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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 (108)화 (109/115)

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109)

포탈 앞에 선 엔도르빌이, 하늘색 빛이 회오리치는 거대한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물류 이송에도 사용하기에 대형 마차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랗게 만들어진 문. 자신이라면 분명 이런 걸 만들 생각조차 못 했겠지.

언제나 그랬다. 루비나드는 사고가 유연해서 새롭고 낯선 것이라도 쉬이 받아들이곤 했다. 일견 불가능해 보이는 것에도 진심으로 덤벼들 수 있었다.

자신이라면 로간 제국을 이렇게 안정시킬 수 있었을까?

아마, 불가능했겠지. 엔도르빌은 도전을 두려워하는 성미이니까.

“저하.”

“…음?”

“망설이지 마십시오. 이미 늦었습니다.”

그렇다. 이미 모든 것이 늦었다.

소위 마지노선이라고 하던가. 되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선은 이미 넘었다. 남은 것은 오로지 전진뿐. 알면서도 사람이라는 것은 후회하기 마련이었다.

언제나.

“만약 내가…, 그 남자의 계략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했네.”

엔도르빌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 남자의 생각은 대략 알 것 같았다. 이해 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주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루비나드가 보아 왔던 사랑과 집착이 만들어 낸 광기들을 엔도르빌도 보아 왔으니까.

그 남자 역시 그냥 사랑과 집착에 침잠한 어리석은 이들 중 하나일 뿐이겠지.

하지만 그게 결과적으로는 루비나드를 살렸다. 결혼의 도구나 찬장 속의 장식물로 살아가는 것보다 지금이 루비나드에겐 더 잘 어울렸다. 그녀는 열의로 가득 차 있었고 예전과 달리 생기발랄했다.

제가 그냥 장사 도구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 사라졌던 그 생생함.

그걸 되살려 준 것 역시 그 남자였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루비나드는 황제라는 자리에 맞지 않았다. 그 여리고 사랑스러운 아이가 그 자리에서 얼마나 상처받고 있을지.

한 나라의 수장이라는 것은 언제나 욕을 먹기 마련이었다. 제국민들을 위한 정책을 펴면 귀족들이 욕을 하고, 귀족들을 위한 정책을 펴면 제국민들이 욕을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욕을 먹고 무언가를 해도 욕을 먹는다.

그런 자리에서 루비나드가 오래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 힘들었다.

차라리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올라 루비나드를 부관으로 삼는 것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책임은 자신이 지고, 루비나드는 마음껏 활개를 칠 수 있게. 하지만 그것 역시 이룰 수 없게 되었다.

“뭘 생각해도 이미 늦었지. 알고 있어.”

차라리 계속 광증에 휩싸여 있었다면 좋았을지도 모른다. 그게 모두를 위한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 역시 이미 마지노선을 지나 버렸다.

“가지.”

이 문을 지나면 황궁의 외벽을 곧바로 지나칠 수 있다. 내궁까지는 거리가 조금 있지만, 외벽을 뚫지 않아도 된다는 건 커다란 이점이었다. 바깥에서 마탑의 마법사들이 외벽을 공격하며 혼란을 주면 엔도르빌과 정예병들이 내궁을 차지할 생각이었다.

엔도르빌은 이를 악물고 결의를 다졌다. 지금 이것이, 그가 뒤로 돌아갈 수 있는 진짜 마지노선이라는 것조차 알지 못하고.

* * *

“왔군.”

임시 포탈의 문이 파르라니 빛났다. 기존의 포탈보다 작긴 했지만, 문제없이 병사들이 이동되는 게 보였다. 루비나드는 정렬한 친위대의 선두에 서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여기는 내궁 옆이 아니지 않은가!”

“여긴 어디야, 대체?!”

혼란에 빠진 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루비나드는 한 점의 온기도 없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다 그 입가에 오만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그렸다.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자마자 오느라 여전히 상복 차림이었지만, 그 기백은 황제의 제복을 입었을 때만큼이나 강렬했다.

“오느라 고생했군, 제2 황자의 병사들이여.”

위압감 가득한 목소리가 그들의 귀에 울렸다. 놀란 그들이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십 명 남짓한 친위대의 앞에 그들이 목표한 자가 있었다.

포탈의 가동으로 인해 불어 온 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리는 적발. 푸른빛에 잠겨 형형하게 빛나는 보라색 눈동자. 놀랄 만큼 뛰어난 미모인데도 불구하고 그걸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을 압박해 오는 위압감.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제복으로 휘감은 그 모습은 마치 사신 같기도 했다.

“환영하도록 하지.”

루비나드가 손을 들었다. 친위대가 일사불란하게 허리춤의 검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그녀의 손이 앞을 향하자, 그들의 검집에서 검이 빠져나왔다.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대열을 정비해!”

“전투에 대비하라!”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해! 포탈을 통해 아군이 계속 들어와야 한다!”

“들어오는 아군에게 상황을 전달해야 해!”

우웅, 하고 포탈이 다시 푸르게 빛났다.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으면 전송 사고가 일어나거나 아군끼리 뒤섞일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되면 아주 난감한 상황이 생긴다.

그들은 자리를 벗어나 친위대를 향해 내달렸다.

“폐하.”

제빌이 루비나드를 끌어당겼다. 이런 상황이 되었지만, 친족 살해만큼은 스스로의 손으로 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붙어 있어야만 그 남자가.

루비나드는 순순히 제빌의 손에 이끌려 뒤로 물러났다.

친위대는 루비나드의 경호를 하는 인원을 제외하면 종일 훈련과 대련을 하는 이들이었다. 이번 전쟁에서도 그녀의 바로 옆에서 대활약을 펼쳤던 이들이라 걱정되진 않았다.

다만 걱정은.

“마탑은.”

“이미 점령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법사들이 개입하면 곤란해진다. 일단 마법 무효화 망토를 모두가 착용하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고화력이나 대규모 공격 마법이 시전되면 완전히 다 막아 낼 순 없기 때문이었다.

“그대가 마탑에도 연이 있을 줄은 몰랐어.”

“마탑에서 사용되는 특수작물 대부분을 쿠온가에서 지원하고 있으니까요.”

물론 그뿐만은 아니었다.

제빌은 일찍부터 마법사들의 가능성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당시엔 비록 그들의 능력을 공격 마법에만 사용하고 있었지만, 마법석이란 도구를 통해 그 쓸모가 무궁무진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제빌은 미리 여러 경로를 통해 사람을 심어 두었다. 그리고 회유할 수 있는 인물을 모두 회유해 두었다.

마법사란 참 재미있는 족속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이상도 사상도 없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오로지 연구와 실험을 위한 예산과 물품뿐. 그걸 제공해 주는 이는 그들에게 있어서 생명의 은인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긴, 그렇겠지. 황태자 외의 황족이 결혼을 위한 도구라면, 마법사들은 전쟁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그들에게 지원되는 건 오로지 공격 마법을 위한 자원뿐. 그 외에 다른 연구는 어디까지나 그들이 자비를 내고 해야만 했다.

그들을 회유하는 것이야 쉬운 일이었다. 지금의 쿠온가의 재력은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어졌으니까.

“폐하. 망토는 어쩌셨습니까.”

“…그러게.”

루비나드가 제 어깨를 보았다. 망토가 있긴 했지만, 마법 무효화가 부여되지 않은 평범한 망토였다. 아마 옷 시중을 드는 시녀가 미리 준비된 망토 대신 다른 걸 가져온 모양이었다.

“일단 제 걸 걸치시지요.”

“됐어. 그걸 나한테 주면 그대는 어쩌려고.”

“만약의 경우 저는 죽어도 문제가 없지만, 폐하께 무슨 일이 있으면 곤란해집니다.”

마치 제 목숨을 물건처럼 생각하는 듯한 말투였다. 루비나드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하지만 이내 씁쓸한 미소가 스몄다.

그렇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남자이기에 사랑하는 여자도 두고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리라. 왜 그녀와 결혼하지 않고 계속 혼자였는지 확신은 못 하겠지만….

그것 역시 짐작 가는 바가 없는 건 아니었다.

-지금 제 앞에 놓인 서류의 양을 보고도 왜냐고 물으십니까? 제가 연애나 결혼을 하기 원하신다면 일단 업무부터 줄여 주십시오.

갑작스럽게 황태녀가 되고, 또 황제가 된 루비나드를 혼자 둘 수 없었던 거겠지. 그렇게 어물거리는 사이 이렇게 시간이 지나 버린 것일 터.

귀족 영애로서는 지나치게 나이를 먹었다. 따로 알아본 바에 따르면 릴리트는 여전히 혼자라고 했다. 아마 제빌을 기다린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더는 제빌을 잡아 둘 수도 없었다.

“그대에게 일이 생기면 곤란해질 사람이 있지 않나.”

“네?”

“나에게는 아무도 없어. 그러니 괜찮아.”

그녀가 죽으면 제4 황자가 황위를 이어받으면 된다.

지고의 자리에 올랐지만, 여전히 그녀를 대체할 수 있는 이는 얼마든지 있었다. 비록 제4 황자는 정비의 태생은 아니지만, 성미가 소심하고 얌전한 데다 셈이 꽤 빠른 남자라 별다른 문제 없이 나라를 운영해 갈 수 있을 터.

차라리 그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제빌은 루비나드가 황제의 자리에 있는 한 계속 그녀를 도우려 할 테니까.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제빌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검과 검이 뒤엉키고 사람과 사람이 뒤엉키는 소리가 소란스러웠다. 그 전투의 한가운데서 왜 그 낮고 작은 목소리가 이토록 명료하게 들리는 것일까. 루비나드는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제빌의 투명한 눈동자가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분노, 의아함, 자책. 그런 감정. 루비나드는 그 눈을 피하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피할 수가 없었다.

“폐하께 무슨 일이 생기면 모두가 곤란해집니다.”

“내가 죽으면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어.”

“폐하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제빌이 억눌린 소리를 내뱉으며 제 망토를 거칠게 벗었다. 그리고 끌어안듯 루비나드의 앞에 서서 망토를 둘러 주었다.

사랑이란 참으로 웃긴 것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괴감에 빠져 있었다. 지금도 바로 옆에서 사람이 죽어 가고 있다. 조금 있으면 제 혈육을 제 손으로 해하여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의 품에 안긴 것만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설레었다.

이 얼마나 눈먼 감정인지.

이 얼마나 이기적인 감정인지.

이 얼마나….

“제빌 경.”

루비나드는 그를 막고 싶었다. 더는 설레게 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빠르게.

“최소한 제게는, 그 누구도 폐하의 자리를…. ……!”

순식간이었다.

제빌이 그녀를 끌어안은 것은.

그리고, 루비나드가 설렘이라는 것을 느끼기도 전에 그 뒤에서.

“제빌!”

무언가가 터진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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