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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4)화 (4/133)

내 무덤은 내가 판다

끔뻑, 끔뻑.

미렌은 부은 눈을 겨우겨우 움직였다.

아무래도 잠을 너무 많이 잤는지 눈이 심각하게 부어 있었다.

오늘도 아침 식사는 같이 못 했네.

아침 식사까지 버티려 했건만 저쪽 몸으로 너무 오래 깨어 있던 탓인지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아쉬운 마음을 감춘 그녀가 제 눈을 비볐다.

가볍게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서려는데, 문득 아래에서 평소와 달리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얌전한 제 동생이 사고를 쳤을 리도 없는데.

“보상? 우린 그런 거 몰라요!”

“아니요, 어머님. 그러니까 제 말은…….”

“여보! 여기 사기꾼이 왔나 봐!”

미렌은 계단을 두 개씩 뛰어넘으며 아래로 내려갔다.

아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분명 들어 본 적이 있는 탓이다.

예상대로 문 앞에서는 어제 본 마법사와 그녀의 어머니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미렌이 마침 나서려는 찰나, 저 안쪽에서 그녀의 아버지가 나오셨다.

미렌의 아버지는 동네에서도 거구로 유명하신 분이셨다.

거칠게 자란 수염과 투박한 손은 사실 농부가 아니라 용병에 더 가까워 보였다.

그런 이가 헤겔의 앞을 턱, 막아섰다.

“누군데 내 아내를 괴롭혀?”

“괴롭힌 게 아니고 저는, 제 말을 좀 들어 주시면…….”

“안 나가? 이래도 안 나가!”

자신을 떠미는 손길에 눈에 띄게 당황하던 헤겔이었다.

그러다 문득 그의 눈에 저 너머 계단에 서 있는 미렌이 보였다.

그녀는 쫓겨나는 헤겔의 모습에도 개의치 않고 자리를 뜨려 했다.

헤겔은 다급하게 외쳤다.

“미렌의 애인입니다!”

“……뭐?”

“미, 미렌? 우리 딸 미렌?”

망할. 될 대로 되라지.

헤겔은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 봤다.

어머니의 눈길은 순식간에 부드럽게 변했다. 25년간 남자라곤 한 번도 데려온 적이 없던 딸이니 당연했다.

그에 반해 곰 같은 아버지께서는 순식간에 울먹이기 시작했다.

“우리, 우리 미렌이 연애를 한다고……?”

“여보! 그만 좀 해요! 언제까지 우리 품에 끼고 살 거야?”

“평생! 흐윽, 평생 그러고 살 거야.”

이제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이 된 사태에 결국 미렌이 나섰다.

더 지켜봤다간 부모님께서 곧 결혼이라도 추진시킬 태세였다.

“저기요.”

“어, 왔어? 내 사랑.”

“진짜 죽일까…….”

“그러니까 알아서 나오지 그랬냐고. 나라고 해서 이렇게 만들고 싶었던 건 아니다?”

뻔뻔한 헤겔의 대답에 미렌이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그의 팔을 잡아당겨 일단 밖으로 나갔다.

물론 나가기 전 혼란한 제 부모님께 이런 말을 던졌다.

“어머니, 아버지. 저 이 사람이랑 헤어지고 오겠습니다.”

“뭐?”

“뭐?!”

콰앙!

거칠게 문이 닫혔다.

미렌은 멀리 가지 않고 집 마당에서 헤겔을 마주했다.

이렇게 보니 그의 키가 무척이나 컸다.

거기다 가슴까지 내려오는 희고 긴 머리가 남자를 미장부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야, 토끼.”

“토끼요?”

“너 눈 붉잖아. 그래서 토끼라고 불렀는데.”

“눈이 붉어서 다 토끼면 그쪽은 오징어라고 부르면 됩니까?”

“뭐, 오징어?”

“주머니귀오징어는 보라색이거든요.”

저를 오징어라고 부르는 말에 헤겔이 얼굴을 확 구겼다.

그는 한 글자, 한 글자 씹어뱉듯 제 이름을 말했다.

“헤겔 카르너. 아, 어디 가서 소문내고 다니지 마라?”

“헤겔 카르너?”

“그래, 뭐. 너도 들어 본 적은 있겠…….”

“누구세요?”

미렌이 눈을 깜빡거렸다. 유명한 사람인가?

안타깝게도 그녀는 귀족들의 이름을 다 알지 못했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아파 파티나 사교계에는 나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토록 외진 영지의 귀족이라면 더더욱 알 수가 없었다.

미렌의 반응에 헤겔은 허, 하고 웃었다.

그로서는 제법 큰 결심을 하고 말해 준 이름이었다.

“됐고, 어젠 왜 그냥 갔어?”

“그야 일이 바빠서요. 제가 기다려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까?”

“보상해 준다고 했잖아!”

“필요 없는데요.”

미렌의 간결한 대답에 헤겔이 슬며시 그녀의 집을 바라봤다.

오래된 주택은 태풍이라도 불었다간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그런데 돈이 필요 없다고?

“졸부야?”

“아니요, 그럴 리가요.”

“그런데 왜 보상을 마다해?”

“그렇게까지 주신다고 하면 받겠습니다.”

미렌이 공손하게 두 손을 내밀었다.

제집까지 찾아와서 돈을 주겠다는데, 말릴 필요야 없지.

이윽고 헤겔도 손바닥만 한 자루 하나를 꺼냈다.

그게 미렌의 손바닥에 닿기 직전일 때였다.

“……저기요?”

헤겔은 순순히 주는 대신 도로 자루를 제 쪽으로 당겨 왔다.

어이가 없어진 그녀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근데 이게 어제의 보상이라기엔 액수가 꽤 많아.”

“그럼 안 주셔도…….”

“그러니까 일 하나 같이하자.”

드디어 헤겔이 본색을 드러냈다.

미렌은 애초부터 이 남자가 그것을 위해 저를 찾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싫은데요.”

“그러지 말고. 네가 이 근방에서 유명한 약초꾼이라며.”

“그건 약초를 잘 찾아서 유명한 게 아니라, 그냥 계속 여기서 살았으니까 지리를 잘 아는 겁니다.”

“아무튼. 이 근처에선 네가 제일이라는 것 아니야.”

그게 그렇게 되나?

남자의 기묘한 논리에 미렌은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부정은 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손에 드디어 자루를 쥐여 주며 말했다.

“찾고 있는 게 있어. 그걸 찾아 주면 이 자루를 10개 주지.”

“열, 열 개요?”

떨떠름한 반응이었다. 자루를 열어 안을 확인하자 그곳엔 실버도 아니고 골드가 가득했다.

그런데 남자는 이것의 열 배를 외치고 있었다.

이쯤 되니 제 어머니가 의심한 대로 사기꾼인가 싶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남자의 입에서 나온 단어에 미렌은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아르테미스를 찾고 있어.”

아르테미스. 보름날에만 피는 전설의 꽃.

이야기만 들으면 보름이 되었을 때 찾으면 될 것 같지만, 그게 쉽지가 않았다.

이 정보조차도 약초꾼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도는 소문 정도라 확실한 정보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다만, 아르테미스가 만병의 치료 약이라는 사실은 약초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라면 누구나 알았다.

“……그걸 어떻게 찾습니까? 전설의 꽃이잖아요!”

“어떻게 찾긴. 아르테미스는 분명 이 근방에 있어.”

“뭘 믿고 확신하는 건데요?”

“그건 마력을 가진 꽃이거든. 그리고 내가 바로, 대마법사니까.”

헤겔이 씩 웃으며 자신을 가리켰다.

물론 반대로 미렌의 눈빛은 차게 식었다.

“뭐야. 왜 그렇게 보는데?”

“대마법사가 무슨 동네 건달도 아니고.”

그냥 마법사도 아니고 대마법사라는 말을 대체 어떻게 믿어야 할까.

마법사들 중에선 과시하기 위해 자신의 힘을 속이는 이들도 많았다.

“진짜야. 왜 못 믿어?”

“아, 예. 알겠습니다.”

“너 지금 못 믿는 눈치잖아!”

“믿는다니까요.”

손을 내저은 미렌은 잠시 집으로 들어가 자신의 밀짚모자를 챙겨 나왔다.

지금이야 시원하지만 곧 정오가 되면 날이 더워질 터였다.

그녀가 멀뚱히 선 헤겔에게 툭 말했다.

“골드는 확실히 지급하시는 겁니다.”

“어, 알겠어. 그런데 지금 움직이려고?”

“시간 아까우니까 미리 움직여야죠.”

“아르테미스는 보름달이 떠오른 날에만 피는데?”

“그렇다고 보름에만 찾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어깨를 으쓱인 미렌이 집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헤겔도 슬쩍 그녀의 뒤를 따랐다.

“따라오시게요?”

그 의아해하는 목소리에 헤겔은 멈칫하더니 도리어 얼굴을 구겼다.

“같이 가기 싫어?”

“네.”

“……그렇게 단호하게 대답할 건 또 뭐야.”

헤겔이 투덜거리는 사이 미렌은 이미 산을 향해 출발했다.

그녀의 단호한 거절에 잠시 망설이던 헤겔은 결국 미렌을 따라가고 말았다.

***

“허억, 헉…….”

거칠다 못해 급박해 보이는 숨소리가 산속을 울렸다.

물론 그 숨의 주인은 헤겔이었다.

“힘들면 내려가셔도 되는데.”

“안, 허억, 안 힘들어! 하나도!”

“아, 네. 그러시군요.”

힐끗 헤겔을 바라봤던 미렌은 미련한 그 모습에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게 따라오지 말라니까.

미렌의 집 바로 뒤에 있는 프레니티 산은 사실 초심자가 올라가기엔 제법 힘든 산이었다.

그녀야 어릴 적부터 이곳에서 뛰어놀았으니 이토록 편하게 들쑤시고 다니는 것이지만.

뒤처지는 헤겔 덕분에 걸음이 느려지자 미렌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몸은 마법으로 만들었나.”

“마법, 아니고! 운동으로 만들었다! 조금만 뛰어도 근육이 붙는데 어쩌라고!”

“들리셨어요?”

헤겔에게 들리지 않게끔 속삭인 것이 제법 컸던 모양이다.

그는 득달같이 달려와 화를 냈다.

결국 헤겔과 미렌은 반나절 동안 찾아다닌 것이 무색하게도 아무 수확이 없었다.

물론 전설의 꽃을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아는 프레니티 산은 꽃이 숨어 있을 만한 곳이 정말 없었다. 결국 탐색을 관둔 미렌이 뒤돌아섰다.

“슬슬 내려갈까요.”

“……드디어?”

“저녁 먹기 전에 돌아가야죠.”

“그래. 나도 배고프다. 빨리 가자, 어?”

오늘 아침, 제법 값비싸 보이는 행색으로 찾아왔던 헤겔은 하루 종일 산을 돌아다닌 덕분에 옷 상태가 엉망이었다.

미렌은 그런 헤겔을 물끄러미 보다 물었다.

“저녁 먹을 곳은 있고요?”

“아무 식당이나 가서 먹으면 되지.”

“오늘은 시장이 열리지 않는 날이라 식당은 이미 모두 닫았을걸요.”

“뭐?! 그런 게 어딨어!”

오랜만에 허기를 느꼈던 헤겔은 미렌의 말에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결국 미렌이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 집으로 갑시다. 식사는 내줄 수 있으니까.”

“……응.”

“그리고.”

한 걸음 떨어져 서 있던 미렌이 성큼 다가왔다.

그녀는 손을 뻗어 헤겔의 머리에 붙은 나뭇잎을 떼 주었다.

비록 발돋움을 해야 했지만 그 손길은 다정하기 짝이 없었다.

손이 많이 가는 헤겔이 미렌의 하나뿐인 동생처럼 보인 덕분이었다.

그러고서 말없이 앞서가는 미렌에 헤겔은 서둘러 그녀를 따라갔다.

그러는 동안 왜인지 심장이 간질거렸다.

누군가를 챙겨 준 적은 있어도, 챙김을 받은 적은 처음이기 때문일까.

“어머니, 아버지! 저 왔어요!”

“미렌, 헤어지고 온다지 않았니?”

“아, 그게요. 헤어졌는데 친구로 남기로 했어요.”

뻔뻔하게 거짓말한 미렌은 헤겔을 데리고 부엌으로 향했다.

4인 가구를 위한 조그만 식탁에 헤겔을 위한 간이 의자가 놓였다.

이미 허기를 느꼈던 헤겔은 눈치도 보지 않고 식사를 이어 갔다.

그러던 그가 먹던 수프를 뱉어 낸 것은 다음이었다.

“그래서 둘은 왜 헤어졌니?”

“이 사람이 남자를 좋아해서요.”

“뭐?!”

마지막 대답은 헤겔로부터 터져 나온 것이었다.

미렌은 그런 헤겔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손수건을 꺼내 손에 쥐여 줬다.

입가에 수프가 묻었기 때문이다.

“어머, 그렇구나.”

“세상엔 여러 사랑이 있는 법이지.”

부모님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미렌도 더는 그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마침내 식사가 끝나 갈 때였다.

미렌의 어머니가 문득 헤겔에게 물었다.

“밤도 늦었는데 자고 가는 게 어때요? 응?”

얼굴을 구긴 것은 미렌 쪽이었다.

이 좁은 집에서 헤겔이 잘 곳이라곤 부엌이 아니고서야 없었다. 그런데 만약 부엌이 아니라면…….

“그래도 될까요, 어머님?”

“어머, 그럼요. 미렌, 네 방에 그렌이 쓰던 침대가 남아 있었지? 거길 쓰면 되겠구나.”

“엄마, 이 사람은 남자잖아요!”

“사람을 차별하고 그러면 안 된단다.”

지금, 자신이 자는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라고?

“그래. 사람을 차별하고 그러면 안 되지.”

헤겔은 히죽 웃었다.

어머니는 이미 아버지와 그렌을 데리고 안방으로 들어가신 지 오래였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흘러가자 미렌은 비로소 깨달았다.

제 무덤을 제가 팠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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