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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 (101)화 (102/115)

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102)

아슬아슬하게 국상이 열리는 사태는 피했다.

하지만 당분간 면회 금지가 선언되었다. 루비나드는 여유가 될 때마다 제 아비의 방 앞에 가서 한없이 서 있곤 했다.

그 시간을 늘려 주기 위해 제빌은 제 몸을 깎아 일했다. 내궁의 일은 시녀장과 시종장에게 대부분 위임하고, 마지막 확인만 자신이 했다. 그것만 해도 일의 양이 적지 않은데 루비나드의 일까지 맡아 하다 보니 정말로 숨 쉴 틈이 없었다.

하지만, 이게 마지막이다. 루비나드가 상실을 겪을 일은.

그러니 루비나드가 충분히 그 상실을 겪을 수 있게 해 주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제빌은 문득 쓴웃음을 흘렸다.

“이 얼마나.”

잔혹한 사람인지, 나는.

루비나드의 마음이 입을 상처 때문에 상실을 겪길 바라는 게 아니다. 루비나드가, 제빌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현재 마음을 허락하고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람의 상실이 그녀의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입히길 바랐다.

그래야 그녀가 자신을 잃는 걸 두려워하게 될 테니까.

더 많이, 더 크게.

더럽고 잔혹하고 음습하다. 그 마음에 있는 욕망이 너무 질척여서 손을 뻗기도 두려울 정도로. 그 밑바닥에 있는 건 대체 무엇일까. 제빌 스스로에게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루비나드의 마음이 상처받는 건 두렵다. 마음이 아프다. 죄책감이 치솟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설령 그 모든 죄를 자신이 짊어지고 가야 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녀의 곁에 자신 하나만 남는다면.

그녀가 자신 하나만 보게 된다면.

“…비겁한 겁쟁이.”

자신은 다프넬처럼, 커드닐처럼, 에브니겔처럼 할 수 없다.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직접 할 수도 없고 당신만을 바라보고 있노라 고백할 수도 없었다. 잃을지도 모르는 게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더 그랬다.

제 아비를 꼭 닮았다. 뒤에서밖에 움직이지 못하는 더럽고 치졸한.

앞에 놓인 서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제빌이 다시 페이지를 빠르게 넘겼다. 늪 아래로 가라앉으면 가라앉을수록 떠오르기 힘들어진다. 그러면 점점 더 루비나드에게서 멀어질 뿐.

자책할 시간조차 자신에게는 사치였다.

“…….”

제빌은 흘긋 창밖을 보았다. 이제 슬슬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밤이 되면 루비나드를 또 볼 수 있다. 그녀를 품에 안고 위로해 줄 수 있다. 그러려면.

“빨리 끝내야지.”

제빌은 머리에서 잡생각을 모두 지웠다. 그리고 텅 빈 머리로 서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 * *

“후.”

방에 들어선 루비나드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꽤 시간이 늦어서 이미 제빌은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피곤해 보이시는군요.”

침구 안에서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던 제빌이 상체를 일으켜 침대 밖으로 나왔다. 루비나드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엷게 웃었다.

“조금.”

그 눈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보였다. 어느 정도 망가질 수도 있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까지일 줄이야. 루비나드의 안에서 데거베일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큰지를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래서 제빌은.

“선황 폐하께서는….”

“안정되고 계신다고는 하는데…. 발작이 다시 일어나면 이젠 일어나지 못하실지도 모른다고 하더군.”

“그렇습니까.”

다행이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으니까.

제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탁자로 다가갔다. 최근 항상 구비해 놓는 아이스 버킷 안의 병을 꺼내 잔에 따르자, 루비나드가 자연스럽게 탁자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네?”

“…아니야.”

밤마다 한잔하자던 제빌은, 그 이후로 다시는 루비나드에게 술을 가져오지 않았다. 그렇게 열성적으로 설득해 놓고 왜 그러나 싶었는데.

오늘도 잔을 받아 들고 킁, 냄새를 맡아 보자 술 냄새는 나지 않았다. 다만 은은하고 달콤한 포도의 향기가 났다. 색은 이상할 정도로 투명한데. 고개를 갸웃한 루비나드가 입을 열었다.

“주스인가?”

“아니요. 화이트 와인입니다.”

“호오.”

마시지 않겠다고 하려나.

그렇게 말하면 다른 음료를 대기시켜 두었으니, 그걸 가져오게 할 생각이었다. 다만 지금의 루비나드는 어쩐지 마시겠다고 할 것 같기도 했다.

“화이트 와인이라고 해도 알코올 냄새가 꽤 났던 걸로 기억하는데.”

“최근 양조장에서 시도하고 있는 사업 중 하나입니다. 술에 약한 사람들도 가볍게 반주를 즐기게 할 수 있도록 낮은 도수의 술을 만들기 위해 진력하고 있다더군요.”

“그게 가능하다니. 재미있어.”

루비나드는 몇 번 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살짝 잔을 제 입술에 가져갔다.

잔을 따라 움직이던 제빌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루비나드의 입술에 닿았다.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보던 그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투명한 액체가 붉은 입술 위를 살며시 적시며 흘러 들어가는 모습이 너무 자극적이었다.

“신기하군. 술을 먹었다는 느낌이 거의 안 나는데. 평소보다 조금 더 산뜻한 포도 주스를 마신 느낌이야.”

“성공적이군요. 얼마 지나지 않아 상업화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개발에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양조업자들과 마법사들이 달라붙어 시도했는데도 난항을 겪었다. 그래도 겨우 루비나드의 앞에 올릴 만한 술이 완성되어 오늘 가져온 참이었다.

사실은 조금 망설였다. 그녀의 약한 부분을 파고드는 게 아닐까 싶어서.

그래서 그녀에게 선택권을 준 것이었다.

만약 그녀가 자신에게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면 마시지 않으리라. 하지만, 마신 후에는 아마도 술을 핑계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아 주지 않을까. 자신을 신뢰하고 속내를 말해 주지 않을까.

평소보다도 더 여러 가지를.

그런 생각에 올린 참이었다.

“으음, 확실히 술은 술이군. 머리가 어지러운데.”

흐음, 하고 인상을 찌푸린 루비나드가 탁자 위에 잔을 놓았다. 그래도 맛이 나쁘지 않았는지 깨끗이 비워진 잔에 제빌이 엷게 웃었다.

“이 정도라면 술에 익숙해지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설마 그거 때문에 개발한 술은 아니겠지?”

“설마요. 그런 사욕만으로 움직이진 않습니다. 지금까지 대륙에서는 강한 힘만이 우대받아 왔습니다. 그중 하나가 술이었죠. 하지만 이제부턴 점차 변해 갈 것입니다. 예술 분야가 점점 부흥하듯 이런 사치품도 점차 판로가 넓어질 터. 로간 제국은 좋은 양조장과 포도밭을 많이 가지고 있으니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물론 사욕만으로 움직이진 않지만, 사욕으로 우선순위를 당길 순 있었다. 제빌이 시치미를 떼며 씩 웃자 루비나드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강하고 비싼 것만 우대받는 시대는 이제 슬슬 퇴장할 때가 되었어. 힘의 균형이 확실해졌고, 더는 서로가 분쟁을 원하지 않게 되었지. 지칠 때가 된 거야.”

로간 제국이 무분별한 영토 확장 탓에 내정으로 고통받을 때, 영토를 빼앗긴 다른 나라들은 쑥대밭이 된 내정을 정돈하느라 고통받았다. 제국이야 땅, 자원뿐만 아니라 인력까지도 풍부하니 안정에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작은 나라들은 더 고통스러웠겠지.

제국은 그런 나라들과 교류를 할 생각이었다. 여러 나라와 동맹을 맺고 서로의 경제, 기술, 예술 발전을 위해 힘쓸 생각이었다. 그리고 로간 제국이 그 교역로가 되면 누구도 제국을 무시할 수 없게 된다.

즉, 영토가 아니라 문명으로 대륙을 지배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었다.

“앞으로 새롭게 태어날 대륙의 시금석을 만드는 건 그대와 나야.”

“네.”

루비나드가 말이 많아졌다. 정말 딱 좋게 술이 든 모양이었다.

예전에 와인 두 잔으로 꽤 흐트러졌던 걸 생각하면 이 정도가 루비나드에게 맞는 모양이었다. 제빌은 가만히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그대에게 이런 부담을 지워선 안 되는데…. 나 때문에 힘들게 해서 미안해.”

개인 사정은 어디까지나 개인 사정. 황제는 그런 것에 휘둘려선 안 되는 자리였다. 그런데도 사람이기에 결국 또 흔들리고야 만다. 루비나드는 그런 자신에게 구역질이 날 만큼 역겨움을 느끼고 있었다.

더럽고 더러워서.

자신이 한심해서.

게다가 그로 인해 제빌이 받는 부담을 생각하면 더없이 미안해지기만 했다.

“…저는, 폐하께서 충분히 시간을 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제빌이 루비나드의 잔에 다시 와인을 채웠다. 등받이에 기대앉은 채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루비나드가 쓰게 웃었다.

“다른 사람은 그럴 수 있어. 제 혈육이 죽으면 슬프고 고통스러워할 수 있지. 하지만 황제는 그래선 안 돼.”

아버지는 그러지 않았다.

론디아스의 죽음을 알렸을 때도 그랬다. 데거베일은 고통스러워 보이기는 했으나 이내 눈을 감으며 ‘그랬느냐.’라고 작게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형제를 잃은 루비나드의 심란함이 그토록 컸을진대, 아버지의 마음은 어땠을까. 아무리 한심하고 미운 장남이라고 해도 기대가 컸으니 실망이 컸던 것. 분명 틀림없이 마음이 아팠겠지.

그런데도 데거베일은 담담했다. 담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자신은 이토록 유약하단 말인가.

“황제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의연하고 대범해야 하지. 절대로 감정적으로 되어선 안 돼. 설령 내 혈육이 모조리 도륙당한다고 해도 나라를 위한 선택을 할 수 있어야만 해.”

루비나드는 그렇게 배웠다.

그렇게 해 왔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런데 난 왜 이리도 연약한 것인지. 이래서야 세인들이 하는 말과 다를 바가 없지 않나. 아버지의 피를 이었음에도 내가 이토록 약한 건 내가 여자라서….”

“폐하.”

제빌이 나직한 목소리로 루비나드를 불렀다.

몸을 일으켜 그녀의 잔을 들어 힘없이 늘어진 손에 쥐여 주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말했다.

“선황 폐하께서도 마음을 허락하는 사람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선황 폐하께서 가끔 주머니의 회중시계를 꺼내 보시던 걸 기억하십니까.”

회중시계.

루비나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확실히 그랬던 것 같기도 했다. 루비나드가 잔을 들 생각이 없어 보이자 제빌이 잔을 다시 받아서 그녀의 입술에 대어 주었다.

부드럽게 입술을 두드리는 액체의 감촉에 루비나드가 입을 열었다.

“거기엔 선황후 전하의 초상화가 붙어 있습니다. 모르셨지요?”

입안에 부드러운 포도 향을 머금고만 있던 루비나드가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입안에 가득 찬 것을 꿀꺽 삼키자 제빌이 잔을 입에서 떼 주었다.

“정말…?”

“네. 폐하께서는 선황 폐하께서 어머니께 너무 무뚝뚝하다 하셨었지요. 하지만 아니었던 겁니다.”

어린 시절, 루비나드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던 제빌은 궁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찾아다녔다. 정보는 곧 힘. 조각조각을 모아서 어떤 퍼즐을 만들 수 있는지는 조각을 가진 이의 몫이었으니.

그는 어디에 써야 할지도 모르면서 다양한 조각을 주웠다.

데거베일의 일화도 그 조각 중 하나였다.

“그분께서는 아련한 손길로 초상화 속 선황후 전하의 초상화를 어루만지고 계셨습니다. 선황 폐하께는 분명, 선황후 전하가 그런 사람이었겠지요.”

제빌은 탁자 위에 잔을 놓았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안에 쥐었다. 어느새 취기가 돌기 시작한 것일까. 부드럽게 곱슬진 머리카락만큼이나 그녀의 뺨도 붉었다.

손바닥 안의 머리카락을 엄지손가락 끝으로 부드럽게 어루만지던 제빌이 제 입술을 가져갔다. 그리고 루비나드의 귓가에 부드럽게 속삭였다.

“폐하. 비록 선황후 전하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고 당신과 부부의 연조차 맺지 못한 저이지만….”

간질간질한 숨소리에 루비나드가 한쪽 눈을 살짝 찡그렸다. 그녀의 시야가 막힌 사이, 제빌은 손안의 머리카락에 짧은 입맞춤을 보냈다.

부디 이번에도.

당신께서 제 생각대로 대답해 주시길.

언제나 그랬듯, 제가 가장 듣고 싶은 한마디를.

“제게 마음을 허락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보라색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청회색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요염하게 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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