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101)
왕세자의 죽음은 헤르젠의 몰락을 앞당겼다.
이 모든 것의 방아쇠가 페르안이었듯, 그의 죽음이 종료를 알리는 호각이 되기도 했다. 물론 그의 죽음만이 원인은 아니었다.
페르안 자신이 레기안마저 죽였기에 헤르젠에는 남은 후계가 없었다. 왕은 저항할 기력을 잃었고 헤르젠은 맥없이 항복을 선언했다. 그리고 이 땅 위에 헤르젠의 왕족은 씨도 남기지 않고 모두 목이 베였다.
“싱거울 정도였군.”
“네.”
“어리석은 남자야. 자기 자신을 유일한 후계로 만들고, 그런 주제에 적진 한가운데에 스스로 뛰어들다니. 대체 얼마나 오만하기에 제 죽음조차 상정하지 않았던 걸까.”
루비나드는 끝내 페르안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로서는 그 남자의 열등감도, 질투심도 이해하지 못했으리라. 아마 이 세상 누구보다도 페르안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일 제빌은 입을 다물었다. 굳이 그 남자의 상황을 이해시켜 줄 필요는 없으니까.
루비나드는 그저 햇빛 아래에만 있으면 된다. 어둡고 음습한 모든 것은 제가 떠맡으면 될 뿐. 제빌은 가만히 눈을 내리떴다.
“그대는.”
“…예?”
갑작스러운 말에 제빌이 급하게 대답하다 새된 목소리를 냈다. 그게 창피했는지 드물게도 루비나드의 앞에서 얼굴을 붉힌 채 목을 가다듬었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루비나드가 씩 웃었다.
“이번에도 그대 덕에 쉬이 마무리 지었어.”
“아, 아닙니다. 제 본분을 다한 것뿐입니다. 오히려 제가 거짓 정보를 너무 늦게 알아차리는 바람에 폐하께 상처를 드린 것 같아 그저 죄송할 뿐입니다.”
실수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지금까지의 제빌이 이상할 정도로 실수가 없었을 뿐. 게다가 늦기 전에 수습이 되었다. 그러니 충분히 그냥 넘길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제빌은 그게 계속 신경 쓰이는 듯 루비나드에게 사죄했다. 그 모습에 그녀의 마음이 한없이 약해졌다.
칼을 품으리라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배신당해도 아프지 않도록 항상 의심하겠노라 다짐했다. 조금이라도 제게 해를 입히면 품은 칼로 잘라 내리라고 결심했고, 그 결심대로 행했다.
지금까지는 늘 그랬다.
하지만….
루비나드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제빌이 언젠가 그녀를 배신하는 날이 온다면, 아마 그녀는 딱 한 번이지만 제빌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용서하고야 말겠지. 제 안에 가득 찬 그에 대한 신뢰를 채 끊어 버리지 못하고.
유일한 장점마저 사라졌나. 이성적인 것만이 내 장점이라고 생각했는데. 루비나드가 쓰게 웃으며 눈꺼풀을 열었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제빌이 걱정스러운 듯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피곤하십니까?”
“조금, 피곤하군.”
정말로 그랬다.
여러 가지가 그녀의 마음을 괴롭혔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도, 해결된 일도. 모두가 그녀를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그래서 루비나드는 지친 얼굴로 웃었다.
“그대는 괜찮나?”
“…저는 괜찮습니다.”
제빌은 지쳐 있을 여유조차 없었다.
제빌은 완벽하게 가문을 제어해야 했고, 루비나드를 이해하고 한발 빠르게 그녀가 원하는 걸 준비해 두어야 했으며, 궁 내부의 일을 처리해야 했다. 물론 루비나드의 친우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수행해야만 했다.
그가 무엇 하나라도 뒤처지면 그 자리에 누군가가 밀고 들어올 테니까.
“…그대는 정말로 강한 사람이야.”
“갑자기 칭찬하셔도 일정은 빼 드릴 수 없습니다.”
“알고 있어. 애초에 바라지도 않고. 다만.”
루비나드가 어딘지 퀭한 눈으로 제빌을 보았다. 그는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표정과 모습으로 거기에 서 있었다.
언제나 그의 자리에.
거기에.
“그대는 정말로 강하고, 정말로….”
변함 없는 사람이야.
그래서 무서워.
루비나드의 말은 채 입을 타고 흘러 나가지 못했다. 대신 그녀가 살짝 내리뜬 눈동자 사이로 새어 나와 허공에 흩어졌다.
한차례 폭풍이 끝났으니, 잠시 쉬어 갈 시간이 왔다.
하지만 연이은 폭풍은….
“날이 궂군요. 곧 폭풍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 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 * *
“아버지.”
이제 루비나드는 아버지에게 괜찮냐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그를 부르며 온화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한때 제국에서 가장 강했던 남자는, 병마와 싸우면서도 여전히 강했던 남자는 많이 야위어 있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거의 뼈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홀쭉하게 파인 뺨으로 데거베일은 웃어 보였다.
힘없는 미소였다.
“오랜만이구나.”
“헤르젠과의 일이 거의 마무리 되었어요. 감히 주제를 모르고 로간 제국에 칼끝을 들이민 어리석은 자들의 흔적은 모두 말살되었습니다.”
언제나 곁에 서서 이야기하다 떠나던 루비나드가, 오늘은 아버지의 곁에 항상 놓여 있는 작은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깡마른 제 아비의 손을 꽉 잡았다.
“그렇군…. 잘했다.”
잘했다. 그 한마디가 너무 덧없어서 루비나드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 세상에서 아마도 가장 처음으로 자신을 사랑해 준 사람.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제 편일 거라 루비나드가 믿어 의심치 않는 유일한 사람. 그런 사람이 죽음의 문턱에 서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끼는 건….
루비나드는 뜨겁게 달아오르는 눈가를 애써 모르는 척하며 웃음 지었다.
“아버지께 칭찬받는 건 오랜만이군요.”
“…나는 언제나…, 널 칭찬하고 있다. 너는 항상 잘하고 있어.”
새액, 하고 숨이 새는 소리가 났다. 목소리를 낼 힘조차 없어서 가끔 숨소리만이 새어 나왔다. 한때 그 누구보다도 장대한 기골을 가졌던 남자는, 늘어진 거죽을 들썩이며 그저 살아만 있었다.
살아만 있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이제는.
“아버지의 숙원이었던 악토그라토리아의 정벌은 멀었지만…. 그래도 외교 쪽은 나쁘지 않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악토그라토리아가 우리에게 친애의 선물과 말을 남긴 것이 전해지고, 헤르젠을 철저하게 짓밟아 본보기를 보였기에 동맹을 거부하던 나라들도 하나씩 우호의 표시를 전해 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멈추어 주었으면 하는 사람은 멈춰 주지 않았다.
루비나드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 표정을 읽어 낸 데거베일이 떨리는 손을 들어 딸에게로 뻗었다. 루비나드가 재빨리 고개를 숙이자 마른 나뭇가지 같은 손이 그녀의 뺨에 닿았다.
파르르 떨면서도 부드럽게 뺨을 쓰는 손길에 루비나드는 눈을 감았다.
“힘드냐.”
“…힘들어 보입니까?”
“얼굴이 많이 상했다.”
그 한마디에 루비나드는 결국 참지 못하고 울컥 눈물을 쏟았다.
힘없이 벌어진 입술과 힘겨운 숨소리. 간신히 뜨고 있는 눈꺼풀에 흐려진 보라색 눈동자. 누가 누구더러 얼굴이 상했다며 걱정하고 있는 걸까.
하지만, 그렇겠지. 아버지라는 존재는 그런 것이겠지.
루비나드에게 언제나 보상을 바라지 않는 사랑을 주었듯, 마지막까지도 아버지는 아버지였다.
“어릴 때도…, 하지 않던 짓을 하는구나.”
“…죄송합니다.”
“탓하는 게 아니다. 그저…, 네가 정말…, 많이 힘들었나 보다 싶어서 그렇다.”
쿨럭, 하고 마른기침이 새었다. 최근의 아버지는 이러다가 피를 토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힘없는 기침에 놀란 루비나드가 제 뺨에 와 닿은 손을 쥐고 이불 속으로 밀어 넣었다.
“루비나드.”
“아버지, 이제 말씀은 그만….”
“네게… 무거운 짐을 지게 했구나.”
힘없는 눈동자가 껌뻑껌뻑 눈꺼풀 뒤로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흐릿했던 보라색이 조금 또렷해진 것처럼 보였다.
“너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 나라를 믿고 맡길 사람이. 네가 이렇게나… 작고 사랑스러운 아이라는 걸 알면서도.”
딸이라서가 아니었다.
루비나드가 얼마나 마음이 여린지, 그 마음에 어떤 상처를 끌어안고 있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황녀인 이상 그녀가 견뎌 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개입하지 않고 두었다.
황제의 자리에 앉아 모든 걸 그저 꾹꾹 참고 삼키기만 하는 그녀를 알면서도 입을 열지 않았다. 황제인 이상 당연히 견뎌 내야만 하는 현실이니까. 대신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다 해 주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어렸을 때 루비나드와 제빌을 약혼시키고 성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게 했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치열한 삶보다 안정적이고 생산적인 삶에 어울리는 루비나드와 그녀를 지켜 줄 수 있는 제빌. 두 사람은 분명 좋은 부부가 되었을 터였다.
행복 속에서 두 사람은 생의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었겠지. 이런저런 더러운 꼴을 보지 않고, 그저 두 사람이 함께 행복하게.
“미안하구나, 루비.”
아주 어렸을 적 아버지가 불러 주던 애칭. 세상 물정을 조금 알게 된 무렵부터는 부르지 않았던 애칭이었다.
루비나드는 꽉 잡았던 손을 놓아주었다. 이대로면 아버지의 앞에서 오열이라도 할 것 같아 두려웠다. 제 앞에서 언제나 아버지가 강하고 당당한 모습을 보였듯 자신 역시 그러고 싶었다.
아버지가 조금이라도 덜 후회하시길 바랐다.
“저는… 지금 행복합니다, 아버지.”
결혼 도구로 자라나 황제라는 지고의 자리에 올랐다. 아버지와 제빌의 도움을 받아 지금까지 잘 해낼 수 있었다.
황족으로 태어나 이보다 더 큰 행복이 있을까. 그러니까 자신은 행복해야만 했다. 황제인 이상 그녀는 누구보다도 자신감이 넘쳐야 했고, 누구보다도 뛰어나야 했으며, 누구보다도 행복해야만 했다.
설령 그 마음이 상처로 얼룩져 있다 하더라도.
“저는 괜찮아요. 힘들지 않아요. 제게는 아버지가, 제빌이 있잖습니까.”
제빌.
데거베일은 얼마 전에도 제 문안을 왔던 남색 머리카락의 청년을 떠올렸다. 얼음같이 투명한 눈동자에 스며 있던 걱정과 안타까움에 어딘지 위화감이 느껴졌다.
항상 담담한 표정을 짓던 그가 설마 그렇게까지 마음 아파할 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좀 더 다른….
청회색 눈동자가 보이는 그….
“아버지께서 어서 기력을 회복하셔서 일어나 주시기만 하면 더 바랄 게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니 오늘은 이만 쉬세요. 내일 아침에 또 찾아오겠습니다.”
그 남자의 일은…, 엔도르빌의 일은 말하지 않는 게 더 낫겠지. 오라버니가 최소한 사람이라면 아버지가 살아 계신 동안에는 일을 벌이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설령 일이 터지더라도 상관없었다. 아버지는 이 작은 방에서, 루비나드가 모든 것을 잘 제어하고 있다는 환상 안에서 지내다 떠나시면 된다.
굳이 더러운 현실을 아실 필요는 없으니까.
“으, 으음…. 아침엔 찾아오지 않아도 된다.”
“아버지께 힘을 드리기 위해서만 문안하는 것은 아니니 부담스러워하지 마세요. 아버지 목소리를 들으면 저 역시도 힘이 나니까요.”
루비나드가 생글 웃고는 데거베일의 남은 한 손도 이불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불을 잘 여민 루비나드가 툭, 하고 이불 위를 두드리자 데거베일이 입을 열었다.
“루비.”
“네, 아버지.”
“…너는 사랑받아 마땅한 아이다. 그리고 네 국서도 분명….”
분명.
무언가 말을 이으려던 그때.
“커… 커헉!”
긁히는 소리 끝에 무언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소리가 났다. 루비나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 의사를 불러라! 당장!”
적막하던 궁에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