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97)
대기가 흔들린다.
레기안은 가만히 밖을 바라보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런 곳에서 갇혀 있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니. 하지만 그가 밖으로 나가면 루비나드가 귀찮은 일에 휘말린다. 그래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헤르젠의 왕자를 처형하셔야 합니다, 폐하.
헤르젠과의 전쟁이 공공연해진 지금, 로간 제국이 그를 무사히 살려 둘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기선 제압을 위해 죽이는 것이 더 옳았다.
하지만 루비나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여전히 불분명하오.
-설령 왕자를 죽이는 게 목적이라고 하더라도, 오히려 그렇기에 더 처형하셔야 합니다.
-짐은 무고한 생명을 앗고 싶지는 않소.
물론 귀족들이 그의 처형을 주장하는 이유 중 하나는, 루비나드가 혹여 그에게 총애를 기울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기도 했다. 황제의 완강한 거부가 그들의 의심에 불을 붙였다.
그걸 알면서도 루비나드는 거부했다. 정말로, 그녀가 말한 그대로의 의미였다. 그리고 헤르젠의 꿍꿍이를 알아내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걸 알 리 없는 레기안은 그녀가 이해가 가질 않았다.
포로가 된 자신을 지금까지 살려 두고, 전장에 데려오기까지 하다니.
“폐하….”
-그 왕자가 헤르젠과 무슨 내통을 할 줄 아시고 전장에 데려가시겠다는 겁니까!
-그러다가 폐하의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찌합니까!
-아무리 그를 총애하신다고 하셔도 그건 너무나….
결국, 누군가가 그 말을 꺼내고야 말았다. 루비나드가 그를 데리고 출정한다는 말을 꺼냈을 때였다.
루비나드는 싸늘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대들은 아직도 짐을 잘 모르는 모양이군. 짐은 그를 총애해서 데리고 가려는 게 아니네. 짐에게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것이니 더는 이 사안을 문제 삼지 말게.
홀로, 이 방 안에서 생각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레기안은 계속 생각했다. 대체 루비나드의 뜻이 무엇인지를.
대체 뭘 알고 싶으신 걸까. 왜 자신을 살려 두시려는 걸까.
이미 전쟁이 발발한 상황이다. 레기안이 그들의 첩자든 아니면 진짜 전쟁 포로든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렇다면 혹시 자신에게 접근하는 헤르젠의 인물이 있는지를 보고 싶으신 걸까.
…그게 의미가 있을까?
그럼 대체 뭘까. 헤르젠을 이 지도상에서 지워 버린다고 한 이상 그를 허수아비 왕으로 세우려 살려 두는 것도 아닐 텐데.
루비나드에게 그걸 물어볼 기회조차 없었다. 결국, 결론이 나지 않는 의문만이 그의 마음을 가득 채운 채 쌓여 갔다. 그리고 그 의문은 밖에서 전투의 소리가 날 때마다 그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전선을 밀기 위해 쏟아지는 수많은 공격 마법. 그걸 막아 내기 위해 펼쳐진 실드. 그 속에서 종횡무진 날뛰는 병사들.
분명 저 안에 루비나드 역시 있겠지.
“저는 어떻게 해야….”
어차피 전쟁의 기미가 보일 때 포기한 목숨이었다. 그녀는 대체 뭘 원하는 걸까. 그걸 알기만 한다면 목숨을 걸어서라도 이뤄 줄 텐데.
“오랜만이구나, 레기안.”
바깥의 소란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고요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 서린 비아냥거림은 절대 평온하지 않았다.
레기안에게는 익숙한 목소리인데 어조가 낯설었다.
“…형님?”
휘둥그렇게 변한 레기안의 눈이 뒤를 향했다. 열린 문밖으로 쓰러져 있는 보초 둘이 보였다.
페르안은 차가운 눈으로 보초들의 시체를 바라보더니, 제 동생을 보았다.
언제나 자신을 깔보는 듯 담담하고 냉정한 시선을 보내던 동생이었다. 그런 그가 놀라움으로 눈을 크게 뜬 채 자신을 보고 있는 건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페르안이 검을 휘둘러 달라붙은 피를 떨쳐 냈다.
“생각보다 제국의 경비가 그리 두텁진 않더구나. 하긴, 수를 써 두었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상당히 오래 걸린 편이긴 하지.”
섬뜩한 은빛의 검이 동생을 향했다.
레기안은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 눈썹을 찌푸렸다.
“뭐 하시는 겁니까, 형님.”
“조국을 배신한 배신자를 처단하려는 것이지.”
“제가, 배신자라고요? 배신한 것은 형님과 아버지가 아닙니까.”
“하? 네놈이 황제를 홀려 그 세력을 등에 업고 헤르젠을 탈취하려 한 것을 내 모를 줄 아느냐.”
이건 대체 무슨 이야기인가. 레기안이 찡그린 채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애초에 폐하께서는….”
“폐하라. 그 여자를 그리 부르느냐. 네 조국을 멸망시키려 하는 여자인데.”
페르안의 눈동자에 광기가 서려 있었다. 레기안은 그제야 제 앞에 서 있는 남자가, 인품이 훌륭하다고 칭송받았던 제 형님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형님은 무언가 이상한 것에 사로잡혀 있었다.
“형님, 대체….”
“이상하다 싶으냐. 네가 깔보고 우습게 보던 그 형님이 아니라 의아하겠지.”
“제가 언제 형님을 깔보았단 말입니까! 저는 항상 형님을 존경해 왔습니다!”
“하! 너란 놈은 언제나 그렇지. 겉으로는 입에 발린 소리를 하면서 사실은 날 얕보고 있어. 검술 대회 때도 그랬지.”
왕세자로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교육을 받았던 페르안.
왕실의 골칫거리로서 종기 같은 취급을 받으며 홀로 검을 배웠던 레기안.
승자는 레기안이었다. 그래도 페르안은 동생을 축복해 주려 했다. 그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버지의 눈에 띄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를 알고 있었기에. 하지만 동생은.
-…이래도 당신은 저를 봐 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형의 비참한 꼴은 동생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승자가 패자를 일으켜 주는, 결투 이후의 예법도 행하지 않은 채 동생은 한참이나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리고 페르안의 마음은 그날에 멈췄다.
가여운 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가여운 건.
-차라리 레기안 저하께서 장자셨으면 좋았을 텐데.
-쉿, 왕세자 전하께 들리면 어쩌려고.
-인품만큼은 뛰어난 분이시잖아요? 하긴, 능력도 없는 데 인품이라도 좋아야지.
-너 너무 선 넘는다. 그만해.
-도저히 이해가 안 가서 그렇죠! 인물이며 능력이며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레기안 저하께서 뛰어나신데 장자라는 이유로 인정받는 게 말이 돼요?
다들 그렇게 말했다.
페르안이 인격이라도 훌륭한 사람이라서 다행이라고. 하지만 페르안 스스로는 알고 있었다. 자신은 쓰레기나 다름없는 사람이라는 걸.
사실은 더러운 평민들과 함께하는 자리가 불편했다. 그들 나름대로 꾸민다고 꾸며 와도 언제나 촌스럽고 이상한 냄새가 났다. 그걸 웃으며 대하고 소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에게는 그 길밖에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 시녀의 말이 옳았다. 능력이 부족하면 인격이라도 뛰어나야만 했다.
-레기안을 로간 제국으로 보내기로 했다.
-네? 하지만….
-원래는 너와의 혼담이 오갔던 여자긴 하지. 그래도 어쩌겠냐. 이제는 네 아내로 삼기엔 부적절한 여자가 되었다. 대신 레기안을 떠넘기기엔 좋은 상황이 되었지.
-아버지. 너무 갑작스럽지 않습니까. 레기안이 순순히 간다고 할 리가….
-간다고 하더구나.
-네?
왕위 계승권이 낮은 왕자는, 언제나 제 살길을 찾아 떠나야 하는 법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가 가장이 될 수 있는 자리를 찾아간다는 것이지 후실이 되어 들어간다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상대가 여제라도 가부장 의식이 강한 헤르젠의 왕자가 그런 자리에 기꺼이 갈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 정체불명의 서신이 왔을 때 납득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아무리 애써도 레기안은 아버지의 총애를 받을 수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헤르젠을 벗어나 제 세력을 키우는 것이 낫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 상대가 대륙을 호령하는 제국의 황제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고 생각했으리라.
언제나 자신을 감싸는 형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던 동생은, 열렬한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형이 그를 의심하기엔 충분했다.
아니, 사실은 그건 계기일 뿐이었다.
서신을 보낸 이가 누군지는 끝내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게 있었다. 그는 페르안의 속내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그 안에서 들끓고 있는 열등감과 질투를.
페르안은 처음부터 찾고 있었던 것이다. 훌륭한 인격의 왕세자라는 가면을 쓴 채 제 동생을 제거할 방법을.
제 열등감의 원천을 지워 버릴 방법을.
“너는 언제나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어. 너에게 난 투명 인간이나 마찬가지였지.”
페르안이 한 걸음, 레기안에게로 다가갔다. 레기안은 피하지 않았다.
그저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그런 네가 황제라는 뒷배를 얻어 날 밀어내고 헤르젠을 집어삼키려 한다고 한들 이상한 것은 하나도 없지 않겠어?”
“먼저 무례를 저지른 건 헤르젠 쪽입니다.”
레기안이 침착하게 반론했다. 그것마저 페르안의 심기를 어지럽혔다.
어느새 날카로운 검 끝이 레기안의 목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익명의 투고가 있었다. 네가 반란을 획책하고 있다는.”
“증거는 있었습니까?”
“증거는 필요 없어. 황제의 반응이 곧 증거다.”
감정에 휘둘려, 제 욕망에 휘둘려 이성적이고 논리적이지 못한 건 다름 아닌 페르안이었다. 레기안의 눈에 연민이 스몄다.
형님은 다 가진 사람이었다. 레기안이 가지고 싶었던 그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 그런데 왜 이 남자는 자신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던 걸까. 레기안이 보인 아주 사소한 행동들에까지 의미를 부여해 가면서.
그가 필요한 건 증거가 아니었다. 그저 끼워 맞출 수 있는 퍼즐 조각 몇 개만 있으면 충분했다.
“우리는 네 반란 의혹을 밝히고 네 신병을 넘겨 달라 요청했다. 하지만 황제는 거부했지. 그것부터가 이미 황제가 네 뒷배가 되었다는 증거 아니겠느냐.”
페르안이 한 발 더 내디뎠다. 바로 목 앞까지 와 있던 검 끝이 레기안의 목을 파고들었다. 얇게 베인 목에서 주르륵 피가 흘러내렸다.
“형님.”
“…….”
페르안은 말해 보라는 듯, 아래를 내려다보는 듯한 눈으로 레기안을 바라보았다. 레기안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루비나드를 만나고 나서 알았다. 자신에게 있어서 열등감이었던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는 것을. 사람은, 자신이 마음을 허락할 수 있는 한 사람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달리 볼 수 있다는 것도.
레기안은 루비나드를 만나 변했다. 죽은 것 같이 살아가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러니까.
“형님께서도 언젠가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그 마음에 깃들어 있는 마음들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라는 걸.”
레기안의 입가에 미소가 스몄다. 몹시도 어색한 미소였다.
그가 마음을 다해 만든, 제 핏줄 앞에 보이는 최후의 미소였다.
“제가 폐하를 유혹한 게 아닙니다. 폐하께서 절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멋대로 그분을 사모하게 되었을 뿐.
아아, 그런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레기안은 제 감정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그걸 안 것만으로도….
은색의 실선이 번뜩이며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