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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 (114)화 (115/115)

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115)

“…….”

집무실 안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세 명의 부관은 숨소리라도 낼 새라 눈치만 보며 서류를 넘겼고, 제빌은 싱글싱글 웃으며 루비나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루비나드는 언짢은 기색으로 서류에 서명하는 중이었다.

사각사각 소리가 한참이나 이어지다가 점차 느려졌다. 무언가를 꾹 참는 얼굴로 서류를 바라보던 루비나드가 홱 고개를 들었다.

“…하.”

무언가를 말하려던 루비나드가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옆에 있는 다른 부관들이 거슬렸다. 미간에 힘이 잔뜩 들어간 채 펜을 잡는 루비나드를 보며 제빌이 배시시 웃음 지었다.

저런 모습조차 귀엽다. 다른 이가 있을 때의 루비나드는, 꾹꾹 눌러 참고 있는 게 보여서 사랑스러웠다. 물론 이들이야 루비나드의 모습이 그저 화를 참고 있는 것으로만 보이겠지만.

저 보라색 눈동자에 가득 차 있는 걱정은 자신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저, 저희는 이만 물러가 볼…까요?”

셋 중 그나마 눈치가 있는 한 남자가 말을 꺼내자 루비나드가 슬쩍 남은 서류를 확인했다. 아직 검토하지 못한 것은 한 뭉치 정도. 셋 모두가 약한 사업 지원 분야의 서류이니 루비나드 혼자 하는 게 오히려 빠를 양이었다.

“음.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도록.”

루비나드는 위엄을 잃지 않고 말할 생각이었겠지만, 그게 타인에게는 위압감으로 다가왔다. 위의 두 오라비가 광증을 앓았던 만큼 현 황제 역시 방심할 수는 없었다.

혹여 기분 상할 때 곁에 있었다가 불똥이라도 튀면.

벌벌 떨고 있던 세 사람은 제대로 책상을 정리하지도 못하고 간략하게 예를 갖추곤 밖으로 나가 버렸다. 드디어 둘만 남았다.

“제빌 경.”

“네, 폐하.”

“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겠어?”

루비나드가 성큼 제빌의 곁으로 다가갔다. 평소 제 자리가 아니라 편안한 의자에 앉아 늘어져 있는 그의 앞에 선 루비나드가, 돌연 그의 이마를 짚었다.

“아직 열이 조금 있잖아.”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자꾸 이러니까 회복이 늦어지는 것 아니야!”

찌푸린 눈살조차 사랑스러워서, 제빌은 그저 바보처럼 웃었다. 그 웃음조차 루비나드의 심기를 거스르는지 그녀가 제빌의 이마에서 손을 떼고는 입을 열었다.

“그대가 정말로 빨리 복귀하고 싶다면 조금이라도 더 침대에 누워 있어야지.”

제빌의 몸은 꽤 많이 회복되었다. 의사도 가벼운 운동이라면 해도 괜찮다고 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왜인지 모르지만, 아침에는 꼭 열이 나곤 해 루비나드의 속을 태웠다.

오늘 아침에도 일어나자마자 이마를 짚었을 때 미열이 있기에 침대에 누워 그냥 쉬라고 이른 참이었다. 하지만 아침 식사를 끝내고 집무실에 들어오자 세 명의 부관과 제빌이 그녀를 맞이했다.

아직 루비나드의 관심을 더 받고 싶은 그가, 아침마다 제 이마에 뜨거운 물수건을 올려놓고 있다는 건 모르겠지. 제빌은 일부러 힘없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폐하에게서 한시라도 떨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윽.”

촉촉하게 젖은 청회색 눈동자에 루비나드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지난밤이 떠올라 저절로 얼굴이 화끈해졌다.

제발 저런 눈으로 좀 보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특히 침대 밖에서는. 아직 그런 게 익숙하지 않은 루비나드로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사실은….”

“아니, 그만. 그만!”

최근의 제빌은 낯간지러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다. 밤의 침실에서라면 몰라도, 언제 사람이 올지 모르는 낮의 집무실에서 이런 대화를 하는 게 아직 꺼려졌다. 루비나드가 다급하게 그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자 청회색 눈동자가 요염하게 휘었다.

제빌이 루비나드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루비나드가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자, 손바닥에 무언가 보드라운 것이 닿았다. 그제야 그가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깨달은 루비나드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손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분명 병석에서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힘이 약해졌을 터인데 왜인지 손을 빼낼 수가 없었다. 꽉 잡힌 손에 느껴지는 감촉에 루비나드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에 찡그린 얼굴. 제빌은 당장이라도 그녀를 침실로 데려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천천히 그녀의 손을 놓아 주었다.

“하지 말래도.”

“둘만 있는데 어떻습니까.”

으, 으으.

루비나드는 끙 앓는 소리를 내며 한 발 더 뒤로 물러섰다. 지금의 제빌은 오랫동안 억눌러 온 감정을 폭발시킨 참이라 제어가 잘 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제빌에게는 자제할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긴 했다.

그걸 모르는 루비나드는, 그가 너무 기뻐서 그런 거라 생각하면서도 아직 이런 게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그대가 항상 그랬잖아! 누가 들을지 모르니 밖에선 조심하라고!”

“들으면 어떻습니까. 이제 진짜 부부인데.”

“아니, 좀!”

루비나드가 제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더니 제빌의 팔을 덥석 잡았다. 잡아당기자 그는 순순히 루비나드를 따라 일어났다.

“당분간은 집무실 출입 금지야.”

“그런…, 너무하십니다.”

글썽이는 눈동자에 루비나드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아니, 하지만 이건 물러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대로면 업무에 커다란 지장이 생긴다. 뭣보다 그녀의 심장이 남아나질 않는다.

“나가. 바로 침실로 가서 쉬도록 해.”

혹여 친위대에게 들릴까 낮은 목소리로 당부하는 루비나드에게, 제빌이 씩 웃으며 물었다.

“폐하의 침실로 가도 괜찮습니까?”

“어? 어…, 뭐 상관은 없는데. 왜?”

제빌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며칠 다듬지 못했다고 꽤 길어진 머리카락이 살랑이며 루비나드의 뺨을 간질였다.

제빌의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간질이는 것처럼.

“폐하의 향기에 둘러싸여 잠들려고요.”

별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리 음란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런데 나직하게 속삭이는 그 목소리에서 어쩐지 교태로움이 느껴져 루비나드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의 표정을 즐기며 제빌이 말을 이었다.

“잠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폐하의 향기 때문에.”

“제빌 경…! 제발 좀….”

이제는 더 붉어질 얼굴도 없었다. 더 붉어지면 아예 터져 버리는 게 아닐까. 완숙한 토마토보다도 붉은 얼굴로 루비나드가 부탁하자 제빌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자꾸 제 입을 자유롭게 두시니까 그렇죠.”

“뭐…?”

“…….”

제빌이 음, 하는 소리를 내며 제 턱을 쭉 내밀었다. 그가 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루비나드가 그제야 그의 뜻을 알아챈 듯 경악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복도에 누가 지나가면 어쩌려고!”

“그럼 계속 이럴 겁니다.”

하, 정말이지….

루비나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제빌의 팔을 끌어 집무실 안으로 당겼다. 그리고 그의 크라바트를 잡아 고개를 숙이게 했다. 순순히 끌려가 준 제빌이 입술을 내밀자 루비나드가 그 위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췄다.

하지만 여전히 불만족스럽다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는 제빌의 귓가에 루비나드가 작게 속삭였다.

“침대에서 얌전히 기다리도록 해.”

요염하고 오만한 미소와 달리 그 얼굴은 여전히 붉었다. 제빌은 낮은 웃음소리를 흘리곤, 이번엔 그가 먼저 입술을 겹쳤다. 짧은 키스 후 제빌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빨리 오세요, 폐하.”

* * *

뒷정리는 신속했다.

황제 시해 미수의 현행범들이 아닌가. 재판도 심문도 필요 없었다.

평소 황제에게 불만을 품었던 수많은 가문이, 그저 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일하지 않고 많은 걸 누리던 이들이 숙청당했다. 오죽하면 숙청 명단을 보던 루비나드가, -하, 미련 한 점 남지 않아서 좋군. 용케도 이렇게 쓰레기들만 모았어.

라고 했을 정도였다.

다만 한동안 숨을 죽이고 있던 슐라민 공작이나 수많은 국가 지원 사업을 진행하던 베카르티는 조금 아깝긴 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베카르티 교수는 반란군의 수장인 엔도르빌의 최측근이었고, 슐라민 공작의 경우엔 폐태자 론디아스의 황제 시해 미수 사건에도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불거져 나왔다.

서신에는 암살자 길드를 암시하는 ‘달그림자’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었다. 보낸 이는 텔란 경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필적은 론디아스의 것이었다.

이에 대해 루비나드가 심문하자 슐라민 공작은,

-…하, 이 서신을 태우지 않았던 것이 후회되는군요. 이미 폐하의 안에서는 다 답이 나온 일이 아닙니까.

그렇게만 대답했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베카르티 교수는 마력 제어구를 찬 채 공개 처형당했다. 그는 처형장에서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라는 처형인의 말에 비웃음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고 한다.

-어리석은 황제여! 당신 곁에 있는 것이 어떤 괴물인지 진정 모르는 것이오? 그 괴물에게 아비도 형제도 먹혀 놓고, 아무것도 모른 채 충신을 버리고 괴물을 택하다니!

참관객들은 야유하며 돌을 던졌다.

황제란 신성한 존재였다. 그 존재만으로도 위대하며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될 신의 자손이었다. 그런 이에게 칼을 들이밀어 놓고 한다는 말이 사실은 자신이 충신이라니.

게다가 루비나드는 선황 데거베일의 의지를 이어받아 오랫동안 이어져 온 전쟁을 종식했다. 그 누구도 함부로 로간 제국을 건드릴 수 없는 탄탄한 기반을 두고.

그뿐이랴. 경제는 점차 윤택해져 가고 일자리가 늘었다. 이로 인해 귀족이 아닌 이들의 재산이 점점 늘어났다. 수익이 많아지니 정당한 세금만 걷고도 나라를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국방비가 많이 줄어든 것 역시 큰 역할을 했다.

아직은 완벽하지 않지만 젊은 황제는 역대 황제들 그 누구도 보이지 않은, 제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을 보여 주었다. 영토 확장에, 힘자랑에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더 편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열중했다.

그런 황제를 해하려 한 역적 놈들은 당연히 용서할 수 없었다.

베카르티는 형이 집행되기도 전에 돌팔매질에 목숨을 잃었지만, 처형인은 굳이 그의 머리를 잘라 광장에 전시했다. 다시는 이런 반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본보기를 보인 것이었다.

그리고 보르본 공작가의 차남, 커드닐은.

-폐하를 만나게 해 주십시오.

-역적 놈 주제에 감히 폐하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으냐.

-폐하께 꼭 드려야만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국서 전하에 대한,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시끄럽다!

보르본 공작가 전체가 가담한 것은 아니었기에 루비나드는 그의 목숨만을 거두겠노라 선언했다. 그런 그녀의 귀에 커드닐의 이야기가 들어갔다.

처음에는 코웃음을 치고 넘어가려 했다. 그런데.

-폐하를…, 폐하를 뵙게 해 주십시오! 진짜 역적은 황자 저하가 아닙니다! 진짜 역적은 폐하의 바로 곁에 있습니다! 제게 증거도 있습니다!

겔라드 디 다휜까지도 그런 말을 꺼내며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제빌과 관련된 일. 진짜 역적에 대한 증거. 폐하의 곁에 있는 괴물.

세 사람의 말에 결국 루비나드가 움직였다. 그리고.

“…….”

차가운 지하 감옥.

서늘하고 습기 가득한 그곳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의자에 앉은 루비나드가 다리를 꼬고 몸을 비스듬히 기댔다. 그리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바라보는 듯한 싸늘한 눈으로 두 사람을 내려 보고 있었다.

자신을 사랑한다며 애절한 고백을 했던 두 남자를.

마지막 회

커드닐도, 겔라드도 루비나드만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별 관심이 없다는 듯 간수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그래서, 증거라는 건 무엇인가?”

“폐하의 앞이 아니면 절대로 보여 주지 않겠다고 해서….”

“수감할 때 별다른 건 없었나?”

“네.”

소지품은 모두 빼앗았는데 증거가 있다, 라. 루비나드의 시선이 겔라드에게로 향했다. 커드닐이 이를 으득, 갈더니 먼저 입을 열었다.

“폐하. 황자 저하께서는 폐하를 구하려 하셨습니다.”

“짐을? 그 배신자가?”

루비나드의 입술에 비웃음이 서렸다.

공격 마법의 범위나 세기를 조절하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남자가 제정신이라면 자신을 향해 마법을 사용하진 않았을 터.

“그렇군. 짐을 타깃 삼아 공격 마법을 시전하는 것이 구해 주는 것이라면, 짐은 그 구원을 거부하도록 하지.”

“저하께서는 계속 폐하의 걱정을 하셨습니다. 곁에 붙어 있는 그 괴물, 제빌 디 쿠온이 폐하를 혼자로 만들려 했으니까요.”

혼자?

루비나드의 입술이 다시 비틀어졌다. 이번에는 표독스러울 정도의 독기까지 서린 얼굴이었다.

“짐을 혼자로 만든 건 그대들이야.”

“폐하….”

아직 늦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그 괴물이 사경을 헤매거나, 죽었을 지금. 루비나드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토록 누이를 생각하던 오라비의 마음을 일러 주면 분명.

“그 괴물은 어렸을 때부터 폐하의 곁에 누군가가 접근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저나, 여기 있는 다휜 경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일부러 도발해 폐하가 오시는 시각에 맞추어 저희가 그에게 폭언을 퍼붓도록 만들었습니다.”

“…하. 무슨 소리인가 해서 와 본 짐이 바보였어.”

루비나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의자에서 일어나려 했다. 겔라드가 그녀의 발치에 납작 엎드려 소리쳤다.

“폐하! 보르본 경의 말은 사실입니다! 여기, 이걸 확인해 주십시오.”

겔라드는 보란 듯 너덜너덜한 셔츠를 걷어 올려 제 배를 드러냈다. 루비나드가 눈살을 찌푸리자, 그는 다급한 손놀림으로 뱃가죽 위를 손톱으로 긁어 댔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가만히 지켜보는 사이, 그의 뱃가죽이 뜯겨 나오기 시작했다.

“이건…, 무슨….”

“마탑에서 진행된 특수 분장 실험의 결과물입니다.”

벗겨 낸 가죽 아래에는 작은 구슬이 하나 있었다. 루비나드는 물끄러미 구슬을 바라보다 간수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간수가 구슬을 받아 루비나드에게 가져갔다.

“이게 증거라?”

“이건 영상을 기록할 수 있는 마법 도구입니다. 예전, 폐하의 놀이 친구였던 이들을 기억하십니까? 그들의 증언입니다.”

기억하지.

그들은 루비나드가 쓸모없는 장사 도구라는 걸 알자마자 오라버니들에게로 줄을 갈아탄 이들이었다. 놀이 친구 중 하나였던 다휜은 제빌을 업신여기고 괴롭히다가 폭언을 퍼붓고 결국 쫓겨났었다.

그들의 증언이 퍽이나 공신력이 있겠다만, 티는 남겨 두어선 안 되는 법.

루비나드가 구슬을 조작했다.

그러나.

“…하. 끝내 짐을 능멸하는군.”

영상을 기록할 수 있다는 마법 도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루비나드가 어이없다는 듯 겔라드를 향해 구슬을 집어던졌다. 놀란 그가 마법 도구를 주워 들어 조작해 보았으나 역시나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어째서, 어째서?

설마.

겔라드는 불과 이틀 전 자신을 찾아왔던 손님을 떠올렸다.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가 갈릴 정도로 증오스러운 남자.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두려운 남자.

하지만 그는…, 분명 겔라드에게는 손 하나 대지 않았는데.

“정말입니다, 폐하! 그들은 제빌 디 쿠온의 도움으로 당시 황태자였던 제1 황자와 제2 황자를 만났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제2 황자인 엔도르빌 저하께서는 폐하의 놀이 친구인 그들을 받아 주지 않았고, 제1 황자 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그럼 묻도록 하지. 짐의 국서가 그런 짓을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지?”

“그건…!”

“그대들은 이미 짐의 눈 밖에 나 있었다. 어린 시절의 국서를 괴롭히지 말라고 그토록 위협을 했건만 들은 체도 하지 않았지. 그런데 왜 국서가 내게 이런 게 알려질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을 내 곁에서 떼어 냈어야 했지?”

겔라드의 입이 막혔다. 루비나드는 귀찮다는 듯한 얼굴로 손을 살래살래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대에 이르러서는 할 말도 없군. 설령 국서가 그런 짓을 했다고 해도, 그대가 폭언하지 않았더라면 아무 문제 없었을 터. 애초에 그대가 어린 시절의 국서를 괴롭히는 장면을 짐이 한두 번 본 것이 아니야. 그게 한꺼번에 폭발한 것뿐이지 딱히 그날의 일 때문에 그대를 내친 것도 아니지.”

가만히 듣고 있던 겔라드가 입을 열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그자에게 다가간 적도, 말을 건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자는 어느 날 폐하를 기다리고 있던 제게 ‘폐하가 귀찮아하시니 더는 접근하지 말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그대는 국서를 모욕하고 주제넘은 짓을 한다며 비웃었군. 아주 정당한 처사야, 그래.”

그렇다면.

겔라드는 만에 하나의 사태에 대비해 베카르티에게 들어 두었던 말을 꺼냈다.

“딜로나의 잎, 케일란의 뿌리, 익실랍의 꽃. 기억하십니까, 폐하?”

베카르티가 제빌에게 주문했던 약초들. 루비나드가 눈을 가늘게 떴다.

“딜로나는 환각을 일으키는 작용이 있습니다. 유령을 보는 풀이라고도 불린다고 하지요. 알아보니 케일란은 착란을, 익실랍은 환청을 일으키는 작용을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세 가지 약초 모두가 엔도르빌 저하의 약에서 나왔습니다.”

가만히 생각을 곱씹던 루비나드가 피식 웃었다.

“그 세 가지 약초에 대해 국서는 알지도 못했어. 게다가 베카르티 교수가 준 참고 서적을 보니 가장 오래된 참고 서적이 겨우 삼 년 전의 것이더군. 그 배신자가 병을 얻은 것은 십 년 전의 일이다. 겨우 열아홉에 불과했던 제빌이 어디서 그런 약초를 얻었다는 거지?”

“설령 그때의 짓은 그 괴물이 한 짓이 아니더라도….”

“확실히 그 배신자에 대한 일 처리는 국서에게 맡겨 두긴 했었지. 하지만, 어떻게 믿지? 배신자의 약에서 세 가지 약초가 나왔다는 걸.”

“그건 마탑에서…! 베카르티 교수가 마탑에서 분석했습니다! 그러니 분명 기록이…!”

“흐응, 마탑이라.”

루비나드가 연락용 수정구를 꺼냈다. 혹시 필요할지도 모른다며 제빌이 챙겨 준 것이었다. 그들이 무슨 소리를 하든,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는 증인이 필요할 것이라며.

루비나드는 곧바로 마탑 직통의 마력 선을 연결했다.

《 폐하! 몸소 무슨 일로 연락을 주신 것입니까? 》

“여기 있는 역적들이 내 국서가 제2 황자였던 배신자를 환각 상태에 빠뜨렸다고 주장하고 있네. 그 분석을 마탑에서 했다던데, 맞나?”

《 아, 기억이 납니다. 갑자기 급한 일이라며 제게 직접 약이 담긴 통을 주며 분석해 달라고 했습니다. 비밀은 꼭 지켜 달라면서. 그가 그런 부탁을 한 건 처음이라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

“그래서 결과는?”

《 틀림없는 약이었습니다. 》

겔라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이런 결과가 나오는 거지?

“어떤 약인지 그대가 이 반역자들을 위해 친절히 설명해 줄 수 있겠나.”

《 성분을 다 말해 봤자 복잡할 테니 효과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환청이나 환각을 줄이고 흥분 상태를 진정시킬 수 있는 약재들이 사용되었습니다. 》

“귀찮게 해서 미안하군.”

루비나드가 수정 구슬을 간수에게 넘겼다.

두 사람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게 꽤 볼만했다.

“그대들의 말을 믿는다면, 베카르티 교수는 짐의 오라비를 속여 국서와 황제를 시해하려 한 천하의 역적이 되겠군.”

“그 괴물이…, 그 괴물이 또 손을 쓴 것입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계속 듣고 있었지만, 더는 들어 줄 마음이 없었다. 루비나드는 한 치의 미련도 남기지 않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멀어지는 그녀의 뒤로 두 남자 중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 그 괴물은 폐하께 집착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진짜로 폐하를 사랑하고 있는 건…!”

루비나드의 발이 멈췄다.

이미 남자의 목소리는 아우성이 되어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그러니 분명 루비나드의 목소리 역시 그에게는 닿지 않겠지만.

그래도 루비나드는 입을 열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뭘 해도 용서될 것이라 생각하지 말도록. 아무 데나 그 이름을 붙이지도 말고.”

그건, 사랑이라는 고결한 이름을 더럽히는 짓이니.

루비나드는 이번에야말로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 자리를 떠났다. 남은 것은 차가운 적막뿐이었다.

* * *

“으음….”

루비나드의 뒤척임에 제빌이 흠칫 놀라 몸을 굳혔다.

다행히 그냥 잠꼬대였던 듯 이내 규칙적인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도한 그가 붉은 침구를 끌어 올려 루비나드의 어깨를 덮어 주었다. 이제 선선한 시기가 되어 새벽에는 맨 어깨를 드러내고 있기엔 너무 추웠다.

“…하, 하하.”

문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제 품에 안긴 가녀린 몸을 느끼고 있자니 이게 정말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분명 천국이 있다면 여기겠지.

시작은 루비나드였다.

방아쇠를 당긴 것은 커드닐이었고, 잡을 수 없이 번져 가는 불길에 기름을 부은 것은 다프넬이었다.

루비나드를 사랑한다며 다가온 남자들은 제물이 되었고, 제빌은 그 불길로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오로지 단 하나.

루비나드를 얻기 위해.

그리고 방법을 알려 준 것은 바로 엔도르빌이었다.

겉으로는 차갑고 엄해 보이는 그녀의 속에, 사실은 버릴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려 준 것이 엔도르빌이었다. 평소의 그녀라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짓을 저지른 그를 바라보던 루비나드의 눈빛.

제빌은 눈치챘다.

딱 한 번.

분명 딱 한 번이라면 루비나드는 자신을 용서해 줄 것이라는 걸.

루비나드의 곁에 있는 모든 것을 불사르며 그녀를 혼자로 만들었다. 그리고 아무도 그녀의 곁에 다가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겁쟁이인 그가 안심할 수 있도록.

그녀를 절대 빼앗기지 않도록.

“폐하….”

내가 당신의 곁에 있기 위해서, 이 유일한 자리를 얻기 위해서 무엇을 했는지 당신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겁니다.

그걸로 됐어요.

더럽고 추악한 것은 모두 내가 끌어안은 채 무덤 속까지 기어들어 갈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그저 태양 아래에서 제가 사랑하는 당신의 모습 그대로 빛나고 있으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당신이 하고 싶은 건 뭐든 제가 이루어 드리겠습니다. 당신을 위협하는 건 모두 제거하겠습니다. 당신이 필요한 건 뭐든 가져다드리죠.

그러니.

“…루비나드.”

내 곁에만 있어요.

내 곁에서만 빛나요.

나만을 위한 태양이 되어 줘요, 루비나드.

서로가 서로를 위한 유일이 되어.

제빌은 침구 속으로 파고들었다. 차갑게 식은 살갗에 뜨거운 체온이 닿자 노곤해졌다. 잠든 루비나드를 꽉 끌어안은 제빌이 그녀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폐하.”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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