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그라져 가는 불씨
“절대, 자고 있는 저를 깨우지 마세요.”
“싫은데.”
잘 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누우려던 미렌은 도로 앉아 옆 침대에 이미 누운 헤겔을 바라봤다.
그의 기다란 다리가 좁은 침대를 벗어나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헤겔이 누운 침대는 사실 동생인 그렌이 크고 나면 사용하려고 넣어 둔 것인데, 그렌이 아직 부모님과 자고 싶어 하는 탓에 마땅한 주인이 없는 침대였다.
미렌의 집은 주방을 제외하고 방이 딱 두 개뿐이었다.
“싫다고요?”
“응, 하지 말라니까 하고 싶잖아.”
다리를 꼰 헤겔이 거만한 태도로 미렌을 바라봤다.
그러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히죽, 웃어 보였다.
결국 미렌은 더 당부하는 대신 침대에 누웠다.
그녀가 천장을 바라보고 곧은 자세로 눕자 그런 미렌을 가만히 응시하던 헤겔이 물었다.
“왜 깨우면 안 되는데?”
“잠잘 때 누가 깨우는 게 싫습니다.”
“그건 나도 싫긴 한데.”
그래도 그렇게까지 말하는 건 좀 이상하잖아.
헤겔이 홀로 중얼거리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미렌은 그 말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오늘 하루 종일 헤겔과 산을 돌아다니며 말싸움을 한 터라 이미 원래 자는 시간을 훨씬 지나 있었다.
몇 번이고 일찍 잠에 들려 했지만 헤겔이 있어서 그게 쉽지가 않았다.
벌써부터 자신을 깨우는 라이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라이언은 그녀가 새벽에 잠깐이라도 일어나지 않으면 무척이나 불안해했다.
“……몽이라도 꾸는……. 야.”
“…….”
“뭐야, 잠든 거야?”
몇 번이고 미렌을 불러도 들려오는 대답이 없자 헤겔이 지그시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말을 하는 도중에 잠들 정도라니, 오늘이 대단히 피곤했던 건가 싶었다.
고민하던 헤겔이 결국 손을 들었다.
그의 손에서 따뜻한 흰빛이 나오더니 미렌을 감쌌다.
고위 마법 중 하나인 힐링이었다.
그러다 문득 헤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이상하네.
***
“……찾을 수 없다고?”
어렴풋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미렌이 무거운 눈을 겨우 들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익숙한 제 침실의 천장이었다.
어제는 분명 마리아의 방에서 잠이 들었는데.
마리아가 시종을 시켜 옮겨 준 건가.
생각을 마친 미렌이 눈을 들어 목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봤다.
그곳엔 이미 그녀의 인기척을 눈치채고 다가온 라이언이 있었다.
“미렌, 깨어났어?”
“폐하, 그게 무슨 소립니까? 범인을 찾을 수 없다니요.”
라이언의 뒤에 서 있는 기사들을 발견한 미렌이 부러 그를 폐하라 불렀다.
라이언은 그것을 짚어 주는 대신 의문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날, 정원에 들어온 이가 너무도 많았다는군.”
“저희가 식사를 한 곳은 안쪽 정원이 아닙니까?”
“그래. 하지만 안쪽 정원은 기사단이 철저히 통제를 하고 있었어. 침입자가 들어왔다간 즉시 알았겠지.”
안쪽 정원은 황후의 침실과 가까운 곳이라 함부로 출입하는 게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날, 그들이 그곳에서 식사를 하는 건 대외비였다.
결국 그 말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겁니까?”
“예상하는 바로는 그래.”
“하지만 제 시녀들은 모두……!”
“알아. 그날 당신의 시녀들은 대부분 가문에서 데려온 이들이었지.”
매수를 당했을 리도 없었다.
그렇다고 호위를 서고 있던 기사들을 의심하기엔,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지켜보는 눈이었다.
생각에 잠겼던 미렌은 마침내 올라오는 기침을 참지 못하고 오랫동안 거센 기침을 뱉어 냈다.
그러느라 분주해진 것은 라이언이었다.
라이언은 숨도 제대로 쉬기 힘들어하는 미렌의 등을 두드려 주며 불안한 눈빛을 서슴없이 드러냈다.
그녀가 격한 기침을 할 때면 이따금씩 있는 일이었다.
“하아, 흐읍…….”
“미렌, 숨을 천천히 쉬어. 응? 고인 가래가 있으면 뱉어 내도 좋아.”
그가 어서 뱉으라는 듯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이 나라에서 가장 귀한 손에 침을 뱉으라고 종용하고 있는 것이다.
차마 그럴 수는 없어 참고 참던 미렌은 끝끝내 라이언의 소매에 기침을 했다.
그의 귀중한 옷에 핏방울이 점점이 튀었다.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그것을 내려다보던 라이언이 짓씹듯 말했다.
“제발 다른 곳에는 신경 쓰지 마.”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제 주변에서 일어난 일인걸요.”
“내게는 당신의 건강이 무엇보다 중요해. 그걸 아직도 모르겠어?”
침대에 앉은 미렌의 눈에도 라이언의 손이 하얗게 질리도록 주먹을 쥐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마리아의 걱정만 들어? 어째서 내 생각은 하지 않아. 대체 왜.”
그는 두꺼운 목에 핏대가 서도록 화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그것이 그가 미렌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원망이었다.
그녀가 범인에 집중하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라이언은 암살의 목적이 미렌이라고 말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럴 수가 없었다.
대체 누가 이미 죽어 가는 이를 죽이려 무리를 감수한단 말인가?
그러니 표적은 당연히 황제인 라이언이었다. 아마 그도 그래서 놀라지 않았으리라.
미렌은 라이언의 얼굴을 씁쓸하게 바라봤다.
“라이언.”
“…….”
“어제 아침 식사에 오셨습니까?”
그런데 이 남자는.
어째서 꺼져 가는 불씨 따위를 제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기고 있단 말인가…….
“아니.”
조그맣게 대답한 라이언이 고개를 내저었다.
“일이 바빠 가지 못했어.”
그가 침대 옆에 구비된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미렌을 바라보며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다행입니다. 제가 어제 그만 늦게 잠이 들어 버려서요.”
“괜찮아. 아침 식사는 다음에 함께하면 되니까.”
겨우 그와 눈높이가 비슷해지자 미렌이 손을 뻗어 라이언의 옷소매를 당겼다.
피가 튀어 금수가 놓인 옷이 망가져 있었다.
고개를 든 미렌이 뒤에 시립해 있던 시종에게 명했다.
“폐하의 새 옷을 가져오거라.”
“예, 전하.”
미렌은 그의 옷소매와 더불어 팔목 부근에 한 방울 튄 피를 엄지로 둥글게 문질렀다.
씁쓸한 속내를 감추고서 그 피가 어서 지워지기를 바랐다.
“……미렌?”
“귀한 손이잖습니까.”
핏자국이 지워진 뒤에도 미렌은 오래도록 그의 손을 매만졌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미렌은 숙였던 고개를 들어 라이언을 올려다봤다.
옆으로 고개를 돌린 라이언의 온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라이언, 얼굴이 달아오르셨습니다.”
“……추워서 그런 거라고 생각해 주어. 미렌, 당신이 가끔 그럴 때마다 내 심장이 울렁여서 멀미가 난다고.”
아직 더위가 미처 가시지 않은 날씨에 추위를 이야기하는 그는 꼭 사춘기 아이처럼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짧게 웃은 미렌이 잡았던 그의 손을 놓았다.
그러자 제 손을 한 번 쥐었다 펴던 라이언이 그녀에게 문득 물었다.
“미렌.”
“예?”
“침대 위에 올라가도 될까.”
침대 위에서 함께 동침을 한 게 처음은 아니었다.
그들이 8년이나 된 부부라는 사실을 안다면 당연한 사실이었다.
다만, 라이언이 온 얼굴을 붉히며 말하는 통에 어쩐지 평소와 다른 의미로 들려왔다.
“그럼요. 날이 춥잖습니까.”
미약한 웃음을 담아 말하자 라이언도 슬쩍 고개를 끄덕여 거기에 수긍해 버렸다.
추위. 둘은 꼭 그것 때문인 것처럼 허락을 구하고 옆자리를 내주었다.
라이언이 침대 위에 올라가자 그의 무게로 인해 침대가 크게 출렁였다.
“이불도 덮으시고요.”
“……응.”
두 명이 나란히 앉아 이불을 덮자 그 커다랗고 너른 침대가 좁게 느껴질 정도였다.
라이언은 손짓 한 번으로 시종들과 기사들을 바깥으로 내보냈다.
온전히 둘만 남자 고요한 침묵이 방 안을 채웠다.
“라이언의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게 아닙니다.”
“내 생각을 했다면 당신은 그렇게 말할 수 없어. 미렌, 당신의 기침 한 번에 내 심장이 아파. 알고 있었잖아.”
심심한 사과였다. 라이언도 그를 알기에 어리광을 부리듯 가볍게 대답했다.
“그러니 위로의 의미로 손을 잡게 해 줘.”
“손이요?”
“이럴 때가 아니면 잡을 수 없는 손이잖아.”
이불 아래에 숨겨져 있던 그의 커다란 손이 슬금슬금 미렌의 손등을 덮었다.
그 모습이 곰 같은 덩치답지 않게 귀엽게 느껴져서, 그녀는 살풋 웃었다.
“왜 웃는 건가?”
“손 한번 제대로 잡아 보지 못하신 분 같습니다.”
“제대로 봤는데.”
“정말입니까?”
어깨를 으쓱한 라이언은 진실을 말해 주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덧붙였다.
“앞으로도 당신의 손이 아니면 잡을 일은 없을 거야.”
“그러시면 안 됩니다.”
“왜?”
결혼한 뒤 소원해진 부부들 사이로 정부가 생기는 것이 당연해진 세상이었다.
더군다나 라이언은 미렌이 죽으면 새 황후를 맞아야 할 황제였다.
미렌은 당연한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라이언의 음색이 낮게 변했다.
“왜 안 된다는 건가.”
“라이언, 그러니까…… 그건.”
“당신의 다음 황후에게나 하라고?”
그때였다. 조심스럽기 짝이 없던 라이언의 손길이 거세게 변했다.
그는 그녀의 손을 붙잡아 당겨 제 품속으로 끌어안았다.
미렌의 귓바퀴에 짧은 입맞춤이 부딪쳐 왔다.
그러나 다정하다기보다는, 어딘가 절박하다는 게 어울리는 입맞춤이었다.
“미렌, 이건 모두 당신에게만 할 수 있어.”
속삭이는 목소리였다. 이윽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 침대를 벗어났다.
뒤돌아선 라이언으로부터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대의 다음 황후는 없어.”
“라…….”
미렌이 서둘러 화난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병약한 몸은 옷소매조차 잡을 수 없었다.
결국 홀로 남게 된 미렌이 애꿎은 시트 자락만 꾹 움켜쥘 때였다.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혹여나 라이언이 돌아온 것인가 싶었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그곳엔 수척해진 마리아가 서 있었다.
“마리아, 몸은? 괜찮은가?”
“예, 전하. 처치가 좋아 무사히 열도 내렸습니다.”
“그래도 쉬어야지. 뭐가 좋다고 이리 급하게 나온 거야.”
“폐하께서 전하의 곁에서 쉬라 명하셨습니다. 외로우실 거라고요.”
또다. 그토록 화난 얼굴로 나갔음에도 라이언은 그저 미렌의 생각을 하기 바빴다.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던 미렌이 문득 마리아에게 질문을 던졌다.
“마리아, 어제, 내가 언제 내 침실로 돌아갔지?”
“모르셨습니까? 폐하께서 전하를 직접 안고 모셔 가셨습니다.”
“시간이, 그럼…….”
“아침 식사가 준비될 무렵이었습니다.”
쿵. 심장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아니.’
‘일이 바빠 가지 못했어.’
그는 그때, 어떤 얼굴로 웃었더라.
이상했다. 미렌은 도무지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 이해하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몰랐다.
미렌이 침대에서 일어나 밖으로 달려 나간 건 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