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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 (98)화 (99/115)

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99)

숙청은 조용하고도 빨랐다.

하우즌 후작의 아래에 있던 이들은 모두 처형당했다. 다만, 조금 마음에 걸리는 말은 있었다.

-살려만, 살려만 주십시오, 폐하!

-후작의 자리에 앉은 자가 감히 나라를 팔아먹다니. 그대가 가진 자리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건가.

-아닙니다, 폐하! 아닙니다! 처음에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하우즌 후작은 살기 위해 그녀의 앞에 엎드렸다. 그리고 묻지도 않은 말들을 주절주절 늘어놓기 시작했다.

처음 그에게 다가왔던 건 레기안 왕자의 시종이라고 일컫는 남자였다고 한다. 제국에서 보기 드문 갈색 피부의 남자였기에 별 의심 없이 믿었다고. 거기까지 들은 루비나드는 하우즌 후작의 어리석음에 눈살을 찌푸렸다.

-저하께서는 최초로 후비의 자리가 약속된 분입니다. 어쩌면, 정비이신 국서 전하를 제외하면 처음 승은을 입으실지도 모르지요. 그렇게 된다면.

남자는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였다. 하우즌 후작은 레기안 왕자에의 호감을 표시하며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흉흉한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쯤, 손을 떼려고 하였으나.

-폐하께서는 저하를 버리지 않으실 겁니다. 저하께 이미 총애를 기울이고 계시기 때문이지요. 후작께서 도와주신다면 그 후의를 잊지 않으실 겁니다.

본국의 형님이 걱정된다는 말에 하우즌 후작은 서신을 전달할 수 있도록 손을 써 주었다. 그리고 성에 들여보내 줄 때도 형님과 만나 전쟁을 막아 보겠다는 레기안 왕자의 말에 넘어간 것이라고 했다.

루비나드는 싸늘하게 웃었다.

-그것참 이상하군. 왕자의 시체에는 생사와 관련 없는 자상이 많이 남아 있었네. 만약 정말로 방문한 것이 왕세자고, 두 사람이 그토록 사이가 좋았다면 왜 저런 상처를 남겼단 말인가?

하우즌 후작의 입이 닫혔다. 그 역시 짐작 가는 바가 없다고 했다.

사실 계속 머릿속을 맴돌던 의문이기도 했다.

레기안 왕자가 왕세자에게 보낸 편지의 필적은 이미 감정해 보았다. 레기안 왕자의 글씨가 틀림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신전의 감정사가 본 것이니 틀림없으리라.

그런데 그 절절한 편지의 결과물이 왜 레기안의 참혹한 시신이었던 걸까.

레기안과 하우즌 후작의 가교였다던 남자는 이미 제빌이 구속해 두었다. 그러니 하우즌 후작의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아마 불러들인 게 왕세자라는 것도.

아니면 혹시 누군가가 선수를 쳐서 레기안을 죽였던 걸까?

그것도 아니면 설마.

정말로 페르안은 레기안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고, 그 열등감을 해소하기 위해 이 틈을 타서 죽였던 걸까? 자신을 위해 목숨마저 내놓으려 했던 동생을?

…아니, 그랬을지도 모르지.

루비나드는 이미 사람이 ‘열등감’을 가졌을 때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 많이 봐 왔다. 페르안 역시 그렇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테지. 그렇다면 레기안은 정말로 끝끝내 이용만 당한 게 된다.

“왜 그러십니까, 폐하?”

“음?”

하우즌 후작의 세력을 정리한 루비나드는 다시 성도로 향했다. 병사들의 사기 진작은 이미 끝났다. 압도적인 승리를 연달아 보여 준 덕에 그들은 루비나드를 거의 숭배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는 성도 쪽을 정리해야 했다. 혹시 그녀가 자리를 떠나 있을 때…, 또 다른 세력이 몸집을 부풀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그런 생각에 두 사람은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마차를 탄 채 빠르게 성도를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생각에 잠긴 루비나드를 일깨운 건 당연히 제빌이었다.

“표정이 심각하셔서.”

“…헤르젠의 제2 왕자를 생각하고 있었어.”

호칭이 레기안 왕자에서 헤르젠의 제2 왕자로 다시 바뀌었다. 제빌은 그 미묘한 변화를 놓치지 않고 엷은 미소를 띠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얼음이 햇빛에 녹아나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직 뭔가 탐탁지 않으십니까?”

“아니. 대충 아귀는 맞아. 조금 마음에 걸리는 일은 있었지만.”

제빌의 등골이 서늘했다.

급하게 ‘이야기 줄기’를 바꾸는 바람에 아무래도 맞물리지 않는 부분이 생겨 버렸다. 만약 그 작은 틈이 벌어지면….

커다란 균열이 되어 모든 것을 붕괴시켜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음에 걸리는 일이시라면?”

“별것 아니야. 대충 납득은 가. 그저 문득 그가 불쌍해졌어.”

“…드문 일이군요. 폐하가 자신을 배신한 사람을 불쌍하다고 생각하시다니.”

“그러게. 그의 모든 것이 연기라는 걸 알았는데도…. 사람이라는 건 참 간사하지. 마음 한구석 어딘가에서는 그를 여전히 믿고 싶어 하는 건지도 몰라. 그대를 닮은, 그 무뚝뚝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어려움을 보이던 남자를.”

루비나드가 살며시 눈을 감았다. 지독하게도 피곤해 보였다.

그 얼굴을 보며 제빌은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폐하.

하지만 그러기에 조금이라도 더 빨리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당신의 곁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저뿐이라는 걸. 누구나, 모두가 당신을 배신할 테지만 그 속에서 저만큼은 당신의 곁에 있을 거라는 걸.

당신이 그 누구도 믿지 못하고 저만을 믿게 되는 날. 저는 분명….

당신을 제 품에 안을 수 있게 될 테지요.

남자로서 사랑받는 건 이미 포기했다. 제빌은 제 주제를 잘 알았다. 그러니까 그는 그녀의 ‘유일’이 되는 길을 택했다.

그녀가 절대로 의심할 수 없는 세상 ‘유일’한 사람.

“…조금 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잠들기가 어려우시다면 토닥여 드릴까요?”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루비나드가 피식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눈을 감은 채 그녀가 웃음기 섞인 얼굴로 입을 열었다.

“무슨. 마차 안에서 드러누울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하면 되지 않습니까.”

깜깜한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그녀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언제 제 옆으로 온 것일까. 분명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제빌이 루비나드의 곁에 앉아 그녀의 몸을 제게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저항할 순 있었다. 아무리 갑작스러운 일이라도 그녀의 힘이라면.

하지만 루비나드는 저항하지 않았다. 그가 지적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갑자기 정말로 미칠 것처럼 피로해졌기 때문이었다. 순순히 그가 이끄는 대로 몸을 맡기자 커다란 손이 제 어깨를 감싼 채 토닥였다.

“…제빌 경.”

“네.”

“그대의 손은 항상 뜨거워.”

그건, 곁에 있는 게 당신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언제나 당신의 곁에 있으면….

내뱉지 못한 말은 마음속에서만 맴돌았다. 그 속을 알 리 없는 루비나드가 엷게 웃더니 이내 입꼬리를 늘어뜨렸다. 당장이라도 잠들 것 같은 무방비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늘… 그대가 토닥여 주면 몸이 따스해져. 조금 전까진 지쳐서 몹시도 무겁고 늘어진 기분이었는데….”

그렇게 중얼거린 루비나드가 손을 뻗어 옆을 더듬거렸다. 그 손이 닿은 곳은 옷 위로도 느껴질 정도로 뜨거운 체온을 머금은 제빌의 다리였다.

루비나드는 꽤 단단한 허벅지를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항상 곁에서 날 북돋아 줘서 고마워. 그대 덕분에 좀 쉴 수 있을 것 같아.”

“…….”

제빌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다.

루비나드는 그걸, 어서 쉬라는 배려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눈을 감은 채 마차가 덜컹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빠르게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

당신이라는 사람은, 정말.

제빌은 제 허벅지에 와닿은 작은 손을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그 손을 치워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자신의 자제력이 빠르게 닳아 가는 게 느껴졌으니까.

하지만 떼어 낼 수가 없었다. 그녀의 손 하나조차도, 제빌은 제 마음대로 움직이질 못했다.

닿을 수가 없다. 그 손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고귀해서. 성스럽기까지 해서. 자신처럼 더러운 이가 함부로 닿아서는 안 될 성역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제빌은 쉬이 그녀에게 닿을 수가 없었다.

언젠가 이 손을 마음껏 맞잡는 날이 올까?

당신께서 혹여 깰까 두렵고 만지면 더럽힐까 두려워 석상처럼 굳어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게 아니라, 당신이 깨서 나를 바라봐 주길 바라며 닿을 수 있는 날이 올까? 마주친 눈을 바라보며 당신에게 사랑을 고할 수 있는 날이 올까? 그런 날이 오기만 한다면….

분명, 오랫동안 주려 왔던 마음속의 괴물도 만족할 수 있을 테지.

하지만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제빌이 그녀의 ‘유일’이 되어도, 그는 그녀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남자’가 될 수는 없을 테니.

“안녕히 주무세요, 폐하.”

그러니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그저, 계속.

계속.

* * *

헤르젠과의 전쟁은 생각 외로 길어졌다.

레기안이 죽으면 곧바로 물러날 것이라 생각했는데, 압도적인 전력 차를 느끼면서도 그들은 끝까지 발악했다. 루비나드가 귀환이 너무 빨랐던 것이 아닌가 재고할 정도로.

“정말로 이번 헤르젠의 행적은 이해할 수가 없군.”

“레기안 왕자와 내통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죠.”

“심지어 그 레기안 왕자를 제대로 쓰지도 않고 죽이지 않았나. 대체 무슨 꿍꿍이지.”

“벌써 전쟁이 시작된 지 한 달 반. 폐하께서 성도로 돌아오신 지 이 주가 넘었는데….”

언제나 답을 척척 내놓던 제빌마저도, 이번만큼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 탓에 루비나드의 초조함도 더해졌다.

제국의 승리는 눈에 보일 정도였다. 다소 늘어진 기간에도 귀족들이 입을 다물고 조용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루비나드를 인정하는 이유는 그녀가 보인 업적들 때문이었다. 경제나 치안에 관련해서 보인,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지난 행적들. 그렇기에 힘에 눌려 그동안 숨을 죽이고 있었던 반대파들은 이 전쟁에서 눈을 부라리고 있을 터였다.

조그만 흠결이라도 잡아내면 곧바로 물고 늘어지려고.

그들이 조용하다는 건 흘러가는 전황이 제국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헤르젠이 하고 있는 건 그냥 발버둥일 뿐이었다.

그들이 왜 이토록 끈질기게 발버둥을 치는 걸까.

루비나드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제빌은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고 보니.”

“네.”

“서고에 황궁의 설계도가 있었던가?”

뜬금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제빌은 그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제빌의 눈에 루비나드의 사고 과정이 손에 잡힐 듯 보였다. 그녀는 제빌의 예상대로의 사고를 거쳐, 제빌이 예상한 그대로의 결과에 도달했다.

그걸 확신한 제빌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황궁 내의 비밀 통로에 대해선 그려져 있지 않겠지, 당연히.”

“네.”

“하지만 그 설계도와 실제 황궁 내의 구조물을 비교해 보면 분명 위화감을 찾아낼 수 있을 테지.”

“그렇겠지요.”

그렇다는 건, 설마.

“…제빌 경.”

“네.”

“오늘 밤은 그대의 방에서 자도록 해. 나는….”

아무래도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으니.

보라색 눈동자가 싸늘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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