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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 (103)화 (104/115)

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104)

루비나드가 눈썹을 찡그렸다.

이렇게 기분 나쁜 기상은 오랜만이었다. 지난번보다 어떤 의미에서는 더 머리가 울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건 물론이고 식도가 탈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으, 음….”

루비나드가 인상을 찌푸리자 이번에도 뜨거운 손이 그녀의 이마를 짚어 주었다. 가라앉는 울렁거림에 루비나드가 사르르 눈을 열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폐하.”

“…으, 응….”

루비나드가 잔뜩 잠긴 목소리로 대답하자 제빌이 엷게 웃었다. 그러고는 몸을 일으켜 아이스 버킷에 담겨 있던 물을 꺼내 잔에 따랐다. 투명한 잔을 가득 채우는 투명한 액체에 어젯밤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어제, 자신은.

어제, 그녀는.

붉어지려는 얼굴을 겨우 가라앉힌 제빌이 루비나드에게 잔을 내밀었다.

“꿀물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아니, 괜찮아. 속이 메슥거려. 꿀물을 먹으면 토할 것 같아.”

“도수가 낮은데 숙취는 더 오는 모양이군요.”

“으으.”

도수가 약한 술이라고 방심해서 들이부은 탓이지만, 술에 약한 두 사람이 그걸 알 리 없었다. 루비나드는 물을 들이켜고 끙끙 앓는 소리를 내더니 다시 침대 위에 널브러졌다.

몸이 무거웠다. 아니, 머리가 무거운 건가? 가늠이 제대로 되지 않을 정도로 속이 울렁거렸다.

“많이 힘드십니까?”

“으…, 조금.”

“오전 일정은 취소할까요?”

“…아니, 괜찮아.”

“아, 후….”

“식사하셔야죠.”

“으응….”

어제 그렇게 자책해 놓고 오늘 또 같은 짓을 할 순 없었다. 아버지가 보시면 얼마나 한심해 하실까. 그렇게 생각하자 억지로긴 하지만,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일어나긴 했지만, 좀체 정신이 들지 않는 듯 루비나드가 머리를 싸쥐었다. 멍하니 앉아 있는 모습이 귀여워서 잠시 더 바라보다가, 제빌은 그녀의 곁에 가 앉았다.

“속이 쓰리십니까?”

“응….”

“따스한 수프를 드시면 좀 나아지실 겁니다. 자극적이지 않게 준비하도록 일러 두었습니다.”

루비나드가 문득 고개를 들어 제빌을 보았다.

그는 평소와 별로 다를 것 없는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아마 루비나드의 행동이 술에 취해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겠지. 아니, 분명 술이 없었다면 하지 않았을 행동이긴 했다.

그래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저가 어떤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했는지도.

“제빌.”

“네.”

아직 잠이 덜 깨셨구나.

경이라는 칭호를 붙이지 않는 그녀의 말에 제빌이 쓴웃음을 지었다. 톡, 하고 그녀의 등에 손을 올려 살살 쓸어 주자 루비나드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술 취해서 한 게 아니니까 말이야.”

“…네?”

무슨 의미로 하시는 말이지?

혼란스러워하는 제빌의 표정이 만족스러운 듯 루비나드가 생글거렸다. 무겁게 머리를 짓누르던 통증이 조금 가시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이미 스스로의 마음을 인정했다. 인정한 이상 번복할 마음은 없었다. 그런 무의미한 짓을 하면서 시간이나 감정을 낭비할 이유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제 마음을 제빌에게 강요할 생각도 없었다.

그러니까, 제빌. 알아줘.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를.

술에 취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 입술을 탐해 보고 싶어서 닿았던 거라는 걸. 그녀는 이미 그를.

“그냥 그렇다고.”

루비나드는 씩 웃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등을 쓸어 주고 있던 제빌의 손이 허공에 홀로 버려졌다. 문을 나서는 루비나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제빌이, 제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술 취해서 한 게 아니라고? 뭘?

설마…, 어젯밤의 그 입맞춤 말씀하신 건가? 술에 취해서 하신 게 아니라면 대체 왜….

제빌의 안에, 루비나드가 그를 탐했다는 답안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유일한 답을 제외하고 계속해서 생각을 해 봤자 답은 나오지 않는다. 결국, 제빌은 루비나드가 씻고 올 때까지 한참이나 침대 위에 앉아 끙끙거리고 있어야만 했다.

* * *

엔도르빌은 안락의자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솔라탄은 무인 지대인 데다가 몹시도 추운 곳이었다. 그래서 겨울에는 몹시 괴롭지만, 여름은 꽤 시원했다. 이제 슬슬 꺾이려 하는 더위 속에서 돌로 만든 성의 차가운 냉기가 그의 발을 시원하게 감쌌다.

이곳에서 지내는 나날은 나쁘지 않았다. 가끔 머릿속에 울리는 환청과 눈을 어지럽히는 환각을 제외한다면.

거기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베카르티의 덕분이었다.

-…잠시만요, 저하.

피어오르는 향이 묘했다. 그의 고향인 베카르티 백작령에는, 소위 ‘유령을 보게 해 주는 풀’이라는 이명을 지닌 풀이 있었다.

딜로나.

그 풀에는 특유의 향기가 있어서 베카르티 공작령의 아이들은 모두 교육을 받는다. 이 냄새가 나는 음식은 절대로 먹어선 안 된다고. 무언가가 썩은 것 같기도 하고 문드러진 것 같기도 한데, 그 어떤 곳에서도 맡아 본 적 없는 기묘한 냄새.

몇몇 어른들은 그 냄새를 시체 썩는 냄새라고 표현하기도 했었다.

어린 베카르티는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알고 있다. 틀림없이, 시중드는 자가 약이라며 가져온 차에서 딜로나의 향이 나고 있었다.

…시체 썩는 냄새가.

-이건 드시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그건 곤란하네, 베카르티. 또 증상이 악화되면 곤란하니 말이야.

-저를 믿고 일주일만 드시지 마십시오. 그 후에도 변화가 없다면 아마 제가 너무 깊게 생각한 것일 테니.

베카르티는 언제나 진중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허투루 말을 할 리가 없었다. 분명 오해일 테지. 이 약을 지어 보내는 건 언제나….

그러니까 그 오해를 풀 수 있도록 약을 잠시 마시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약을 먹지 않았는데 도리어 환각이 줄었다. 아니, 환각뿐만 아니라 환청도 줄어들었다. 처음 며칠은 계속되다가 일주일이 지나서는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베카르티는 짐짓 심각한 얼굴을 하더니, 미리 준비해 둔 작은 병 속의 물을 단숨에 마셨다. 그리고 그 병에 엔도르빌의 약을 담아 갔다.

그리고 며칠 후.

-…저하. 이 약은 누가 보내는 겁니까? 혹시 폐하입니까?

-아니. 이건….

베카르티와 엔도르빌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결론지었다.

아니, 결론지을 수밖에 없었다. 제빌과 루비나드의 결혼 소식을 들은 후 그 심증은 더욱 굳어졌다.

“후….”

그 후로 준비를 계속해 왔다. 여러모로 귀찮은 일들이 있긴 했지만 이제 마무리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이 가까워져 온다. 목표를 이룰 날이.

목표는 그 남자. 루비나드를 상처 입힐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분명 그 여리고 사랑스러운 여동생은 상처 입을 테지.

“루비나드….”

어릴 때부터 그랬다.

여동생은 머리가 좋은 것에 비해 마음이 너무 여렸다.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다. 사람에게는 겉과 속이 다른 이들이 많다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의 주위에는 온통 그런 사람들뿐이었는데.

그런 그녀가 안타까워 자주 위로했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황족이라는 틀 속에서 괴로워했었지.

그런 그녀가 황제가 되었다. 일개 황족이 가져야 할 책임감과 의무와는 차원이 다른 중책을 짊어진 그녀가 얼마나 괴로워할지. 그 남자는 알고 있을까. 루비나드를 그 자리에 앉힌 탓에 그녀가 얼마나 상처 입을지를.

“네게서 그 남자를 떼어 놔야만….”

루비나드가 이 이상 상처 입는 건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을 서둘러야만 하는 이유도 있었다.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어쩌면.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엔도르빌의 귀에 누군가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그 남자의 수족은 이제 이 성에 하나도 남지 않았다. 모두 제 사람이었기에 두려워할 일은 없었다. 다만, 누군가가 뛰는 경우가 거의 없어 의아했을 뿐.

이윽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커드닐인가. 엔도르빌은 눈을 떴다.

이제 헛것이 보이지 않게 된 시야에 차가운 돌성의 벽이 들어왔다.

이 어둡고 칙칙한 곳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그리고 평화로웠다. 사실대로 말하면 엔도르빌은 이 공간이 꽤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루비나드가, 그 여린 아이가 발버둥 치고 있는 이상 자신도 의무에서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들어오게.”

그러니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야지.

그게 설령 내 여동생을 배신하는 일이 될지라도. 보라색 눈동자가 서글픈 빛을 띠었다.

* * *

“사냥 대회를 당기자고?”

뜬금없는 건의에 루비나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제빌은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게 조심하며 손안의 서류에만 시선을 주었다.

“네.”

“왜?”

“마르키 후작가에서 온 건의입니다. 이번에 진귀한 동물을 손에 넣었는데, 사냥 대회의 사냥감으로 제공하고 싶다고 합니다. 다만 이 생물이 예민한 편이라 최대한 빨리 사냥 대회를 열고 싶다고.”

“한 해의 풍요를 기원하면서 여는 것이 사냥 대회이기도 하네. 그런 이유라면 굳이 당길 필요는 없겠지.”

루비나드가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평소라면 순순히 물러났을 제빌이, 어째서인지 물러서지 않았다. 물론 여전히 시선은 서류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저도 당기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네. 애초에 이제 그리 기한이 남지도 않았어. 보통 10월 초순에 여니까 말이야. 한 달 남짓을 기다리는 게 그리 어렵단 말인가.”

“전쟁 이후 폐하의 위상이 드높아졌습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최근 폐하께서 외부 활동을 피하시는 이유가 전장에서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라는 유언비어가 돌고 있습니다. 혹은 뭔가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니겠냐고.”

“…하, 그네들의 입방아는 질리지도 않나 보군. 빌어먹을 놈들.”

“폐하.”

제빌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루비나드를 보았다. 그런 단어는 쓰지 마시라고 말하려던 그의 입술이 딱딱하게 굳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보라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한참 허공을 헤매던 청회색 눈동자가 겨우 종이 위에서 안정을 찾았다.

“왜.”

“그, 크흠.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하간 폐하께서 건재하시다는 걸 보여 주실 필요도 있습니다. 그 전쟁에서 로간 제국이 받은 피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역시 보여 줄 수 있을 테지요.”

“그런 허세 부릴 이유가 무어란 말이야. 많은 사람이 죽었어. 피해가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지.”

제빌에게 있어서 그들의 목숨은 파리 목숨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사실 루비나드의 말에는 공감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느끼고 있을 책임감과 심란함만큼은 목소리에서 읽어 낼 수 있었다.

제빌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지 않게 조심하며 종이를 내밀었다.

“폐하의 마음은 헤아릴 수 있지만…. 가끔은 허세도 필요한 것입니다. 주변국들은 로간 제국이 어느 정도의 피해를 입었는지 궁금해할 테지요. 이런 시기에 진수를 손에 넣었다는 이유로 사냥 대회를 여는 걸 보면 코웃음을 치면서도 우리의 건재에 혀를 내두를 것입니다. 최소한 쉽게 보진 못하겠지요.”

왕국 하나와의 전쟁은 제국에게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한다. 하지만 상대는 이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루비나드가 보여 주려던 본보기를 좀 더 강화하자는 건가.

“…하. 그럼 언제로 당기자는 건가.”

“지금부터 사냥터를 정비해도 일주일은 걸리겠지요. 여유 있게 열흘 후로 잡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흠…. 일단, 알았네. 그대의 뜻이 그러하다면 나도 믿도록 하지.”

다행히 생각보다 루비나드의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제빌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꾸벅 그녀에게 묵례했다. 자리로 돌아가려 뒤를 도는 그를, 루비나드의 목소리가 멈춰 세웠다.

“그런데, 제빌 경.”

“네?”

휙 뒤를 돌았다. 바로 창밖이나 다른 곳으로 시선을 주려 했는데, 마치 빨려 들듯 루비나드의 얼굴로 시선이 향했다. 빛을 등진 보라색 눈동자가 그림자 속에서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바르게 앉아 있던 루비나드가 비딱하게 다리를 꼬더니 턱을 괴며 입을 열었다.

“그대 말이야.”

“네.”

“나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

제빌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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