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98)
“후.”
황궁에 있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조잡한 욕조.
오랜만에 막사를 떠나 지붕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 루비나드는 곧바로 목욕부터 했다. 며칠 동안 전장에서 구르느라 온몸이 흙과 연기 냄새로 가득 찬 탓이었다. 게다가 여름인 탓에 땀 냄새까지 섞여 그녀 스스로가 맡기에도 꽤 역겨운 냄새가 되어 있었다.
물속에 몸을 맡긴 루비나드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레기안을 떠올렸다.
그는 예상했던 것보다는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비록 그의 몸은 그리 평온하지 못했지만. 레기안은 그를 미끼로 사용한 자신을 알고 있었을까. 루비나드는 가만히 그 얼굴을 바라보다, 제빌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이번에도 역시나, 루비나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가장 필요한 것을 미리 준비해 건네주었다. 새하얀 손수건을 레기안의 얼굴에 떨어뜨린 루비나드가 싸늘하게 미소 지었다.
-재미있군. 전쟁터 한복판에서 병사들의 감시를 받고 있던 포로가 사망했다, 라. 이게 어찌 된 일인지 그대는 알고 있나?
루비나드가 고개를 들어 성주인 키시안 백작을 바라보았다. 하우즌 후작의 아래에 있는 자로 주인에 대한 충심이 꽤 강했다.
문제는 그 주인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이겠지.
-저도 잘…. 성의 바로 지척에서 발생한 전투에 병사 대부분이 지원을 나간 사이 당한 것이라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백작은 벌벌 떨고 있었다. 루비나드는 피식 웃고는 제 허리춤에 찬 검을 빼 들었다. 툭, 하고 검 끝을 바닥에 부딪친 그녀가 팔을 뻗었다.
새하얀 검신이 백작을 똑바로 겨누었다.
-아주 재미있어. 왕자를 벤 자의 검 수준이 결코 낮지 않아. 벤 자리가 깔끔하게 절단된 걸 보면 알 수 있지. 그런데도 여러 번, 숨통을 끊는 것과는 전혀 상관도 없는 곳을 찔렀어. 이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나?
-…저의 좁은 식견으로는 모르겠습니다, 폐하.
-이자는 왕자에게 원한이 있다는 뜻이야.
루비나드가 한 발 백작에게 다가섰다.
백작은 물러서진 않았지만, 온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어리석기 짝이 없다. 이 정도의 포커페이스도 유지하지 못하면서 감히 일을 저지르다니. 루비나드는 나른하게 웃어 보였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지. 이미 죽은 자를 이리 훼손할 정도로 원한에 가득 찬 자가 하필이면 이 근처에 있었다. 게다가 하필이면 오늘 근처에서 전투가 발생했다. 그 덕분에 이 원한에 가득 찬 살인자가 들어왔을 때 이 성의 병사가 모두 나가 있었고, 짐의 병사 둘과 왕자만 죽음을 맞이했다.
검을 겨눈 손은 흔들림이 없었다. 반대편 손으로 뺨을 톡톡 치던 루비나드가 씩 웃었다.
-그런데 지원을 나갔다던 백작의 병사들은 오늘 사상자가 있었나?
-…아니요. 저희가 도착하자 헤르젠군이 퇴각했기에 바로 되돌아왔습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하필이면 왕자가 죽었다는 거지.
백작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려 왔다.
확실히 후작의 명령에 따라 페르안 왕자를 성으로 불러들인 건 그였다. 하지만 그건 발뺌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비나드는 전장에 나간 채 며칠째 돌아오질 않았다. 연이은 전투에 지쳐 있으면서도 매일같이 선두에 서서 병사들의 사기를 독려한다고 했다. 압도적일 정도의 전투가 이어지는 매일이라고.
젊은 여제와 그녀의 병사들은 무서울 정도로 강했다. 인해전술로 대륙을 점거했다는 과거의 평가가 무색할 정도로 정돈된 강함을 보였다.
그래서 페르안 왕자는 초조해졌다. 레기안을 빨리 죽여야 목적을 달성하고 빨리 후퇴할 텐데 황제가 너무 단단하게 전선을 틀어막고 있어 밀고 들어올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 곧 귀빈께서 도착하실 테니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기다리도록 』
키시안 백작은 하우즌 후작의 명령에 따라 페르안 왕자를 위해 환경을 조성했다. 근처에 기습으로 인한 전투가 발생했다고 핑계를 대고 그 근처를 적당히 불태울 생각이었다. 병사들이 성을 비운 일 따위 처음부터 없었다.
오히려 왕자를 도와 황제의 병사들을 죽였다.
10여 분의 광란이 끝난 후 곧바로 왕자의 시신을 수습하려 했다. 미리 이야기되어 있는 의사를 불러 사망진단서를 쓰기 시작한 그때.
-이게 무슨 일이지.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사망진단서를 쓰던 의사가 흠칫 놀라 펜을 떨어뜨렸다. 루비나드는 그 모습에 싸늘한 냉소를 보였다.
-짐의 후비가 될 터였던 자인데, 짐에게 알리지도 않고 사망진단서를 쓴다?
널브러진 사망진단서를 확인한 그녀는, 이윽고 레기안의 상처 역시 확인했다. 그리고 백작을 추궁했다.
즉.
이미 그녀는 모든 걸 알고 찾아온 게 틀림없었다. 결국, 백작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뿐이었다.
-…죽여 주십시오, 폐하. 재물에 눈이 어두워 제가 해선 안 될 짓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제가 모든 것을 뒤집어쓰는 것.
루비나드는 예상했기에 웃었다. 더없이 싸늘한 미소였다.
“나머지는 제빌에게 맡겨 두면 알아서 할 테지.”
중얼거리는 소리가 욕실 안을 가득 채웠다. 웅웅 울리는 탓에 작은 소리로 말했는데도 제 목소리가 지나치게 크게 들렸다.
“…또 믿으려 했는가.”
루비나드는 가만히 눈을 떴다. 어스름한 조명이 그녀를 비추고 있었다.
조용히 자숙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과 달리 레기안과 페르안의 서신 교환은 꽤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걸 잡아낸 건 다름 아닌 고레야스였다.
제빌의 명에 따라 몰래 그를 지켜보고 있던 그 남자가 결국 수상한 행색의 시녀를 발견해 내고야 말았다.
그녀는 출입을 허가받은 시녀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특정 병사가 문 앞을 지킬 때마다 꼭 방을 출입했다. 고레야스는 바삐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그녀가 가지고 나온 그릇 아래에는.
『 형님, 로간의 황제를 죽일 수만 있다면 제 목숨이 대수겠습니까.
이제 저희 헤르젠이 칭제할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황제는 국서와 제가 닮았다 하며 호감을 보이고 있습니다.
저는 계속 그녀의 환심을 사 단둘이 있을 기회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녀를 제거하는 데 성공하기만 한다면….
형님, 저는 제가 존경하고 있는 형님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서 무엇이든 할 것입니다.
무엇이든. 』
“멍청하긴.”
제빌은 그녀의 곁에서 오랫동안 일하고 함께한 유일한 부하이자 친우였다.
누군가가 그의 흉내를 내 그녀의 호감을 살 거라고는 생각해 보지도 못했다. 심지어 제빌이 주로 이용하는 정보상까지 포섭하여 거짓 정보까지 흘렸을 줄이야. 제빌은 면목이 없다는 얼굴로 루비나드에게 고했다.
-죄송합니다, 폐하.
-늦기 전에 발견해서 다행이지. 손쓸 수 없게 된 후에는 그대라고 해도 용서치 않았을 거야.
시녀를, 병사를 포섭하는 데는 분명 제국 내부의 인물이 관여했다. 하지만 그게 누구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루비나드는 레기안을 살려 둔 채 불온 분자를 색출해 내려 했다.
“왜 믿어 버렸나. 왜 의심하지 않았나.”
그토록 배신당했으면서 또.
루비나드는 다시 가만히 눈을 감았다. 노곤하게 몸이 풀리는 온수 속에서 그녀의 마음만은 한없이 싸늘하게 식어 가고 있었다.
친우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제빌에게도, 제게도 좋은 친우가.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또 거짓이었다. 또.
루비나드조차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절묘한 거짓. 제빌조차도 겨우 간파해 낸 절묘한 거짓.
그의 눈동자에서 흘러나오던 감정조차 거짓이라면 대체 무엇을 믿어야 하는 건가. 루비나드는 이대로 평생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되는 걸까? 그저, 이 지고의 자리에 앉아 누구도 마음에 두지 못한 채 스러져 가야 하는 걸까.
…자신은 그걸 견딜 수 있을까?
“유약하고, 또 유약하다.”
사실은 제일 약한 건 자신이었다. 억지로 강한 척 괜찮은 척하지만 사실 그 속은 이미 썩어 버렸다. 루비나드는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되면 될수록, 누군가를 믿고 싶어졌다.
혼자이고 싶지 않았다.
“…제빌….”
그는 믿어도 되는 걸까?
가족을 제외하면 가장 오랫동안 그녀의 곁에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한 번도 그녀를 배신한 적이 없었고, 언제나 기대에 부응해 주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믿어도 되는 걸까?
-그 끝에 분명 폐하께서는 제게 말씀해 주시게 될 겁니다.
-그대만은 믿을 수 있노라고.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루비나드는 그를 믿고 싶었다. 하지만 자꾸 고개를 치켜드는 의심은 지울 수가 없었다.
아니, 의심해야만 했다.
그저 믿기만 하다가 배신을 당하면 돌이킬 수 없어진다.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마음을 깊숙하게 관통해서 낫지도 않고 그렇다고 마음을 죽이지도 않은 채 애매하게 새겨져 있게 된다.
그러면 루비나드는 또 지옥 속에서 살아야만 한다.
사람을 믿고 싶다. 사람 사이에서 살아가고 싶다. 누군가에게 제 약한 부분을 보여 주고 때로는 하소연도 하고 싶다. 하지만 그 누구도 믿을 수가 없다. 모두들 그녀를 배신하니까.
그럴 거라면 차라리 의심하는 게 낫다. 의심하다가 배신당하면 최소한 죽을 만큼 아프진 않으니까.
그 상처가 더 얕아지니까.
“제빌, 그대는….”
정말로 나를 배신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 배신할 거라면 빨리해 줬으면 좋겠다.
양가감정이 그녀의 안을 헤집는다. 루비나드는 눈을 떴다. 보라색 눈동자가 형언할 수 없는 혼란에 잠긴 채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대로면 제빌에게 정말로 모든 마음을 주게 될지도 모른다.
제빌은 루비나드에게 유일한 친우였고, 신뢰할 수 있는 부하였으며 존경할 수 있는 남편이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남은 단 한 자리.
루비나드가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남자의 자리까지 차지하려 한다.
그 모든 자리를 다 제빌에게 내어 준 후 배신당하면 어떻게 하지? 자신은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 다시 황제의 얼굴을 할 수 있을까? 뻔뻔스러운 가면을 쓸 수 있을까?
부서지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그대를….”
정리되지 않은 말만이 그녀의 안을 맴돈다.
그렇게 한참이나 루비나드는 욕조 안에 몸을 담근 채 있었다.
그 물이 모두 식어 냉수가 된 후에도, 한참이나. 그 냉기 따위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그녀의 마음이 차갑게 식어 있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