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111)
제빌은 좀체 눈을 뜨지 못했다. 그동안 루비나드는 그가 해 왔던 일들을 모두 혼자서 떠맡아야만 했다.
어떻게 이걸 혼자서 다 해 온 걸까.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제빌의 일은 많았다.
일단 내궁의 일은 대부분 시종장과 시녀장에게 맡겼고, 임시로 보좌관을 여럿 뽑았다. 하지만 셋이 매달렸는데도 제빌이 하루에 검토하던 서류의 양 반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이래저래 루비나드도 일이 늘어 하루의 마무리는 언제나 늦은 밤이 되었다.
피곤에 지친 몸을 이끌고 침대보다 먼저 가는 곳은 언제나.
“제빌.”
그의 곁이었다.
벌써 일주일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제빌은 여전히 눈을 뜨지 못했다. 마법을 통해 상태를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꽤 뺨이 초췌해졌다. 이대로라면 분명 오래 버티지 못할 테지.
아무리 마법으로 유지하고 있다고는 해도 영양을 섭취하지 않고 인간의 몸은 그리 오래 버틸 수 없을 테니까.
“제빌.”
루비나드는 가만히 그의 손을 잡았다. 오늘도 여전히 그의 손은 차가웠다.
살이 빠져서 반지가 헐렁해졌다. 그런데도 여전히 약지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결혼반지가 어쩐지 안쓰러웠다. 그 위를 매만지던 루비나드가 그의 곁에 고개를 내리고 엎드렸다.
제빌의 향기가 옅게 코끝을 간질였다.
“제빌.”
불러도 불러도 대답해 주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런데도, 당장이라도 그가 일어나서 제게 대답해 줄 것 같아서 계속 부르게 된다. 아니, 그랬으면 하는 마음에 계속 부르게 된다.
이상한 일이야. 지금까지 나는 그대를 지키고 있는 줄 알았는데 되돌아보니 그대에게 지켜진 적이 더 많아. 어째서일까.
문득 열다섯 살의 사냥 대회가 떠올랐다.
-저하!
제빌의 목소리에 루비나드가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아직 미숙했던 그녀가 기척을 알아채지 못한 습격자가 있었다. 검은 복면을 쓴 남자의 움직임은 몹시도 빨라서 순간적으로 들고 있던 수노로 막아 내긴 했지만, 검조차 뽑을 수가 없었다.
다시 한 번 휘두르는 검을 수노로 막아 내는 순간 직감했다. 이 힘이면 분명 제 손이 버티지 못한다. 튕겨 내진다.
그러면 그다음엔 분명.
황태자인 론디아스의 곁에는 꽤 많은 호위가 붙어 있었지만, 루비나드에겐 아니었다. 애초에 호위를 붙이고 다닐 수 있는 성미도 아니었고. 그래서 뒤늦게 소란을 눈치챈 호위병이 달려오는 게 보였으나 시간에 맞출 순 없을 것 같았다.
아아,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 건가. 그렇게 생각했다.
제빌이 바로 근처에 있긴 했지만, 그는 자신보다도 무술이 약했다. 게다가 숙련된 몸놀림을 보아 못해도 기사급 이상의 실력자로 보였다. 지금의 루비나드가 대적할 수 없는 상대에게 제빌이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러니 제빌은 도망갈 터.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건 언제나 자신의 목숨인 법이니.
그러면 남는 것은 루비나드뿐이었다. 그녀 혼자 남으면 뒤는 뻔했다. 찬장 속의 장식물이 되어 썩어 죽을 줄 알았더니 이런 식으로 죽는 건가. 그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마지막 발버둥 정도는 쳐 봐야겠지.
루비나드는 두 손으로 꽉 잡고 있던 수노에서 한 손을 떼었다. 그리고 그녀가 낼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검집에 손을 가져갔다. 그녀가 검 손잡이에 손을 대는 순간 수노가 튕겨져 나갔다.
역시, 늦나. 루비나드가 이를 악물며 손잡이를 뽑아내는 순간.
-안 돼!
어느새 말을 부려 달려온 제빌이 습격자의 팔에 매달렸다. 그 한순간의 흔들림이 루비나드에게는 기회가 되었다. 검을 뽑아 습격자를 향해 휘두르자, 놈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제빌! 놔! 빨리 도망가!
여유가 생겼다. 잠시만 버티면 호위가 달려올 터. 루비나드는 이제 충분하다며 제빌을 불렀다.
하지만 제빌은 물러서지 않았다. 습격자의 팔을 꽉 잡은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급해진 놈은 제빌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제빌!
-으윽!
옆구리 약간 아래쪽을 깊게 베는 검의 움직임.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시간이 느리게 움직인다. 제빌이 쓰러지는 모습이 한없이 느리게 보였다. 자신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습격자의 움직임도 지나치게 느렸다. 그리고 그걸 막기 위해 검을 들어 올리는 제 팔도.
세상이 온통 느려졌다. 붉은 피만이 선연하게 그녀의 시야를 물들였다.
루비나드는 이를 악물었다.
-치유 마법사를 불러! 당장!
달려오는 호위에게 그렇게 소리친 루비나드가 허리를 깊게 숙였다. 힘으로는 밀린다. 그렇다면.
-윽!
루비나드는 짐승 쫓기용으로 허리춤에 매달아 두었던 후추 주머니를 놈의 얼굴에 던졌다. 기사라면 목숨이 사라져도 절대 하지 않을 비열한 수. 하지만 루비나드는 했다.
자신이 빨리 이 습격자를 제압하지 않으면, 호위는 루비나드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달려올 테니까.
제빌의 치료는 일분일초가 급했다.
-하앗!
루비나드는 평소 잘 지르지도 않는 기합까지 넣어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몸통을 베던 검이, 뼈에 걸려 잘 들어가지 않았다. 지금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는 게 명백했다. 루비나드는 억지로 검을 빼거나 휘두르는 대신 손잡이를 있는 힘껏 발로 차 버렸다.
습격자의 몸이 무너지고 달려오던 호위병의 모습이 보였다. 루비나드가 다시 소리쳤다.
-내 말이 들리지 않는가! 치유 마법사를 불러! 당장!
그제야 호위병은 쓰러진 습격자와 루비나드를 번갈아 보더니 제 뒤에 오는 동료에게 무언가를 소리쳤다. 그사이 루비나드는 제빌의 곁으로 달려갔다.
-제빌, 괜찮나? 제빌!
피가 너무 많이 났다.
웅덩이처럼 그의 몸 아래에 고여 있는 붉은 액체. 그 위에 창백하게 질린 채 눈을 감고 있는 제빌. 그 모습에 루비나드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리석은 짓이었다. 안 그래도 체격도 작으면서, 성인 남자에게 덤벼들다니. 상대와 자신의 실력 차이를 느끼지 못한 걸까? 영리한 줄 알았더니 어리석기 그지없는 짓을 한다.
루비나드의 목소리에 제빌이 겨우겨우 눈꺼풀을 열었다. 반도 채 열리지 않은 눈꺼풀 사이로 힘없이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동공이 루비나드를 향했다.
텅 비어 있던 눈동자가 그녀로 가득 찼다.
-저하, 무사하셔서….
바보 같은 남자.
그는 자신이 죽어 가는 상황에서도 루비나드의 무사에 안도하고 있었다. 기뻐하고 있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이 얼마나.
“제빌.”
이렇게 부르면 그때처럼 눈을 뜰 것 같았다. 그래서 포기하지도 못하고 계속 부르게 된다. 하지만 이번엔 쉬이 눈을 떠 주지 않았다.
이대로 그대가 떠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이대로 그대를 잃으면 나는….
그대에게서 받은 걸 어떻게 돌려줘야 하지?
그대가 준 게 너무 고마워서 나는 그대를 보내려 했는데. 그대에게서 받은 걸 갚으려 모든 지원도 해 주려 했는데. 그대가 내게 준 것들을 갚을 수 있기를 바랐는데.
아니, 아니다. 사실은 아니었다.
나는 견딜 수가 없었던 거야.
늦게 깨달은 사랑은 지독하게도 이기적이고 나만 알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대의 아내는 나인데, 그대의 여자는 내가 아니라는 걸 견딜 수가 없어서. 너무 마음이 아파서. 질투 나서. 슬퍼서. 그대의 아내라는 자리를 내려놓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제빌.
나는 그대에게서 받기만 하고 준 게 아무것도 없구나.
“눈을 떠 줘, 제빌.”
그대가 원하는 건 다 주도록 할게. 그대가 내게 목숨까지 준 것처럼, 나도 그대를 위해선 목숨까지도 줄게.
“그대를 위해서 성대한 결혼식을 열어 주도록 할까? 그대가 내 총애를 잃어서 이혼한 게 아니라, 내가 그대를 위해 놓아 주었다는 걸 모두가 알 수 있도록 해 줄게. 사실은 내가 매달렸던 거고 그대가 사랑하는 여자는 따로 있었던 거니까. 모두가 알 수 있도록 그렇게 해 줄게.”
루비나드가 그의 손을 꽉 쥐었다. 차디찬 손에 조금이라도 온기가 전해지도록. 조금이라도 빨리 그가 일어날 수 있도록.
“그대가 원한다면 부관의 자리에서도 내려갈 수 있도록 해 줄게.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말해 줘. 그대가 원하는 자리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 줄게. 그대가 하는 일은 믿을 수 있어. 지원도 많이 해 주도록 할게.”
점점 루비나드의 목소리에 울음이 섞였다.
“나는… 모르겠어. 그대는 언제나 나에게 맞춰 줘서, 나는 그대에 대한 건 아무것도 몰라. 그대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조차 잘 모르겠어. 그대가 뭘 원하는지도 모르겠어. 그대는 언제나 자신이 하고 싶은 건 말하지 않았으니까.”
뚝, 하고 뜨거운 액체가 제빌의 손 위로 떨어졌다.
그 액체가 주르륵 흘러 두 사람의 겹쳐진 손 사이로 흘러들었다.
“아니, 알려 하지 않았던 걸지도 몰라. 나는… 너무도 이기적이라 그대가 내게 맞춰 주는 것에 의문을 품지도 않았고 그대의 생각을 궁금해하지도 않았어.”
더 많이 물어봤으면 좋았을걸. 더 많이 그대를 봤다면 좋았을걸.
루비나드는 언제나 자신의 처지에 매몰되어 있었다. 가장 고귀하다는 황족으로 태어났지만, 결국은 결연의 도구일 뿐이라는 걸 알아서. 그런 자신이 가엾고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약자의 편이 아니었다. 자신이 약자였기에 그런 처지에 있는 이들을 보면 견딜 수가 없었던 것뿐이었다. 공정한 척하면서 사실은 그 누구보다 감정적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자신 외에 다른 이들을 생각하고 배려할 여유는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만을 보고 있었다.
제빌은 이토록이나 그녀를 봐 주고 있었는데.
“제빌. 제빌.”
사실은 그대에게 받은 걸 돌려주고 싶다는 것도 핑계다. 그저 그대를 보고 싶을 뿐이다.
그대가 이 무거운 눈꺼풀을 열고 눈을 떠서 날 봐 주었으면 좋겠다. 그 투명한 눈동자가 보고 싶다. 날 꽉 안아 주던 그 체온도, 그 손도 너무나 그립다. 이렇게 힘없이 늘어져 있는 그대가 아니라 다정한 그대가 보고 싶다.
그대가 웃는 모습이 보고 싶다.
“나는 그대가…, 그대를….”
후두둑, 후두둑.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어릴 때 이후로 그녀는 운 적이 없었다. 울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약자인 그녀였기에, 약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제빌의 앞에서 모든 가면을 다 내려놓은 그녀는.
“…울지… 마십시오, 폐하.”
그런 그녀의 귀에 꺼질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도 기다렸던 목소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