾기가 쉬웠으면 전설의 꽃이라고 안 불렸겠죠.”
정답이었다.
헤겔도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는지 산 아래로 터덜터덜 내려가는 미렌을 잠자코 따라갔다.
그러다 문득 그가 자리에 멈춰 섰다.
따라오는 기척이 없자 미렌도 뒤를 돌아봤다.
헤겔이 가만히 그곳에 선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르테미스, 그거 밤에 피는 꽃이지?”
“정확히는 보름달이 뜨는 밤이요.”
“그럼, 밤에 찾아보자. 오늘 보름날이다?”
색다른 의견에 미렌이 멈칫했다.
“낮이라서 안 보이는 걸 수도 있는 것 아니야.”
“설마요.”
“왜? 아주 그럴듯한 가설인데. 곧 해가 질 거야. 밤까지 여기서 기다려 보자.”
미렌이 눈을 찌푸렸다.
사실 오늘은 헤겔을 다른 숙소에 보낸 뒤 일찍 잠들어 라이언을 볼 생각이었던 탓이다.
그녀가 고민하는 것 같자 헤겔이 말했다.
“밤이라 해도 곧이야. 달이 오늘이라고 늦게 뜨는 것도 아니고.”
“……그럼, 자정 전까지는 돌아가는 겁니다.”
“그래. 근데 왜? 꼭 일찍 가야 하나? 위험할 것도 없잖아, 이래 봬도 내가 마법사인데.”
몸을 돌려 다시 숲속으로 향하자 헤겔이 또 부담스러울 정도로 붙어 왔다.
미렌은 그런 헤겔을 슬쩍 제 손으로 밀며 제 갈 길만 걸어갔다.
둘밖에 없는 어두운 산속에서 미렌과 헤겔의 말소리가 도란도란 이어졌다.
누군가는 오래도록 기다릴, 기다란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