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94)
정례 회의.
가장 큰 주제는 바로 헤르젠의 동향이었다. 루비나드도 언제나의 나른한 모습과는 다르게 날카로운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평소에도 꽤 위압감이 강한 편이었지만, 오늘의 그녀는 더 날이 서 있었다. 그 탓에 귀족들도 쉬이 입을 열지 못하고 가만히 그녀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헤르젠의 동향은 이상입니다.”
제빌의 담담한 보고가 끝나자 회의장은 침묵에 휩싸였다. 귀족들을 둘러보던 루비나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곤 입을 열었다.
“역대 다른 황제들과 달리 짐은 즉위 후 한 번도 전쟁을 치른 적이 없었지. 그에 대해 경들이 우려하고 있었던 것도 알고 있네.”
몇몇 귀족들의 얼굴이 티 나게 질렸다. 빤히 보이는 반응에도 루비나드는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대들의 불안도 불식시켜 줄 필요가 있겠지. 짐은, 헤르젠의 칼끝이 제국으로 향하는 순간 그들의 숨결 하나조차 이 대륙에서 지워 낼 생각이네.”
압도적인 승리.
그리고 멸망.
루비나드는 그 두 가지를 선언했다. 귀족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럼, 헤르젠에서 온 왕자는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누군가가 그리 물었다. 루비나드가 목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자, 최근 목소리를 내는 일이 거의 없던 슐라민 공작이 묘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짐은 도리어 그대가 그런 걸 질문하는 저의가 궁금하군.”
“폐하께서 처음으로 후궁에 맞이할 것이라 말씀하신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의 조국이 제국에 칼끝을 들이댄 이상, 그 역시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
사실 루비나드 역시 고민하고 있었다. 레기안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레기안 역시 모든 것을 알고 제국으로 온 것일까. 아니면 그는 모르는 사이에 무언가가 바뀌어 이런 일이 된 것일까. 그는 협력자일까, 아니면 희생양일까.
만약 후자라면.
“그가 책임져야 할 일이 있다면, 짐 역시 그에게 책임을 물을 생각이네.”
모호한 말이었다.
귀족들 역시 눈치챘다. 상황에 따라 루비나드는 레기안 왕자를 그냥 둘 생각이었다. 감을 잡은 귀족들의 눈동자가 바빠졌다. 서로를 돌아보며 눈빛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과 달리 슐라민은 루비나드에게 직언했다.
“헤르젠의 행태 자체가 왕자가 책임져야 할 일이지 않습니까.”
“그 책임의 유무는 짐이 정하는 것이오.”
그냥 감정에 휘둘리는 것뿐인가? 마음이 약해서인가?
그들이 지금까지 봐 온 황제는 그러지 않았다.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건.
설마, 그가 정말로 황제의 총애를 쟁취해 낸 것일까? 몇몇 귀족들이 속닥거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순식간에 커지는 웅성거림에 루비나드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헤르젠의 목적이 무엇인지 확실치 않은 이상 짐은 그에게 아무런 해도 가하지 않을 것이오.”
만약 헤르젠이 원하는 게 그의 죽음이라면, 루비나드는 그걸 도와줄 마음은 없었다. 그런 의도의 이야기였지만 웅성거림은 더 커지기만 했다.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하우즌 경, 잉글라인 경은 짐의 집무실로 오도록.”
헤르젠과 영지가 인접한 두 후작을 불러낸 루비나드가 불쾌한 듯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루비나드의 표정에 웅성거림이 조금 잦아들긴 했지만, 여전히 불신 섞인 얼굴들이었다. 그 시선을 무시하며 루비나드가 몸을 일으켰다.
그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제빌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스몄다.
루비나드가 할 행동은 정해져 있었다. 이미 모든 준비가 완벽하게 끝났으니까. 그리고 이 전쟁의 끝에 귀족들은.
이제 감히 다시는 루비나드를 여자라고 무시할 수 없으리라.
그날을 기대하며 제빌은 루비나드의 뒤를 따랐다.
* * *
레기안 왕자가 겨우 방에서 나왔다.
루비나드는 그가 알현을 청한다는 말에 바로 서류 업무를 중단하고 소알현실로 자리를 옮겼다. 무슨 생각인지 제빌 역시 그녀를 막지 않았다.
소알현실에 침묵이 흘렀다.
“…수척해졌군.”
루비나드가 먼저 운을 뗐다. 하지만 레기안은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러고도 한참 후에야 그가 겨우 고개를 들었다.
“폐하.”
“음.”
“먼저 사죄드리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습니다.”
그녀를 향한 감정으로 일렁이던 눈은, 이제 다양한 감정이 뒤섞여 혼란스러워 보였다. 말을 꺼내 놓고도 쉬이 입을 떼지 못하는 그를, 루비나드는 그저 기다려 주었다.
“제가 헤르젠에서 온 서신을 받아 본 일은, 이미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음.”
“곧바로 폐하께 보고를 드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점, 비록 뒤늦게지만 사죄드립니다.”
레기안이 깊숙하게 고개를 숙였다.
한 나라를 지배하는 일족으로 태어나 타인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은, 사실 거의 없는 일이었다. 해서는 안 될 일이기도 했다.
그의 머리는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는 헤르젠이라는 나라를 대표하는 자였으니까.
평소라면 눈살을 찌푸렸을 루비나드였지만, 오늘만큼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그저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저도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데다 이게 무슨 일인지 파악이 되지 않아서 늦어졌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파악이 끝났나?”
“…솔직히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왜 갑자기 형님께서 그러시는지. 하지만….”
조국과 제국.
레기안은 어느 편에 서야 할 것인가. 그 사이에서 레기안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아무리 그래도 제 부모 형제와 자국민을 버리고 제국에 서는 것은, 왕족으로서의 자신이 납득하질 못했다.
하지만.
레기안을 보낸 건 아버지와 형님이었다. 그런 제국을 향해 칼끝을 들이밀겠다는 건, 죽음을 각오하라고 말하는 건.
…먼저 버려진 것은 자신이었다.
“이미 예상하고 계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버지께서는 로간 제국과의 전쟁을 일으킨 후, 그걸 수습한 공으로 형님에게 양위하실 것이라 합니다.”
너는 내부에서 협력해라.
서신의 내용의 핵심은 그것이었다.
레기안의 고백에도 루비나드는 고요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저는… 헤르젠의 왕자로서 그 명에 따랐어야 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레기안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자신을 죽이려는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진심으로 제국과 비견해도 헤르젠이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셨다. 하지만 형님은 아니었다.
그리고 서신을 쓴 건 형님이었다.
유일하게 그에게 신경을 써 주었던 형님조차 그의 죽음을 바라고 있었다.
협력하든 협력하지 않든 두 나라 사이에 문제가 생기는 순간 제 목숨은 없어지는 것과 다름없지 않나. 그걸 모를 레기안이 아니었다.
처음 이 제국에 올 때부터 각오하고는 있었다. 자신을 치우기 위해 보낸 것이라는 것쯤. 그리고 오히려 거기에 감사하고 있었다. 덕분에 이곳에서 루비나드를 만났으니까.
처음으로, 자신을 사람으로 대해 주는 사람을.
존중해 주는 사람을.
이 감정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레기안은 그녀의 곁에 있고 싶었다. 평생 자신을 무시하고 없는 사람 취급하던 이들이 아니라, 루비나드의 곁에.
그리고 어차피 죽음을 맞이할 거라면 그들보다는 차라리.
“폐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죽으라면 죽을 테고, 첩자가 되라면 첩자가 되겠습니다. 원하시는 대로.”
루비나드는 표정 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 감정도, 생각도 읽어 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상관없다는 듯 레기안은 숨을 죽인 채 그녀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제빌을 향해 눈짓했다. 제빌이 고개를 끄덕이자 루비나드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자세를 흐트러뜨렸다.
“그대는 참으로 솔직한 사람이야. 꾸밀 줄을 모른다는 게 짐의 눈에도 보여.”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 확실해졌다.
레기안은 무덤덤한 성격인 게 아니었다. 다만, 그러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환경이었을 뿐. 거기에서 벗어난 지금 그는 이토록이나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외치고 있었다.
언젠가 제빌도 이렇게 될 수 있을까. 루비나드는 잠시 고개를 쳐든 잡생각을 떨쳐 내려는 듯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짐은, 이게 그대를 노린 것이라 생각하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잘 이해가 가질 않아. 그대를 이미 볼모로 보내 놓은 상황 아닌가. 굳이 이런 짓을 저지르면서까지 그대를 제거하려는 이유를 모르겠어.”
굳이 로간 제국과 척을 져 가면서까지 이래야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왕세자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한 것이라면, 굳이 제국을 건드리지 않고 헤르젠이 무난하게 제압할 수 있는 다른 곳을 선택하는 편이 나았을 텐데.
왜 하필 로간 제국일까.
루비나드가 여제라서? 즉위 후 한 번도 전쟁을 치르지 않아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레기안 외의 다른 목표를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짐에게 이빨을 들이댄 이상 헤르젠을 이 대륙 위에 남겨 둘 마음이 없어.”
당연한 일이었다. 레기안이 움직이지 않자, 루비나드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었다.
아직은 이 남자를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다만, 짐은 그대를 믿고 싶어.”
루비나드의 말에 레기안이 눈을 떴다. 그 눈에 깃든 것은 놀라움과 혼란이었다.
“헤르젠이 원하는 대로 해 주고 싶지도 않아. 그들이 그대의 죽음을 원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계속, 루비나드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하던 레기안이 처음으로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루비나드는 그의 시선을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짐은 꽤 심술궂은 편이거든. 그러니 그대에게는 당분간 근신을 명하도록 하지. 그대는 이제 제국의 감시하에 놓이게 될 거야.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화장실에 몇 번 갔는지까지 모두 짐에게 보고되겠지.”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당장 레기안을 감옥에 가두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으니까.
“당분간은 귀찮겠지만 조금만 참도록.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루비나드가 몸을 일으켰다. 제빌이 그녀를 뒤따랐다.
레기안은 그저 가만히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루비나드가 먼저 방을 나서고 제빌이 뒤이어 나오면서 문을 닫았다. 그러자 루비나드가 가늘게 눈을 뜨며 말했다.
“그를 잘 살피도록 해.”
지금은 배신당했다는 분노에 휩싸여 저렇게 이야기하지만, 막상 루비나드가 정말로 조국을 멸망시키면 달라질지도 모른다. 아무리 싫은 곳이라고 해도 그에게 있어서는 조국이니까.
혹은 이미 공작을 시작한 걸지도 모른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아남아야 내부의 정보를 빼돌리는 것도 수월해질 테니.
루비나드는 그를 믿고 싶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어쩌면 제빌과 자신의 새로운 친우가 되어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남자였으니까, 더욱. 제빌과 닮은 사람이기에 더더욱.
하지만.
“네.”
제빌은 알고 있었다. 루비나드는 절대 그를 믿지 않는다.
루비나드가 유일하게 믿는 것은.
“제 보고서가 그의 처우를 결정하게 될 테니까요.”
청회색의 눈동자가 요염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