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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2)화 (2/133)

유성을 보러 왔나 봐

“아니, 저기, 이것 좀 놔 봐요!”

끙끙거리는 남자의 품에 갇혀 한참을 헤매던 미렌이 결국 언성을 높였다.

다친 사람 주제에 힘은 또 어찌나 센지.

“헤이든, 헤이든…….”

“헤이든인지 뭔지 난 아니니까 놓으라고!”

미렌이 얼떨결에 남자의 이마를 팍 하고 쳐 냈다.

뒤로 넘어간 그가 잠시 힘을 푼 사이 어서 품속에서 빠져나왔다.

그녀는 서둘러 제 손에 쥐고 있던 약초부터 확인했다.

물론 허약한 약초는 그사이 이미 목이 뚝 부러진 채였다.

“후우…….”

그녀가 화를 가득 담아 긴 숨을 내쉬었다.

잠결에 한 것 같은 이를 두고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래, 그렇게 참으려던 참이었다.

“이건 또 뭐야.”

꼭 동굴에서 말하는 것 같은 낮은 목소리였다.

황제, 그러니까 라이언의 것처럼 위압감을 가득 담은 목소리.

“거지인가?”

“뭐, 거지? 지금 말 다 했어요?”

“아니, 행색이 영 그렇잖아.”

내 행색이 어때서.

그렇게 생각하며 제 몸을 내려다보자 순간 남자의 말이 설득력 있게 느껴졌다. 그게 더 기분이 나빴다.

다친 남자를 도와주려던 마음이 싹 가신 미렌은 그대로 산 아래로 내려가려 했다.

“야!”

“야? 절 아시나 봅니다?”

“아니, 모르지. 그런데 나 좀 도와줘.”

고개를 돌리자 그는 앉는 것도 힘겨운지 바닥을 짚고 겨우 자리에서 상체를 일으키고 있었다.

남자의 하얀색 긴 머리가 핏물에 흠뻑 젖은 채였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제가 왜 도와줘야 하는데요?”

“힘이, 윽, 몸에 힘이 안 들어가서 마법도 안 나온다고!”

“저 아래 약방에 가시면 영감님이 계실 겁니다. 10실버면 처치해 주실 테니 가 보세요.”

“야, 윽!”

재빨리 떠나려 했던 미렌은 남자의 숨넘어가는 목소리에 이번에도 실패했다.

그길로 자리를 떠났다간 분명 꿈자리가 뒤숭숭했을 것이다.

쯧, 짧게 혀를 찬 그녀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전문적이진 않지만 근방에서 제법 유명한 약초꾼인 그녀는 가벼운 치료 또한 할 줄 알았다.

마침 수면초를 따면서 함께 채취해 두었던 약초 몇 개를 가볍게 찧어 상처에 붙였다.

가루로 내면 좋겠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이 정도면 약방까지는 내려가실 수 있을 겁니다.”

손을 털고 일어난 미렌은 이번에야말로 자리를 떠나려 했다.

그러지 못한 것은, 남자가 그녀의 손을 꾹 잡아 왔기 때문이다.

“같이 가 줘.”

“어딜요?”

“약방, 약방 말이야. 어딘지 모르겠으니까.”

“어린애십니까? 엄청 귀찮은데요.”

“그걸 사람 면전에다 대고 말하는 너도 성격 이상해.”

미렌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그 뒤엔 말없이 그를 부축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마 미렌도 마침 약방 영감님께 약초를 가져다 드려야 하는 입장이 아니었더라면 동행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이구, 미렌 왔느냐?”

“예, 영감님. 전에 의뢰하셨던 약초들 여기 둘게요.”

“그래, 그래. 그런데 저 짐 덩이는 뭐냐.”

대문 안에 들어서자마자 거침없이 남자를 평상 위에 버려뒀던 미렌은 영감님의 손짓에 고개를 힐끗 돌렸다.

그리고 덤덤하게 말했다.

“오다 주웠는데요.”

“쯧쯧, 보아하니 마법사구먼.”

“마법사요?”

그러고 보니 남자는 마법도 나오지 않는다며 투정을 부렸었다.

미렌은 의외라는 듯 쓰러진 그를 내려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남자가 보랏빛 눈을 찌푸렸다.

“뭘 봐?”

“영감님, 혹시 마법사들은 원래 다 저렇게 성격이 더러워요?”

“으응, 대부분 그렇지.”

“뭘 대부분 그래! 네가 날 변태같이 쳐다봤잖아!”

훌훌 웃은 영감님은 남자를 가볍게 무시하고 미렌을 바라봤다.

“그럼 미렌, 안쪽 방까지만 마저 옮겨 주렴.”

“제가요?”

“네가 데려온 짐 덩이잖니.”

“하아…….”

한쪽 눈을 찡그린 미렌은 결국 다시 한번 남자를 부축했다.

영감님 성격상 이대로 버려두고 갔다간 정말 아무 처치도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털썩.

낮은 나무 침대에 눕자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딱딱한 곳에 던져지듯 누웠으니 당연했다.

그래도 그는 자리에 누워 힘을 풀었다.

가물거리는 눈을 보아하니 곧 잠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눈치였다.

“야.”

“저요?”

“그래, 너.”

남자는 고통이 제법 심한지 말할 때마다 인상을 찡그리기 바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을 잇는 걸 보면, 무언가 중요한 할 말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어디 가지 말고 여기 있어.”

“제가 왜요?”

“보……상, 보상해 줄 테니까 가지 말고 있으라고.”

“보상이 얼만데요.”

“넉넉하게 해 준다고!”

고민하던 미렌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보상이야 받지 않아도 상관없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간 남자가 편하게 쉴 생각이 없어 보였던 탓이다.

그는 미렌이 고개를 끄덕거리는 걸 확인함과 동시에 스르르 잠이 들었다.

곧 편안해진 숨소리가 방을 울렸다.

미렌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보상, 돈이라면 그녀도 충분히 가져 봤다. 물론 그게 평민인 미렌 우드로서는 아니었지만.

“영감님, 저 이만 가 보겠습니다.”

“으응, 벌써? 차라도 한잔하고 가지 그러냐.”

“아버지가 밭에서 기다리고 계셔서요!”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영감님을 위해 크게 소리친 미렌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가기 전, 남자가 있는 방을 바라보긴 했지만 미안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세 시간 뒤.

“이봐요, 영감님.”

“뭐어? 뭐라고?”

“아까 그 토끼 닮은 여자 어디 갔냐고!”

“으응, 토끼는 먹는 게 아니야.”

“망할.”

남자, 헤겔 카르너는 거칠게 제 머리를 헤집었다.

정신을 차리고 났을 때에는 이미 여잔 사라지고 난 뒤였다.

보상을 해 주고 싶다는 건 사실 핑계였고,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사라졌다는 게 짜증이 났을 따름이다.

이를 바득바득 문 헤겔이 이번에는 약방 영감에게 다른 것을 물었다.

“영감, 이 근방에서 유명한 약초꾼이 있나?”

“약초꾸운? 미렌 말인가?”

“미렌?”

“그래, 널 데려왔던 곱게 생긴 아이 말이야.”

기막힌 우연에 헤겔이 히죽 웃었다.

물론 헤겔을 아는 다른 마법사들이 보았다간 저놈이 또 미친 짓을 저지르려 한다며 기겁할 만한 미소였지만.

***

“미렌, 벌써 자려는 거니?”

“엄마, 이번엔 저 좀 깨우지 마요! 주말엔 좀 쉬고 싶다고요.”

“아이고, 알았다. 알았어!”

미렌은 곧 배 위에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그 뒤로 그녀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쩌면 꼭 죽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

무거운 몸이 지독할 정도로 낯설게 다가왔다.

오늘은 유달리 상태가 안 좋네.

속으로 생각한 그녀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전하! 일어나셨습니까?”

“마리아, 지금이 몇 시지?”

“곧 저녁 시간입니다.”

“늦지 않게 일어났구나.”

라이언과 저녁 약속을 했던 게 어제였다.

부러 저녁도 먹지 않고 잠든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건강한 몸으로 살고 싶은 건 누구나 그럴 터다.

때문에 미렌은 오랫동안 황후 미렌의 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여 생활해 왔었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로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이니, 그를 위해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거겠지.

“그런데 이게 다…… 뭐지?”

“모르셨습니까? 폐하께서 저녁 식사를 바깥 정원에 준비하라 지시하셨습니다.”

미렌의 침실에는 따뜻한 겉옷들과 열 마법이 담긴 돌 따위가 널려 있었다.

추운 날씨는 아니었지만 혹시나 찬 바람이 무리가 될까 봐 준비한 모양이었다.

아니, 그것보다 바깥에서 식사라니.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제껏 미렌은 황후가 되고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살아왔었다.

혹시라도 그에게 폐가 될까 봐.

이미 죽을 목숨이라면 조용히 가는 게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오랜만에 두 분이 함께하시는 식사라 시종들이 바빠요. 전하, 치장을 돕겠습니다.”

“아, 그렇지. 그래…….”

치장이라고 해 봐야 별것도 없었다. 그저 밖에 나가도 춥지 않도록 따뜻한 옷을 여러 겹 입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것이 아주 중요한 과정이라도 되는 듯 옷들을 신중히 골랐다.

어차피 볼 사람이라곤 라이언과 제 아래 시종들이 전부일 텐데도 불구하고.

“대충 입으면 안 되는 건가?”

“폐하께서 명하신 일입니다. 날이 추우니 전하의 옷차림에 신중을 기하라고요.”

“……유난은.”

갑작스러운 마리아의 태도가 그제야 이해가 갔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미렌 에드가는 무엇이든 적당히 꾸미고, 적당히 옷을 입는 게 당연했다.

마침내 양말까지 고급스러운 것으로 갈아 신었다.

미렌이 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슬쩍 아래를 내려다봤다.

“돈 많으니까 좋네.”

저쪽은 구멍 난 양말만 계속 신었는데.

사실 그녀도 이제껏 이쪽의 부를 저쪽에 가져다줄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게 아니었다.

다만 그녀는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저 돈이 많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미렌!”

“라이언? 어쩐 일로 벌써, 집무는 끝나신 겁니까?”

달려온 라이언이 순식간에 미렌의 앞까지 다다랐다.

무척이나 다급히 달려왔는지 그로부터 고르지 못한 숨소리가 연신 터져 나왔다.

“집무가 문젤까. 당신과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는데.”

“그리 중요한 약속도 아니었습니다.”

“나에겐 무엇보다도 중요해.”

라이언은 미렌의 한쪽 손을 조심스럽게 잡고 바깥으로 이끌었다.

걸음이 느린 그녀가 벅차지 않도록 제 속도를 자꾸만 늦추면서.

둘이 함께 복도를 지나가자 뒤따르는 시종들도 많았다. 라이언은 미렌에게만 들리게끔 나직이 말했다.

“그런데, 정말 오늘은 일찍 일어났군.”

“약속을 했었으니까요.”

“매번 밤늦게나 겨우 일어났었잖아.”

미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할 말이 없다는 게 더 옳았다.

건강한 삶이 그녀에겐 더 중요해 이 몸의 시간을 줄였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결국 태연한 태도로 화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왜 바깥 정원에서 식사를 하는 겁니까?”

“오늘은 연회 날이니까.”

“연회……요?”

“아무래도 곧 제국 건립일이다 보니.”

그제야 생각이 났다. 사실 부모님이 농부인 그녀로서는 딱히 건립일이라 해서 달라질 게 없었던 탓이다.

“설마 다른 귀족들도 식사 자리에 오는 겁니까?”

“아니. 모두 대연회장에 모여 있겠지. 나는 먼저 빠져나왔을 뿐이야.”

원래대로라면 미렌도 함께 갔어야할 연회였다.

그러나 몸이 좋지 않은 황후였기에 공식적인 행사에 참여하지 않은 지도 오래된 일이었다.

미렌은 그런 라이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는 별로 재밌지도 않은 연회라고 말했지만, 자신과의 저녁 식사보다는 더 중요하고 재밌을 자리일 터다.

그런데 그는 그토록 다급하게 자신에게 달려왔다.

“오늘 밤에는 유성이 떨어진다더군. 그래서 당신과 함께 정원에 가고 싶었어.”

소년처럼 쑥스럽게 웃은 라이언이 미렌과 함께 걸음을 옮길 때였다.

문득 정원의 수풀 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소리에 민감한 미렌이 걸음을 멈췄을 때였다.

“……아.”

수풀 속에 숨어 있는 건 두 사람이었다. 진한 입맞춤을 하는 모습에 미렌이 얼어붙었다.

그 순간, 뒤에서 라이언이 그녀의 두 눈을 가려 줬다. 속삭이는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저들도 유성을 보러 왔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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