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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 (109)화 (110/115)

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110)

“커헉….”

제빌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그 무너지는 몸을 받아 드는 루비나드의 눈에, 제빌의 뒤에 서 있는 그리운 사람이 보였다.

아니, 이제는 아니었다.

그들을 향해 손을 내민 채 서 있는 건 루비나드가 마음을 허락했던, 저지른 죄에도 불구하고 루비나드가 마음을 끊지 못했던 안쓰럽고 그리운 혈족이 아니었다. 반역자였다.

“엔도르빌…!”

루비나드가 이를 갈았다. 그 목소리에도 엔도르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 얼굴에 엷은 미소마저 감돌았다.

생각 외의 사태. 눈앞이 밝아졌을 때 실패라는 건 이미 직감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엔도르빌의 목표는 반란이 아니었다. 저 거머리 같은 남자를 루비나드에게서 떼어 내는 것. 그것뿐이었다.

그런 그의 눈에 제빌의 등이 보였다. 무방비하게 자신을 향한 등.

마법 무효화 망토조차 입지 않은 등.

엔도르빌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대인 마법 중 가장 범위가 좁고 가장 파괴력이 높은 마법을 시전했다. 그 결과, 남자는 맥없이 쓰러졌다.

“루비나드, 그 남자를 넘겨주렴.”

숨통이 끊어진 걸 확인해야만 했다. 비록 그 등은 엔도르빌이 시전한 마법으로 인해 걸레짝이 되어 있었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엔도르빌이 알고 있는 이 남자는 지독할 정도로 끈질기고 음습한 남자였으니까.

루비나드는 차마 제빌의 등에 손을 올리지도 못하고, 그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귓가에 들리는 그의 숨소리가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공격력 높은 마법을 직통으로 맞았다. 당장 처치를 하지 않으면 위험한 상황이었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치유 마법사가 달려오고 있었기에 루비나드는 그를 곁눈질하곤 엔도르빌에게 말을 걸었다.

시간을 끌어야만 했다.

“감히 황제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반역자 주제에 태양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느냐.”

“…네게 상처를 입히고 싶진 않단다, 루비나드. 그러니 그 남자를 이리로 넘겨줘.”

보라색 시선이 마주친다.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어렸을 땐 그토록 사이가 좋았는데. 그토록 믿고 사랑했는데.

왜.

“넘기면 어쩔 생각이냐.”

“죽여야지.”

“대단하군. 국서 시해를 이토록 쉽게 말하다니. 아직도 네놈이 황태자인 줄 아는 것이냐.”

으득, 이를 간 루비나드가 제빌의 허리를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잦아드는 숨소리를 조금이라도 더 크게 듣기 위해서.

그가 아직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

그러는 사이 치유 마법사가 그녀의 곁에 도착했다. 루비나드는 조심스럽게 팔을 풀어 그에게 제빌을 맡겼다.

축 늘어진 몸. 창백한 얼굴. 거친 호흡.

그 얼굴에는 피 한 방울 튀지 않아 몰랐다. 다만 예감은 하고 있었다. 마법을 직통으로 맞은 등이 어찌 되었을지 정도는. 하지만 막상 눈으로 보자 저절로 이가 갈렸다. 온통 헤집어진 등은…, 너무나도 안쓰러워서.

화가 나서.

루비나드는 검을 뽑아 들었다.

“루비나드.”

“더러운 입으로 짐의 이름을 부르지 마라, 반역자.”

“너는 그 남자에게 속고 있는 거야.”

엔도르빌의 눈이 제빌에게로 향했다. 치료 마법이 시전되었지만 상처는 쉬이 아물지 않았다. 그렇겠지. 마나에도 급이 있는 법이니까. 엔도르빌은 다른 것은 몰라도 마법의 재능만큼은 뛰어난 남자였다.

저대로 두어도 제빌은 죽을 터. 그래서 엔도르빌은 루비나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어린 여동생의 눈을 틔워 주어야만 했다.

“누가? 네놈이?”

“저 남자가 네게 무슨 짓을 했는지는 알고 있니?”

제빌이 내게 한 것.

루비나드의 입가에 비웃음이 스몄다.

제빌은 언제나 그녀의 곁에 있어 주었다. 그녀에게 믿음을 주었다. 그녀를 믿어 주었다.

제빌은 그녀에게 친우이자, 부하이자, 남편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유일하게 사랑할 수 있었던 남자였다.

제빌은 그녀의 모든 것이었다.

“제빌은 짐에게 모든 것을 다 주었어. 모두가 다 떠나간 뒤에도 제빌만은 짐의 곁에 남았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느른한 목소리. 하지만 그 목소리에 담긴 감정은 결코 느른하지 않았다. 루비나드는 검을 들어 똑바로 엔도르빌을 겨누었다.

망설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의 안에 있던 다정하고 상냥한 오라버니는, 그녀를 향해 마법을 시전한 그 순간 사라졌다. 남은 것은 새까맣게 물든 추억과 반역자뿐이었다.

“반역자 엔도르빌 디 테비시안. 황제와 국서 시해 미수로 네놈을 즉결 처형하겠다.”

“제발 들어 줘, 루비나드. 그 남자가 내게 준 약은…!”

“반역자의 헛소리를 들을 귀 따위는 없다.”

루비나드는 더는 들어 줄 생각이 없다는 듯 몸을 날렸다. 엔도르빌 역시 몸을 단련하긴 했으나, 냉궁에 유폐되어 있는 동안에는 검을 손에 쥘 수 없었다. 그런 그가 계속 단련해 온 루비나드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애초에 이길 생각도 없었다.

“저하!”

베카르티가 엔도르빌을 지키기 위해 마법을 시전했다. 놀란 엔도르빌이 그 앞을 막아서기도 전에 루비나드가 망토를 들어 올려 무효화시켰다. 보라색 눈동자에 살기가 가득 찼다.

베카르티가 계속 방해할 것은 뻔했다. 하지만, 어차피 전쟁에서는.

“잘 가라, 반역자.”

엔도르빌은 움직이지 않았다. 반격은커녕 막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고요한 눈으로 루비나드를 바라볼 뿐이었다.

총명한 루비나드라면 분명 알아줄 것이라 생각했다. 제게 그녀를 해칠 생각은 없다는 것을. 하지만 그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루비나드는, 최근 몇 달간 계속된 사건으로 인해 그 마음이 완전히 굳어 버렸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 혈육도, 오랜 친우도. 어떤 관계였든,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다.

누구든 그 끝엔 그녀를 배신했다.

끊어 낼 수 없었던 것들을 하나둘씩 끊어 낼 수 있게 되었다. 루비나드는 엔도르빌의 무저항을 ‘헛된 수작’이라고 단정했다. 죽음만은 피해 보려 발버둥 치는 것이라고.

그리고 루비나드가 멈추는 순간 분명 그 손이 자신을 향할 것이라고.

“커헉…!”

그녀의 검은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제 오라버니의 심장을 꿰뚫었다. 짧은 단말마와,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뜬 눈. 그 어떤 것도 루비나드의 마음을 흔들지 못했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오라비의, 아니, 반역자의 죽음을 배웅했다.

* * *

-폐하, 드려야만 하는 보고가 있습니다.

제빌이 그렇게 말했을 때, 루비나드는 직감했다.

제 눈을 보지 않는 청회색 눈동자. 꼭 깨문 입술. 파르르 떨리는 손.

무언가를 보고한다고 말하면서 그토록 말을 꺼내기 어려워하는 제빌은 처음 보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게 엔도르빌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쯤은.

-오라버니에 대한 건가?

어떻게 알았냐는 듯 제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변화에 루비나드가 피식 웃었다. 저 제빌도 모르는 일이 있긴 하구나. 하긴, 비밀리에 궁 밖의 사람을 사용해 알아낸 정보니 제빌이 파악하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제빌은 가만히 눈을 내리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알고 계셨군요.

이상한 일이었다.

오라버니의 배신은 분명 루비나드의 마음에 여파를 남겼었다. 씁쓸함과 안타까움이 섞인 여파를. 하지만 그보다도 더 신경이 쓰이는 것은 내리뜬 눈동자에 스민 감정들이었다.

안도, 아쉬움, 자책 같은.

풍성하고 긴 속눈썹에 맺힌 햇빛도 그녀의 눈을 사로잡았다.

-자세한 건 보고서를 확인해 주십시오.

-…생각보다 많은 귀족이 얽혔군.

평소 루비나드의 앞에서는 굽신거리며 아부를 떨던 이들의 이름이 꽤 많이 올라 있었다. 하긴, 그들이 누리던 특혜를 철저한 감시하에 막아 버렸으니 불만을 품을 만도 했다. 귀족들이란 원래 그런 법이니까.

담담하게 보고서를 확인하던 루비나드의 손이 흠칫 멈췄다.

보르본가까지 얽힌 건가. 제게 사랑을 고백하던 커드닐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러곤 이내 피식 웃었다.

무얼 바란 건가.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이들 중 제대로 된 이가 하나라도 있었던가. 처음부터 그럴 목적으로 다가온 건지도 모른다. 사랑을 제대로 모르는 루비나드의 눈을 속이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겠지.

그 애절함이 거짓이었다는 게 조금 속이 쓰리긴 했지만, 그렇게 큰 타격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루비나드가 보고서를 넘겼다.

-네. 반역에 이름을 올린 것이니 가문을 유지하게 두어선 안 될 것이라 사료됩니다.

-나도 동감이야.

썩어 버린 꽃은 뿌리를 뽑아내야만 한다. 그러지 않으면 주변에 다른 식물까지도 썩게 만든다. 다시 한 장, 보고서를 넘기자 거기에는 귀족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다.

-얽힌 귀족들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자들을 추려 보았습니다.

-신흥 귀족들이 많군.

-젊은 귀족 중 평소에 폐하의 정책을 지지하는 발언을 많이 하던 이들로 추렸습니다. 물론 능력도 보장된 이들입니다.

-귀족도 혈연과 아부로 자리를 유지하는 시대는 끝내야 하지. 황족도 귀족도 모두 능력을 증명해야만 해. 그런 의미에서 이 반란은 오히려 잘된 건지도 모르지.

설령 황가의 혈족이라고 해도 반란을 일으키면 처벌당한다. 루비나드는 국외 추방 이상을 생각하고 있었다. 여차하면 사형까지.

“차라리 그때 빨리 잡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썩은 뿌리의 잔뿌리까지 찾아내기 위해 일부러 행동할 때까지 기다렸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합류할 이들까지 뿌리 뽑으려고.

그게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이야.

“…제빌….”

상처는 모두 아물었다고 했다.

하지만 살아날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고 했다.

치유 마법이라는 건, 쉽게 말하면 몸에 있는 자체 회복 기능을 극한까지 활성화해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잃은 피가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상처를 입었을 때의 쇼크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숨이 붙어 있는 게 기적이라고도 했다.

“제빌.”

불러도 대답하지 않는다.

침대에 누워 그저 창백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이 남자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감싼 것일까.

루비나드는 마법 무효화 망토를 입고 있었고, 자신은 맨몸이었는데.

-최소한 제게는, 그 누구도 폐하의 자리를….

그 뒤에 이어질 말은 무엇이었을까. 그대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내 곁에 있었던 걸까.

모든 걸 버리고 그대가 얻으려던 게 뭘까. 아니, 얻을 게 있긴 했을까.

살아가는 건 인간의 본능이었다. 아무리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해도, 그들 모두 죽음의 앞에서는 살고자 발버둥 쳤다. 그 본능을 거스르고 제빌은 루비나드를 지켰다.

“대체 왜.”

죽으면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그대는 왜 날 지키려 했을까.

제 목숨까지 던지면서.

-폐하께 버림받으면 완전히 망가질 테니까요.

그대는 내게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 그런 것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살아 있어야 버림받아도 버림받을 것 아닌가. 총명한 남자가, 맨몸으로 공격 마법을 맞으면 어찌 될지 모를 리가 없었다.

알 수가 없다.

그녀가 대답을 내리지 못하는 문제에 언제나 조언을 해 준 건 제빌이었다. 하지만 그 제빌이 누워 있어서야 그 누구도 그녀에게 조언해 줄 수가 없었다.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어서 일어나, 제빌.”

루비나드는 그의 손을 잡았다. 언제나 뜨겁던 손이 너무나 차가웠다.

“그리고 내게 말해 줘.”

그대가 뭘 원하는 건지.

뭘 생각한 건지.

내가 그대에게 어떤 존재인지.

“제발 부탁이야.”

언제나 당당하고 오만하던 여제의 가면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리고 드러난 그녀의 맨얼굴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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