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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 (112)화 (113/115)

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113)

-우리 그만 이혼할까?

선황, 데거베일이 서거하기 직전에 루비나드가 꺼낸 이야기.

제빌은 그 한마디가 왜 나왔는지 사실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루비나드는 분명 자신을 남자로 의식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이혼이라는 단어가 잘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일부러 맞춘 건 아니었지만, 곧바로 들려온 데거베일의 서거 소식이 그녀의 말을 끊어서 다행이었다. 제빌은 뒤로 손을 써 루비나드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려 했다. 갑자기 이혼을 꺼낼 정도의 무언가. 새로운 남자가 접근했다거나, 아니면 심경의 변화를 일으킬 만한 다른 일이 있었거나.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올라오는 보고서마다 난색을 보였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더 끌어야 하지. 일단은 모든 일이 끝난 후, 제가 회복할 때까지는 시간을 끌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제 조사단을 모두 풀어 두었다.

그리고 의식을 잃고 있었을 때. 아니, 루비나드가 ‘의식을 잃고 있다’라고 믿고 있었을 때 들은 이야기가 모든 것을 해결해 주었다.

-그대를 위해서 성대한 결혼식을 열어 주도록 할까? 그대가 내 총애를 잃어서 이혼한 게 아니라, 내가 그대를 위해 놓아 주었다는 걸 모두가 알 수 있도록 해 줄게. 사실은 내가 매달렸던 거고 그대가 사랑하는 여자는 따로 있었던 거니까. 모두가 알 수 있도록 그렇게 해 줄게.

사실은 그전에, 루비나드가 그를 불렀을 때 이미 정신이 들었었다. 그런데 몸은커녕 눈꺼풀도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를 부르고 싶었는데, 입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끙끙대며 정신이 돌아왔음을 알릴 방법을 찾는 동안 루비나드가 멋대로 이야기를 시작했고, 멋대로 제 속내를 말했다.

아무래도 루비나드는 리본 이야기 때문에 커다란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제빌을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생각에 놓아 주려 한 듯했다. 뭐든 다 들어주겠다는 그녀의 고백을 들으며 제빌은 생각했다.

아, 그때 그런 조건을 걸어 두어서 천만다행이라고.

“기억하십니까, 폐하? 저와 한 약속.”

“약속?”

루비나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잠시 생각하던 그녀가 이내 떠올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고 있어.”

“계약 결혼을 받아들일 때 제가 이야기했었지요. 딱 하나, 부탁을 들어달라고.”

“음.”

어찌 잊을까. 푸른 불꽃이 일렁이는 것 같던 청회색 눈동자를.

그 뒤에 보였던 그 어여쁜 미소와 그가 내뱉은 조건을.

-제가 바라는 한 가지는…, 이혼 제안을 제가 할 수 있도록 해 주시라는 것입니다.

별것 아닌 조건이었다. 루비나드는 두말없이 받아들였다.

그가 말만 하면 언제든지 이혼해 줄 생각이었다. 그때야 이렇게 될 줄 몰랐으니까. 그에게 좋은 사람이 생기면 바로 이혼해 주고 그의 결혼을 축복해 줄 생각이었으니까.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루비나드를 보며 제빌이 씩 웃었다.

-각서를 쓰도록 하지요. 이런 건 확실한 게 좋으니까요.

-으음. 각서를 만들어서 내 책상에 올려 두게.

다음 날 아침.

루비나드의 책상 위에는 결재해야 하는 서류들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가장 위에 한 장의 각서가 있었다.

『 각서.

성명: 루비나드 디 테비시안.

로간 제국 19대 황제, 루비나드 디 테비시안은 본인의 명예와 지위를 걸고 아래의 조건을 지킬 것을 서약한다.

1. 루비나드 디 테비시안과 제빌 디 쿠온의 결혼은 계약으로 맺어진다.

2. 이 계약을 파기할 수 있는 것은 제빌 디 쿠온뿐이다.

3. 루비나드 디 테비시안은 2의 조건에 동의한다.

제국력 341년 2월 5일

루비나드 디 테비시안 인 』

2번 항목이 사실 신경 쓰이긴 했다. 이는, 달리 말하면 루비나드 쪽에서는 이혼을 요청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었었다.

루비나드가 먼저 이혼을 요구할 일은 없으니까. 있다면 오히려 제빌 쪽이겠지. 그렇게 생각했기에 아무런 의심 없이 각서에 서명을 했었지.

그런데 왜 지금 그 이야기를 꺼내는 건지는 이해가 가질 않았다.

“각서도 쓰셨었죠? 이렇게.”

제빌이 품 안에 넣어 두었던 각서를 꺼내 내밀었다.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그 각서의 내용은 모두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루비나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빌이 엷게 웃었다.

“폐하라면 이미 눈치채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이혼을 제안할 수 있는 건 저뿐입니다. 폐하께서는 불가능하시죠.”

“…음. 알고 있어. 하지만, 그대가 동의한다면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지. 그리고 그대는 당연히.”

“저는 당연히, 절대로 폐하와 이혼할 생각이 없습니다.”

“음, 그렇겠지. …응?”

당연히 동의할 것이라 생각했기에 고개를 끄덕이던 루비나드가, 뜻밖의 말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사람은 얼마나 둔한 것인지. 다른 여자를 사랑하면서 루비나드에게 이토록 스킨십을 요구할 리가 없는데. 그것도 키스를. 최소한 제빌은 마음에도 없는 스킨십은 할 수 없었다.

루비나드를 손에 넣기 위해 무슨 짓이건 했던 그가 유일하게 불가능했던 게 미인계, 색계였으니까. 타인과 성적인 접촉을 한다는 상상만으로도 토할 것 같았다.

“폐하께서는 저를 얼마나 음란한 사람으로 보시는 겁니까.”

“으, 응? 가, 갑자기 왜 그런 말을….”

음란이라는 말만 나왔는데 루비나드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 얼굴이 사랑스러워서 제빌은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폐하께 아무런 마음도 없는데 키스를 조를 정도로 제가 절조 없어 보였습니까?”

“아니, 그건…. 그대, 그, 다쳤을 때 머리도….”

“안타깝게도 제 머리는 지극히 정상입니다. 아마 주치의도 그런 말을 했을 텐데요.”

“…아니, 하지만….”

그토록 오랫동안 사랑해 왔던 여자가 아닌가.

제빌이 자신을 진심으로 경애하고 있다는 건 느꼈다. 그의 목숨을 던져서라도 루비나드를 구하려 할 정도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게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라는 것 역시 확신했다.

제빌은 변하지 않는 남자였다. 그러니 릴리트를 사랑하는 마음 역시 변하지 않았을 것.

…그렇게 생각했는데.

“폐하.”

“으, 음?”

“목숨을 바쳐 폐하를 구하려 한 충신에게 상을 한 가지만 주시겠습니까?”

뜬금없는 말에 루비나드의 얼이 빠졌다.

이 남자, 정말로 머리가 괜찮은 것 맞는 걸까. 주치의를 바꿔야 하나. 아까부터 도저히 이야기의 맥락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루비나드에게, 제빌이 대답을 재촉했다.

“안 되나요?”

축 늘어진 눈꼬리에 시무룩한 표정. 루비나드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내, 내가 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해 주도록 하지.”

“지금부터 한 가지 고백을 할 겁니다. 폐하께서는 어쩌면 용서하기 힘든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번의 공을 봐서 딱 한 번만 제 고백을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용서라니.

릴리트에 대한 건가? 아내가 있으면서 다른 여자를 마음에 품고 있던 것을…? 아니면 계약 결혼을 하기 전에 마음에 둔 영애가 있냐는 말에 거짓을 답했던 것을?

잠시 생각하던 루비나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생각해도 생각해도 답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유일하게 정답을 알고 있는 제빌에게 듣는 편이 낫겠지.

“으음.”

“잠시, 이쪽으로.”

제빌이 루비나드의 손을 잡아 가까이 끌었다.

첫날밤이었던가. 그의 품에 처음 안겼던 것은. 그날처럼 루비나드의 몸이 쓰러지듯 그의 위에 겹쳐졌다. 그때보다 조금 마른 몸은, 그래도 정신을 차렸던 때보다는 훨씬 건강해져 있었다.

“폐하.”

“음.”

“사실 저는, 폐하의 종이 된 몸으로써 해선 안 될 일을 해 왔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폐하를 속이고 있었습니다.”

“으음.”

루비나드가 눈을 감았다.

제빌이 어떤 배신을 하던, 한 번은 분명 용서하고야 말겠지. 언젠가 생각했던 것처럼. 루비나드는 불안감에 날뛰는 심장을 제 손으로 꾹 눌렀다.

루비나드를 끌어안은 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제빌이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갔다. 붉은 머리카락이 그의 얼굴을 기분 좋게 간질였다.

“사실은… 그 리본을 제게 준 것은, 제가 오랫동안 마음을 다 바치고 있었던 것은.”

제빌은 확신했다.

분명 폐하는 자신을 버리지 않는다. 지금이라면, 무슨 이야기를 해도.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정말로? 네깟 놈이 그동안 그녀를 계속 속여 왔다는 걸 알아도, 폐하가 너를 용서할까? 너 같은 놈은 어디에나 굴러다니고,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데. 아니, 너 따위 것보다 더 잘생기고 능력 있는 놈들이 그녀 곁에 잔뜩 있는데.

너 따위는 언제든지 갈아 치울 수 있는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데.

확실히…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게 맞았다. 제빌은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그는 음습했고, 더러웠으며, 비열하고 치졸했다. 그래서 이런 짓을 해서 그녀의 곁에 저 하나만 두지 않으면 마음을 놓지 못하는 비겁자였다.

그렇기에.

그녀에게는 이제 자신밖에 남지 않았기에.

비겁하고 치사한 제빌이라도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니, 그렇게 만들었다. 이 터질 것 같은 마음을 고백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냈다.

아주 오래전부터 숨겨 왔던 마음을.

“처음부터 지금까지 제 온 마음을 바쳤던 단 한 사람은.”

제빌이 루비나드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품 안의 가느다란 몸이 파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어떤 기분일까. 어떤 감정일까.

모두 읽어 낼 수 있다면 좋으련만.

“…폐하. 세상 그 누구보다 오랫동안, 그 누구보다도 깊게 폐하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처음 만났던 그 순간부터 제 마음은 온전히 폐하의 것이었습니다. 설령, 폐하께서 가지신 적 없다고 말씀하시더라도.”

루비나드의 몸에서 느껴지던 떨림이 멈췄다.

그리고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보라색 눈동자가 물끄러미 청회색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 모든 마음의 주인은 여섯 살의 그날부터 언제나 폐하셨습니다.”

제빌의 고백이 모두 끝났다. 그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그녀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루비나드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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