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3)화 (3/133)

유성은 소원을 이뤄 주지 않는다

“미렌, 얼굴이 붉어.”

“……놀리지 마세요.”

평소라면 새하얗게 질려 있을 미렌의 얼굴이 뜨거운 광경으로 인해 다소 달아올라 있었다.

라이언은 그 모습만으로도 그녀에게 생기가 돋아나는 것 같아 즐거웠다.

바깥 정원은 무척이나 넓은 덕분에 귀족들의 밀회 장소로도 자주 사용되는 곳이었다.

다행히 식사 장소로 가기 전까지 은밀한 모습은 더 보이지 않았다.

식사가 한창일 때였다.

문득 머리 위에서 유성 하나가 바닥을 향해 뚝 떨어졌다.

“미렌, 소원은 빌었나?”

“아, 깜빡했습니다. 라이언은요?”

“건강해진 당신과 아침을 함께하게 해 달라고 빌었지.”

소화가 쉽지 않아 얼마 먹지 못하고 스푼을 내려 둔 미렌을 따라 그도 식사를 멈췄다.

힐끗 바라봤지만 라이언의 접시도 음식이 별로 줄어들지 않은 채였다.

“다음엔…… 아침을 함께해요.”

“나야 그러고 싶지만, 당신이 잠이 많아서 저녁에나 겨우 일어나잖아.”

라이언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녀가 잠이 많은 이유는 건강 때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짐짓 그것을 모른 척했다.

라이언은 언제나 그랬다. 그녀가 곧 죽는다는 것을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도 걱정은 마. 곧 당신도 건강해질 테니까.”

“라이언, 그건…….”

어렵다, 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문득 뒤에서 누군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미렌은 설마 또 다른 밀회인가 싶어 몸을 돌렸다.

소리가 난 곳이 무척이나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쓰러진 이는 미렌도 잘 아는 이였다.

“마리아!”

“미렌, 기다려. 그리 뛰었다간 넘어져 버려.”

미렌보다도 빠르게 라이언이 자리에서 일어나 마리아에게 다가갔다.

그는 미렌을 대신해 쓰러진 마리아를 확인했다.

“뱀에 물렸군.”

“뱀……이요?”

“독사인지는 확인을 해 봐야 알겠어. 의원을 불러라. 한시가 급해.”

“잠시만, 잠시만요. 폐하, 제가 직접 보겠습니다.”

지시를 내리는 라이언을 두고 미렌이 무릎을 굽혔다.

아래 시녀의 품에 안긴 마리아의 다리에는 그의 말대로 뱀에게 물린 자국이 있었다.

“전하, 죄송합니다…….”

“마리아, 괜찮으니 말을 멈추어. 독이 더 빠르게 퍼질 수도 있어.”

미렌은 침착하게 드러난 다리의 상처를 자세히 살폈다.

구멍이 두 개. 거기다 그 이빨 모양이 특이했다.

“이건 남부 지방에 사는 종이에요.”

“……미렌, 뱀의 종류를 알고 있어?”

“남쪽 데저트 산맥에 사는 살무삽니다. 이상한 건, 식성상 이런 정원에서는 살지 못해요.”

미렌이 테이블 위에 있던 물 잔을 가져와 먼저 환부를 씻었다. 가벼운 응급 처치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는 동안 라이언은 낯선 얼굴로 미렌을 살폈다.

뱀에 물린 이를 처치하는 그녀의 행동이 어쩐지, 너무도 능숙하게 느껴졌다.

뱀에 물려 본 적이 있는 걸까.

그사이 부르러 간 의원이 저 멀리서 달려왔다.

미렌의 주치의기도 한 노인이 마리아를 살피자 미렌도 그 옆에 앉아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남부 산맥에 사는 방울뱀 종류에 물린 것 같습니다. ‘바키아’나 ‘로튼’ 계열의 약초가 필요해요.”

“아, 그거라면 마침 제가 가지고 있는 게 있습니다. 그런데 먼저 자리를 옮겨야겠군요.”

고개를 끄덕인 미렌이 건장한 시종을 불러 마리아를 옮기라 명령했다.

결국 저녁 식사 시간은 그렇게 끝날 수밖에 없었다.

마리아를 두고 제 방으로 돌아온 미렌은 걱정으로 인해 한참을 서성였다.

“황실의 정원에서 뱀이라니요? 누군가 일부러 노린 것이 틀림없습니다.”

“진상은 내가 밝히도록 할게. 그러니 당신은 이만 쉬어. 너무 오랫동안 걸어 다녔잖아.”

라이언의 걱정에도 미렌은 그저 안쪽 볼만 잘근잘근 씹었다.

그녀가 제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챈 라이언이 성큼 다가왔다.

이윽고 그가 미렌을 품 안 가득 푹 끌어안았다.

얼떨결에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게 된 미렌이 품속에서 중얼거렸다.

“라이언?”

“놀란 내 마음도 알아줘. 무엇보다 당신을 노린 일이야. 만약 마리아가 아니라 몸이 좋지 않은 당신이 물렸다면…….”

미렌의 머리 위에서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미렌은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고서야 라이언의 심장이 저만큼이나 빠르게 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마리아가 괜찮아지거든 당장 알리라고 명할게. 그러니 제발.”

응? 라이언은 다정한 물음으로 그녀에게서 대답을 이끌어 냈다.

그리 가까운 곳에서, 그토록 다정한 물음을 하는 이에게 거절을 말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결국 라이언의 말대로 침대에 몸을 누이자 미렌은 비로소 피곤이 느껴졌다.

그의 말이 옳았다. 너무 오랫동안 밖을 돌아다녔던 것이다.

미렌의 목 아래까지 이불을 덮어 주던 라이언이 지나가듯 물었다.

“그런데 미렌.”

“예, 라이언.”

“뱀에게 물린 적이 있어?”

그 질문에 미렌은 잠시 움찔거렸다. 물론 물린 적은 없다.

그러니까, ‘미렌 에드가’로서는.

평민인 미렌 우드는 어렸을 때부터 산을 뛰어다니는 통에 뱀에게 물린 적도 제법 되었다. 약초를 익힌 것은 그래서기도 했다.

“……아니요.”

“그런데 어떻게 그리 약초를 잘 알아.”

의심하는 투는 아니었다. 라이언은 순진한 얼굴로 그저 궁금하다는 듯 물어 왔다.

속으로 심호흡을 한 미렌이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때, 시종 중 한 명이 물린 적이 있어서……. 잠시 관심이 생겼었습니다.”

“그런가. 잠시 관심을 가졌다기엔 지식이 대단해 보였는데.”

“약소한 편이죠.”

라이언은 더는 그에 대해 묻지 않았다.

“미렌, 내일은 아침 식사를 함께할까.”

“내일이요?”

“소원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어서.”

다행히 대화는 평범하게 흘러갔다.

라이언은 자신이 먼저 아침 식사를 권하는 게 쑥스러웠는지 멋쩍게 웃었다.

내일 아침?

아침에 저쪽에서 누군가 그녀를 깨우지만 않는다면 가능할 터였다.

미렌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라이언이 얼굴 가득 커다란 웃음을 지었다.

그가 행복에 겨워하는 게 제 눈에도 보여서 미렌은 순간 고개를 돌렸다.

이따금씩 부끄러웠다.

라이언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게 이토록 자세히 느껴질 때면.

“폐하, 잠시 나와 보셔야겠습니다. 정원에서 뱀을 찾아내었습니다.”

“곧 나가지.”

그 말에 미렌은 자신도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라이언이 그녀의 어깨를 꾹 눌렀다.

그의 손길은 무척이나 다정했지만 한편으로는 단호하기도 했다.

그녀가 더 무리를 해 열이 올랐다간 사달이 난다는 것을 알기에.

“늦더라도 꼭 돌아올게.”

“피곤하실 겁니다. 편안한 곳에서 쉬어요.”

“당신의 곁이 가장 편안해.”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라이언은 문득 허리를 굽혀 그녀의 어깨에 제 얼굴을 묻었다.

가까이 다가오는 얼굴에 입맞춤을 하는 줄 알고 순간 놀랐던 미렌이 잠시 행동을 멈추었다.

그사이 라이언은 다시금 허리를 펴고 뒤로 돌았다.

머뭇거리던 미렌이 문득 그의 옷소매를 잡아채었다.

“다녀오면 함께 아침을 들어요.”

미약한 힘에도 우뚝 멈춰 선 라이언은 미렌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이 답지 않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침도 정원에서 먹는 게 좋을까.”

“그랬다간 또 괜한 소문이 날 겁니다. 제 방에서 같이 먹어요.”

이윽고 라이언이 방을 떠났다.

혼자가 된 미렌은 그가 나간 방문을 바라보며 홀로 중얼거렸다.

“……이상한 사람.”

라이언은 이상했다.

둘은 정치적 이유를 바탕으로 만났다.

그러니 그저 외척을 막아 주기 위한 방패막이인 미렌에게 그가 정을 쏟을 이유는 무엇도 없을 텐데, 그는 약혼을 한 그날부터 매일같이 미렌의 방을 찾았다.

라이언의 방문이 처음에는 한 달이 채 가지 않을 거라 생각했고, 그다음엔 1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게 벌써 8년째였다.

미렌도 이제는 알고 있었다.

라이언은 어쩌면 진심으로 자신을 좋아해 주는 걸지도 모른다고.

아름답지도 못하고, 좋은 말 상대도 아니고, 거기다 죽어 가는 여자에게 그는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 주기엔, 라이언이 너무 가엾잖은가.

다른 것은 다 미루어 두더라도 죽어 가는 사람을 사랑해서 무엇을 할까.

그래서 미렌은 그렇게 결정했다.

그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니 당장에 외롭지 않을 정도만 마음을 받아 주겠다.

죽고 나서 당신의 기억 속에 그런 황후도 있었지, 하고 곱씹을 수 있을 정도로 남겠다.

“마리아에게 가 봐야지.”

침대에서 일어난 미렌은 조용히 마리아를 찾아 방을 나섰다.

시녀 두 명이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마리아는 미렌이 황후가 된 뒤부터 언제나 그녀의 곁을 지켜 준 이였다. 아버지인 에드가 공작보다도 더 가까웠다.

“마리아, 들어가도 될까.”

허락을 구한 미렌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침대에서 일어서기 위해 애쓰고 있는 마리아가 보였다.

“일어나지 않아도 좋아. 다리를 다쳤잖나.”

“죄송합니다, 전하.”

“죄송하긴. 왜 자지 않고 있던 거야?”

“열이 올라서 잠이 오질 않습니다. 거기다 제가 두 분의 중요한 시간을 방해한 것 같아서…….”

“그런 걱정은 마. 폐하와는 내일 아침 식사를 함께하기로 했으니까.”

“……다행이네요.”

희미하게 웃은 마리아가 침대에 누워 그녀를 올려다봤다. 언제나 자신이 침대에 기대 있기 바빴기에 누워 있는 마리아를 본 미렌이 픽 웃었다.

“오늘은 내가 마리아의 병간호를 해 줘야겠어.”

“송구스럽습니다, 전하. 부디 그러지 마세요.”

좁은 침대 위에 앉은 미렌이 식은땀에 젖은 마리아의 머리칼을 조심스레 넘겨주었다.

평생을 고귀한 이로 살아온 이답지 않게 그 손길이 따스했다.

“……전하께서는 가끔, 제 가족보다 더 가족 같으세요.”

“내가?”

마리아는 평민 출신이었다.

아마 고압적이지 않은 미렌의 태도에서 어렴풋이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느낀 걸지도 몰랐다.

미렌은 소탈하게 웃으며 침대 한자리를 차지했다.

이따금씩 그녀의 이마를 닦아 주기도 했다.

“마리아에겐 언제나 고마워.”

“제게요?”

“나를 두고 황실의 귀신이라지. 아직 죽은 목숨도 아닌데 곧 죽을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야. 마리아는 그런 내 옆에 있어 주었잖아.”

“전하, 그런 말씀 마세요. 귀신이라니요.”

“마리아, 기억나나? 결혼식을 위해 치장하던 날, 내가 웃었더니 방 안의 분위기가 싸늘해졌잖아. 마리아만이 유일하게 날 예뻐해 줬었는데.”

“그야 전하께서는 제게 누구보다 아름다우셨으니까요.”

“입바른 말도 잘하는군.”

마리아와 미렌은 그 뒤로도 오래도록 대화를 나누었다. 새벽이 다 지나가는 줄도 모르고.

설핏 잠이 든 것은 미렌이었다.

그녀는 점점 침대에 편히 몸을 기대다 그만 눈을 감았다.

왜인지 어지러울 정도로 졸린 탓도 있었다.

“…….”

그렇게 고요해졌을 때였다.

마리아의 방문이 벌컥 열렸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리 놀라지 않고 문가를 바라봤다.

라이언이 그곳에 서 있었다.

그는 미렌을 찾아 돌아다닌 모양인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황후가 제 방에 있지 않고 나돌아 다닌 적이 없었으니 놀라기도 했을 터다.

“폐하를 뵙습니다.”

마리아가 절뚝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라이언은 미렌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얼굴로 차갑게 그녀를 응시했다.

“어째서 황후가 이곳에 있을까.”

“……전하께서 걱정이 되셨는지 찾아오셨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제대로 모시지 못하여.”

“미렌의 건강을 아는 이가 이딴 곳에서 잠들도록 내버려 두었나.”

라이언은 마리아의 곁에 잠든 미렌을 빼앗듯 제 품으로 안아 들었다.

잠든 미렌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라이언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었다.

라이언이 한없이 가벼운, 제 품속의 여인을 내려다봤다.

그는 말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입술로 달싹이듯 말했다.

“……미렌, 오늘도 아침 식사는 힘든가.”

아니, 아침 식사는 하지 않아도 좋아.

그저…….

그저 당신이 죽음을 핑계로 내게서 도망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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