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95)
레기안 왕자가 근신을 명 받은 지 사흘이 지났다.
그동안 그는 루비나드의 명에 따라 충실하게 감금 생활을 영위했다. 방 안에 화장실도 욕실도 마련되어 있기에 나올 이유가 없기도 했다.
루비나드의 생각과 달리 그는 서신 한 통 쓰지 않았다. 헤르젠에서 오는 서신도 없었다. 그 누구와도 접점이 없는 채 시중드는 시녀들만이 종종 그 방을 들락거렸다.
“조용하군.”
루비나드가 다리를 꼬며 턱을 괴었다. 그 모습을 내려 보며 제빌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폭풍 전야 같습니다.”
“아니, 이미 시작되었어. 다만 아직 그 세력이 완전치 못해 조용할 뿐이지. 그들이 원하는 게 순수하게 레기안 왕자의 죽음이라면, 내가 도발에 넘어가 그를 해하는 순간 물러날 테지.”
“하지만 폐하는 그 도발에 넘어가 주실 생각이 없으시겠죠.”
“하! 당연한 거 아닌가? 누구 좋으라고 그네들 뜻대로 해 준단 말이야?”
애초에 그들이 진정한 왕족이라면 절대 전쟁을 즐겨선 안 된다. 죽어 나는 것은 그들이 아니라 왕국민들인 것이다. 그런데 안전한 곳에 숨어 있는 주제에 어디 감히 전쟁이라는 말을 입에 담는가.
루비나드의 머릿속에 한마디 말이 떠올랐다.
-전쟁은 장난감이 아니다.
여러 왕국을 멸망시키며 악명을 떨쳤던 아버지는, 자신보다도 호전적인 론디아스에게 그리 말했었다. 오라버니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어린 루비나드는.
-쉬이 가지고 놀아서도, 쉬이 버려서도 안 될 것이죠.
애초에 시작해선 안 된다. 하지만 만약 부득이 시작한다면 무조건 뿌리를 뽑아내야만 한다.
철저하게, 마음을 꺾고 신념을 꺾어 버릴 정도로 짓밟아야 후환이 없다.
후환을 남겨 두면 결국 피해를 보는 건 황족이 아니라 제국민들이었다.
인간의 목숨은 장난감이 아니다. 그 인간의 목숨이 대량으로 오가는 전쟁은 더더욱 장난감이 아니었다. 재미로 시작해도 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론디아스처럼 허세나 과시용으로 생각하는 건 더더욱 안 될 말이었고.
루비나드의 말도 이해하지 못한 론디아스는 찡그린 얼굴로 두 사람을 보았었다. 그리고 지금, 루비나드는 왜 오라버니가 그랬었던 건지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살아온 삶. 지금 있는 위치. 짊어진 것의 무게. 사람마다 다른 성격.
그 모든 것이 뒤섞여 하나의 사람을 구성한다. 달리 말하면 그 사람을 구성하는 요소 외의 변수가 생기면, 사람은 그걸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날의 론디아스와 루비나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처럼.
루비나드가 제게 구애했던 남자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처럼.
루비나드의 시선이 제빌에게로 향했다. 그는 언제나 그랬듯 올곧은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점의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인형 같은 눈동자로.
언젠가 그에 대한 마음이 사랑으로 바뀌는 날이 올까? 그렇게 되면, 자신도 그들처럼 변해 버리는 걸까. 떠날 때가 된 제빌을 붙잡고 떠나지 못하게 하려고 해선 안 될 말까지 하게 되는 걸까.
…그러고 싶진 않았다.
“제빌 경.”
“네, 폐하.”
“그대가 떠날 땐 내게 미리 언질이라도 해 주게.”
이건 또 갑자기 무슨 소리일까. 제빌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언젠가 그대가 국서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될 때 말이야. 마음에 드는 영애가 있다면 꼭 미리 내게 언질을 줘.”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테니까.
루비나드는 자신이 그렇게 감정에 휘둘리는 인간은 아니라고 믿었다. 하지만, 또 모르지.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 처하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시간이 필요했다. 웃으면서 제빌을 보내 줄 수 있는 시간이.
“…제가 폐하 곁을 떠날 리 없지 않습니까.”
“그대가 그랬지 않은가. 날 여자로 볼 일은 절대 없다고. 그러니 언젠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날이 오면 틀림없이 내게 이혼을 요구하겠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그날, 제빌에게 계약 결혼을 제의했던 날 그의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행여라도 그에게 정말로 집착하게 되기 전에 먼저 떠나 줄 수 있도록.
자신이 변하기 전에 그를 보내 줄 수 있도록.
어딘지 시무룩한 얼굴의 루비나드를, 제빌은 황당함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감정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 사실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조차 이해가 가질 않았다.
대체 왜 헤르젠 왕국의 꿍꿍이대로 해 주지 않겠다는 말을 하다가 이런 이야기로 흘러가게 된 거지?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하신 겁니까?”
“글쎄. 옛날 생각이 갑자기 나서. 론디아스 오라버니와 내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던 일이나, 내가 누군가를 이해하지 못했던 일들…. 그런 걸 생각하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어.”
사고의 흐름을 읽기가 어려웠다. 루비나드의 사고를 따라가지 못하게 된 건 오랜만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제빌이 겨우 입을 열었다.
“저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날이 오는 게 두려우십니까?”
“…으음.”
그날은 이미 도래했다.
루비나드는 이미 제빌을 잘 알 수 없게 되었다. 어쩌면 알게 되었다고 생각한 것부터 착각이었을지도 모르고.
그의 변모는 사실 처음부터 루비나드가 몰랐을 뿐, 원래 그런 모습이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루비나드의 마음에 깃든 이 마음도 어쩌면 처음부터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저, 그녀가 몰랐을 뿐.
분명 제빌과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날이 오면 두려울 것이다.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의 생각을, 마음을 읽을 수 없다는 건….
읽을 수 없는 걸 믿는다는 건.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두려운 건 따로 있었다.
“나는 그대와 지금 이대로 있고 싶어.”
분명 처음의 관계는 다들 나쁘지 않았다.
다프넬은 호의로 시작해 오랫동안 좋은 감정을 품고 지냈었다. 커드닐 역시 귀찮긴 했지만, 그녀에 대한 순수한 호의가 싫지 않아 나름의 호감을 품고 있었다. 아, 물론 에브니겔은 처음부터 최악이었지만.
가족도 그렇다. 론디아스와 엔도르빌 모두 존경할 만한 오라비들이었다. 그런데 변해 버렸다.
망가져 버렸다.
…왜?
“때로는 호의가 폭력이 되는 때도 있는 법이야, 제빌 경. 우리의 사이는 지금에서 더 멀어지지도 가까워지지도 않았으면 해. 만약 더 가까워졌을 때 그 관계가 망가지지 않을 것이라 그대는 단언할 수 있어?”
이건…, 이건 제빌의 잘못이었다.
루비나드의 마음에 있던 상처를 이용해 그녀를 고립시켜 온 건 제빌이었다. 그녀를 감히 탐하려 하는 벌레들이나 그녀의 자리를 위협하려는 돌멩이를 그녀 스스로 치우게 만들었다. 그때마다 그녀의 가슴에는 틀림없이 구멍이 뚫려 버린 것이다.
그 구멍이 그녀의 마음을 병들게 했다.
하지만 제빌은 동시에 희열을 느꼈다.
떠오른 것이다.
떠올라 버린 것이다.
그의 소망을 이룰 수 있는, 그녀가 앞으로 다시는 아파할 필요 없는 최고의 방법을.
그리고 아마도 그 방법은 루비나드에게 있어서….
“폐하.”
“음.”
“제가 변하리라 생각하십니까?”
“…아니, 난 그대를 믿어. 그대는 분명 변치 않고 내 곁에 있어 줄 테지.”
하지만.
루비나드의 인간 불신이 또 스멀스멀 기어올라 왔다. 한동안 잠잠했던 그것은 최근의 사건들을 통해 예전과는 비할 수도 없이 몸집을 불렸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제빌마저도 의심하기 시작했다.
제빌은 언제나 루비나드 앞에서 자신을 보여 주지 않는다. 언제나 이성적이고 냉철하다. 그 뒷모습을, 그녀가 다 알지 못하는 이상….
정말로 제빌은 변하지 않을까?
그 역시, 인간인데.
“거짓말을 하시는군요.”
흔들리는 보랏빛 눈동자를 놓칠 정도로 제빌은 둔하지 않았다. 그는, 책상을 돌아 그녀 곁으로 성큼 다가섰다. 한 발 한 발 제빌이 다가올 때마다 루비나드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게 설렘인지 두려움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폐하께서는 거짓말이 서투르십니다. 다 티가 나니까요.”
누가, 누구한테. 루비나드의 입술이 비뚜름해졌다.
제빌은 다 이해한다는 듯 엷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향해 상체를 숙였다.
“여러 가지로 힘든 일이 많으셨으니까요. 저마저도 의심하시는 게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제빌은 살며시 루비나드의 손을 잡아끌었다.
루비나드는 제 손등이 마치 계약서라도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약 결혼을 수락했을 때, 루비나드에게 내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리고 그녀를 지키겠노라 약속했을 때.
그때마다 제빌은 그녀의 손등에 입 맞추었고, 루비나드는 거부하지 않았다. 얼마든지 거부할 수 있었을 텐데.
그때마다 제빌의 눈동자에 시선이 못 박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저 무서울 정도로 애절하고,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뜨거운 눈동자에.
하지만 이번의 그는 쉬이 그녀의 손등에 입 맞추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손을 제 손으로 받쳐 든 채 말을 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니 폐하, 지금부터 절대로 저에게서 시선을 떼지 마십시오.”
제빌이 나른하게 웃었다.
마치 루비나드가 평상시에 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 짓던 웃음 같았다. 하지만 그 눈동자에는 오만함 대신 기쁨이 가득 차 있었다.
낯선 얼굴이었다.
루비나드에게는.
“얼마든지 의심하셔도 좋습니다. 제가 폐하께 말씀드리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하지만 폐하.”
봐 주세요, 폐하.
내 일거수일투족.
눈 깜빡임 하나까지도 의심하고 지켜보세요. 그리고 그 끝에 당신은, 당신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까지 당신을 위해 내버리는 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끝에 분명 폐하께서는 제게 말씀해 주시게 될 겁니다.”
제빌이 눈을 빛냈다. 그 발간 입술이 즐겁다는 듯 멈추지 않고 말을 자아냈다. 그 모든 것이 무서울 정도로 아름다워서 루비나드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저는 믿을 수 있다고.”
모든 것이 끝나면.
틀림없이 당신은 이제 그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 당신의 불신 속에서 오로지, 세상에서 단 한 명.
나만이 당신의 믿음을 받게 되겠지.
그러면 더 이상 나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질 겁니다. 당신을 잃을까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당신의 사랑이 있든 없든 이제 그건 중요하지 않아.
“그대만은 믿을 수 있노라고.”
한꺼번에 많은 말을 쏟아 낸 탓일까.
아니면 많은 진심을 쏟아 낸 탓일까.
입술이 화끈거렸다. 그 입술이 마치 화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제빌은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녀의 눈을 보고 내뱉는 또 하나의 다짐을 새기며.
자신의 목표를 새기며.
제빌은 엷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