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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 (95)화 (96/115)

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96)

『 헤르젠의 제2 왕자, 레기안 폰 헤르젠의 신병을 요구한다.

그는 본국에 불온한 움직임을 보인 바,

이에 로간 제국과의 혼약을 파기하고 죄인을 본국 송환할 예정이다.

만약 거부하겠다면 상응하는 수단을 사용하여 송환할 것이다. 』

“…하, 하하.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군.”

정중함의 조각도 보이지 않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서신이었다.

설령 레기안이 그런 불온한 움직임을 보였다고 하더라도 제국과는 상관없는 일. 그런데 감히 제국의 황제에게 이런 서신을 보내다니 제정신이 아닌 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마지막의 협박을 보고 있자니 더더욱 기가 찼다.

“무례하오. 우리 왕의 요구를 헛웃음이 나온다는 말로 받다니.”

헤르젠의 사신은 불쾌한 눈으로 이죽거렸다. 깔보는 것이 명확한 눈.

흐음, 그걸 원하는 건가.

헤르젠의 왕은 둘째 치고, 왕세자는 그리 멍청한 인물이 아니었다. 제빌의 조사에 의하면 왕을 부추긴 것이 왕세자라고 했다. 그렇다면 분명 믿는 구석이 있을 터.

겉으로는 레기안을 탓하는 서신을 보내 놓고, 그 속에 스민 무례함과 사신의 방만함에 루비나드가 흥분해서 덤벼들기라도 바란 건가.

그래서 이득 보는 게 뭐지? 루비나드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득보다 실이 많은 이 짓을 하는 이유를, 도저히.

“결연을 요구한 건 짐이 아니라 헤르젠 왕국이오. 당장 후궁을 꾸릴 여유가 되지 않는다는 말에도 귀빈으로 대우하다가 후궁 구성 때 넣어 주기만 하면 된다고 했었지.”

느른한 목소리가 알현실 안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 느른함 속에 느껴지는 위압감과 살기가 만만치 않았다. 숙련된 기사 다섯을 상처 하나 없이 제압했다던 소문이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사신이 그렇게 생각할 정도의 기백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왕자가 헤르젠에 반기를 들 것 같으니 돌려달라? 그대들은 위대한 대로간 제국을 무슨 탁아소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보라색 눈동자가 요염하게 휘어졌다. 하지만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 내야 하는 사신에게, 그런 색기 따위는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이 자리에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참아 내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일단, 그대들의 요구에 짐도 요구할 게 있소. 레기안 폰 헤르젠 왕자가 반란을 꾸몄다는 직접적인 증거. 상식적으로 이 먼 타국에서 반란을 일으킨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지 않소? 아니면 설마.”

루비나드가 손에 들고 있던 서신을 툭, 사신 앞에 집어 던졌다. 유려하게 휘어진 보라색 눈동자가 싸늘하게 빛났다.

“짐이 그를 돕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

헤르젠의 사신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임무는 도발. 제국에게 받아 내야 할 것은 선전포고, 혹은 최소한 전쟁으로 끌고 갈 정도의 적의였다. 그러니 지금 충분히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는 것인데….

왜 이렇게 두려움이 치밀어 오르는 것일까.

“…비약하여 생각하시는군, 로간의 황제 폐하께서는. 확실히 여성들은 감정적이라는 말이 맞는 모양이오.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생각하는 걸 보니.”

제빌의 손이 꿈틀 움직였다.

흘끗 루비나드를 보니 웃는 얼굴을 무너뜨리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서늘한 살기는 기세를 더해 가고 있었다.

딱 한 번.

어차피 전쟁은 결정되어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다만 기왕이면 로간 제국이 비난을 받지 않고 넘어가는 쪽을 택할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 정도의 모욕을 참아 넘기는 것 역시 겁쟁이 소리를 듣기 십상일 테니.

딱 한 번만 더 그가 선을 넘으면 그 목을 베어 줄 생각이었다. 그 살기를 느낀 듯 루비나드가 흘끗 제빌을 보았다.

그 보라색 눈동자가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고 있었다.

“비약하여 생각하는 건 그대들이 아니오? 왕자가 여기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증거를 대라는데도 말을 돌리고, 계속 짐을 모욕하기만 하지 않나.”

후후, 하고 웃음을 흘린 루비나드가 몸을 일으켰다. 저벅, 저벅 하는 걸음 소리가 사신을 향했다.

그는 반사적으로 일어나려는 몸을 억누르는 데 최선을 다했다.

어차피 계집. 향후를 생각하면 감히 그를 상처 입힐 수는 없을 터. 그렇게 생각하며 후들후들 떨리는 팔로 찻잔을 집어 들려던 그 순간.

“짐이 모욕당했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아나?”

루비나드의 손이 사신의 어깨로 향하나 싶었더니, 좀 더 앞으로 향했다. 그녀는 그대로 남자의 목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커, 커헉…!”

“이 로간 제국 전체가 모욕당했다는 뜻이야.”

싸늘하게 내뱉는 목소리는 사신의 귀에 닿지 않았다. 생각보다 강한 힘에 두 손을 버둥거리며 목에 닿은 손을 떼어 내려 했다. 그가 있는 힘을 다해 발버둥 치자 잠시 힘이 풀렸던 손은, 방심하는 것과 동시에 다시 얽혀 왔다.

마치 거미줄 같다. 벗어나려 발버둥 치면 칠수록 엉겨 붙는 거미줄.

아슬아슬하게 숨통을 완전히 틀어막지 않는 선에서 힘을 주던 루비나드의 손이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수치를 모르고 흘러내린 타액이 그의 턱을 타고 뚝 흘러내렸다.

“그러니 그 잘난 머리통이 붙어 있길 바란다면 허튼소리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소, 올폰 경.”

루비나드는 고통에 몸을 웅크린 그를 벌레 바라보듯 내려다보았다. 그 싸늘한 눈동자에는 한 점의 온기도 담겨 있지 않았다.

사신은, 직감했다.

어쩌면 이건 잘못된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진 후였다.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절절히 느낀 것은 다음에 이어진 루비나드의 말을 들은 후였다.

“하긴.”

보라색 눈동자가 지금까지 중 가장 예쁘게 휘었다.

“어차피 다음에 만났을 땐 그 목이 붙어 있지 않을 테지만 말이야.”

* * *

로간 제국은 헤르젠 왕국을 이 지도 위에 남겨 두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한 나라를 멸망시키는 과정은 절대 녹록지 않았다. 길면 수년에 걸쳐 진행되기도 했다. 물론 루비나드는 이 작은 왕국에 그 정도의 시간과 수고를 들일 생각은 없었다.

“로간과 헤르젠의 전력 차는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오.”

평소의 정례 회의와 달리, 전쟁 발발로 인한 회의가 개최되었다. 어딘지 느슨했던 귀족들의 분위기가 팽팽한 긴장감으로 고조된 것이 느껴졌다.

루비나드 역시 평소와 달리 올곧은 자세로 황좌에 앉아 있었다.

“그런 벌레를 상대로 병법을 논하는 것조차 어리석은 일. 짐이 그대들에게 내릴 명령은 단 하나뿐이오.”

루비나드가 창밖을 가리켰다. 그곳은, 헤르젠이 있는 방향이었다.

“여름이 되기 전에 짐은 이 국토가 서방으로 더 넓어져 있기를 바라오. 그러니 그대들은.”

루비나드의 손가락이 자신을 향했다.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는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맺혔다.

“짐의 바람을 현실화시키도록.”

전율이 일었다. 여성이라 우습게 보던 그녀의 또 다른 모습.

지금 이곳에 있는 루비나드는 성별을 초월한 무언가를 품고 있었다. 모두의 충심을 한 몸에 모을 정도의.

맹장으로서의 루비나드.

루비나드는 모든 것을 압도하고 집어삼키면 된다. 그걸 위해서 필요한 건 제빌이 모두 준비해 줄 생각이었다. 그 파괴적인 발걸음을 흩트릴 수 있는 작은 돌멩이 하나조차 용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조금 급하게 일이 벌어지긴 했지만, 루비나드 즉위 초기부터 이미 준비는 해 오고 있었다.

전공을 올리지 못한 병사들은 소집 해제하여 경제 활동을 하게 하고, 반대로 전공이 좋은 병단에 더 큰 투자와 강도 높은 훈련을 제공했다. 압도적인 수의 병력으로 승부를 봤던 로간 제국이 병사의 질을 올리는 데 주력한 것이다.

그 효용에 대해 의문의 목소리를 내던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 역시 이 여름이 지나면 입을 닫게 될 것이다.

“압도하시오. 풀 한 포기 남기지 말고.”

마지막 한마디를 남긴 루비나드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귀족들 사이를 지나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본격적인 폭풍이 시작되었다.

* * *

“괜찮으십니까, 폐하.”

먼지와 피를 뒤집어쓰고도 루비나드는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얼굴에 감도는 피로함은 지우질 못했다.

걱정 가득한 제빌의 목소리에 루비나드가 엷게 웃어 보였다.

“무얼. 이 정도로 지쳐서야 로간의 기사라 할 수 있겠는가.”

“폐하는 기사가 아니십니다만.”

“검을 쓰는 이라면 누구나 기사 아니겠어?”

작게 한숨을 내쉰 제빌이 루비나드의 갑옷을 풀어 냈다. 가벼운 가죽 갑옷 차림인 그녀는, 다행히 이번에도 큰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곁에 딱 달라붙어 보호한 보람이 있었다.

하지만 안도의 한숨은 나오지 않았다.

“제발 경장비로 적진 한가운데에 돌진하는 짓은 그만둬 주십시오.”

걱정 어린 제빌의 목소리에 루비나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음? 멀쩡히 돌아오지 않았나. 마법 방어를 위한 망토도 둘렀고.”

이 사람은.

루비나드는 뛰어난 황제였다. 그런데 딱 하나.

황제라는 위치의 무거움에 대해서는 잘 이해하질 못했다. 제 명령에 따라 누군가가 아무 잘못 없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도, 자신이 죽으면 이 모든 것이 아무 의미도 없어진다는 것도.

논리나 이성이 통하지 않는 영역이 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게다가 이럴 때의 그녀는.

“폐하께서는 제국의 주인이십니다. 전쟁에 아무리 이겨도 폐하께서 다치거나 목숨을 잃으시면 아무 의미가 없어집니다.”

“내가 사라지면 제4 황자인 기르네스가 황위를 이으면 돼.”

너무나 냉정했다.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그녀의 말이 옳았다. 그녀를 대체할 이가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러면 제빌의 마음이나, 그녀를 믿고 목숨을 던지는 수많은 이들의 감정은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폐하.”

“행동하지 않는 우두머리는 신뢰를 받을 수 없어. 특히 나처럼 특이한 우두머리의 경우에는 더더욱. 이 전쟁을 통해 나는 내 존재 의의를 증명해야 해.”

루비나드의 말은 맞았다.

그녀가 여자라는 이유로 여전히 불신하고 있는 귀족들은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그들은 분명 루비나드를 인정하게 될 터였다.

“폐하는 확고부동한 황제이십니다.”

“알고 있어. 그 누구도 내가…. 아니지, 그대와 내가 이룬 것을 부정할 수 없어. 나와 그대는 이 나라에 번영을 가져왔고 안정을 가져왔지.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해.”

좀 더 압도적인 힘을.

루비나드가 본보기를 보여 주려는 건 다른 나라들이 아니었다. 바로.

“제발 이걸로… 오라버니께서 그 모든 것을 그만두어 주셨으면 좋으련만.”

루비나드는 또 오라비를 잃고 싶지 않았다. 같은 정비의 아래에서 나온, 이제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동복 남매.

“폐하.”

“…피곤하군. 그대도 이제 쉬도록 해.”

“잠드실 때까지 곁에 있겠습니다.”

“으음. 두 시간 뒤에 깨우도록 해. 그대도 쉬어야 하니.”

루비나드는 피곤한 듯 늘어지게 하품을 하곤 그대로 침대 위에 몸을 던졌다. 평소라면 씻지 않고 잠든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전장에서 그런 사치는 바랄 수 없었다.

제빌은 그런 그녀의 곁에 앉아 늘어진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푹 쉬십시오.”

이 전쟁을 빨리 끝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제빌은 제 수가 빨리 먹히기를 바라며 그녀의 등을 쓸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루비나드가 깊게 잠들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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