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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 (91)화 (92/115)

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92)

악토그라토리아와의 교섭이 비밀리에 마무리되었다.

“동식물의 종자와 교역 루트 확대가 가장 큰 성과로군요.”

“음. 악토그라토리아에서만 채취되는 동식물의 종자는 특히나 귀중하니까 말이야. 그에 관한 연구와 개량은 그대에게 일임하지.”

“마탑과 연계하여 진행해 보겠습니다.”

“교역 루트 쪽은 재상에게 맡기도록 해.”

“네.”

제빌의 몸이 하나인 이상 일의 적절한 분배는 중요했다. 특히나 이렇게 갑작스럽게 일이 추가되는 경우에는.

제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명된 서류 뭉치를 손에 품에 안았다.

“베카르티 교수와의 다음 알현은?”

“일주일 뒤로 예정되어있습니다.”

“성과는 좀 있다던가?”

“고전 중인 것 같더군요. 그래도 마법석을 만들어 내는 방법에 관한 연구는 분명 필요하니까요.”

“성공만 하면 분명 앞으로의 사업 확장에 큰 도움이 될 테니. 그가 필요하다고 하는 건 아낌없이 지원해 주도록 하게.”

제빌이 정중하게 예를 갖추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비나드가 생각났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레기안 왕자는?”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제빌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가족을 제외하고는, 제빌 외의 사람이 이름으로 불린 일은 없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루비나드는 그를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헤르젠의 왕자라고 부르기엔 어쩐지 좀 그렇다면서.

어차피 곧 사라질 자인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제빌은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최근엔 서고에도 거의 가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래…?”

“헤르젠에서 온 서신이 좀 신경 쓰이는군요.”

얼마 전 레기안 왕자는 헤르젠에서 온 서신을 받았다. 그 후로 방에 틀어박힌 모양이었다.

루비나드가 직접 찾아간 적도 있었지만, 그는 몸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만남을 거부했다. 최근엔 조금이지만 자신에게 마음을 열어 주었다고 생각했는데. 루비나드가 씁쓸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헤르젠의 동향은?”

“양위 준비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 조직을 재정비하거나 왕세자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럴 때 가장 전쟁이 일어나기 쉽지. 국내의 불만 중 일부를 밖으로 표출해 내려 하거든.”

“네. 그래서 군사 동향도 주시 중입니다.”

루비나드가 턱을 괴고 책상 위의 서류를 손끝으로 톡톡 쳤다.

아무리 헤르젠이 과격한 성향이라고 해도 악토그라토리아와 로간의 관계가 어느 정도 안정된 지금, 굳이 이쪽으로 전쟁을 걸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 나라는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

“궁내에서 레기안 왕자에게 무슨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지?”

“네. 시중드는 이들도 모두 왕자를 각별히 생각하고 있더군요. 아무래도 후궁에 들어가는 것이 확정된 일이니 더 그렇겠지요.”

“으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주의하도록 해. 처음으로 후궁 행이 확정된 인물이 타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꽤 반발을 사고 있는 것 같으니까.”

“주시 중입니다.”

주시 중이기만 할까. 제빌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스몄다. 하지만 그건, 너무 순식간에 사라져서 책상 위에 시선을 두고 있던 루비나드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다.

“국내 귀족들의 동향은?”

“최근 꽤 소란스럽더군요. 무언가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데 워낙 비밀스럽게 준비해서 꼬리를 잡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곧 보고할 만한 단서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루비나드는 시종장인 클라렌을 이용하여 비밀리에 정보상을 불러들였다. 제빌의 손과 뺨에 남은 상처. 그걸 남겼을 것이라 예상되는 겔라드 디 다휜의 뒤를 캐기 위해서였다.

정보상이 가져다준 이야기는 그녀의 상상을 초월했다.

“그래….”

석연찮은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루비나드를 바라보며 제빌은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루비나드의 귀에 들어간 정보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애초에 ‘어디까지’ 그녀에게 보여 줄 것인지 결정한 것이 제빌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첫 보고서에서는 ‘그 남자’의 존재를 대놓고 말하진 않고 그림자만 내비쳤지만….

루비나드라면 분명 눈치챘겠지. 계속 마음에 걸려 하고 있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폐하.”

제빌이 성큼 루비나드에게 다가갔다. 비뚜름하게 일그러진 그녀의 입가를 살짝 손끝으로 매만진 후 턱을 괸 손을 제 손에 쥐었다. 그리고 제 진심을 담아 살며시 그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폐하께선 아무것도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모든 것은 제빌의 계산 안에 있었다.

그녀를 괴롭히는 것, 그녀를 위협하는 것, 그녀를 지지하는 것. 셀 수 없이 많은 조각이 제빌의 머릿속에 있었고, 제빌은 그걸로 퍼즐을 맞추었다. 루비나드와 자신에게 있어 가장 완벽하고 보기 좋은 그림 퍼즐을.

지금 당장은 일그러져 보일지 몰라도, 분명 그 끝은.

“제가 곁에 있지 않습니까. 폐하께서 인정한, 이 나라 최고의 인재가.”

설령 만들어 낸 허상이라고 하더라도.

허상에 실증이 더해지면, 결국 진실이 되는 것 아닌가.

“믿어 주십시오. 폐하께 해를 끼치려 달려드는 모든 불똥은, 절대 폐하께 닿지도 못할 테니.”

청회색의 눈동자가 햇빛 아래에서, 어둡고 음침하며 요염하게 빛났다.

* * *

“으, 으음.”

낯선 기척에 루비나드가 뒤척였다. 제빌은 침착하게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다시 깊게 잠들기를 기다렸다. 따스한 체온에 오래 지나지 않아 다시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는 그녀의 모습을, 사랑스러움으로 가득한 눈으로 바라본 제빌이 몸을 일으켰다.

가급적이면 새벽엔 보고를 올리지 말라고 했지만, 예외가 하나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제빌에게 가장 중요한 서신이.

“…….”

제빌이 말없이 손을 내밀자, 검은 복면을 쓴 이가 서신을 내밀었다. 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데도 그가 움직이자 루비나드가 다시 움찔하는 게 보였다.

제빌이 살짝 눈살을 찌푸리더니, 이내 엷게 웃었다. 코끝을 찡긋거리는 얼굴이 지나칠 정도로 귀여웠기 때문이었다. 제빌이 이제 됐다는 듯 손을 내젓자 복면의 남자는 순식간에 창밖으로 사라졌다.

“…으음, 제빌…?”

“네.”

“왜 그러고… 있어….”

“날이 조금 더워서 창가에서 바람을 쐬고 있었습니다.”

“으음…. 이리 오게.”

루비나드가 톡톡, 제 옆자리를 두드렸다. 잠결에 하는 행동이 왜 이토록 가슴을 설레게 하는지. 어차피 곁에 누워 봤자 끌어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걸 알면서도 제빌은 홀린 듯 다가갔다.

아니, 그건 너무나 배부른 소리다.

처음에는 그저 바라만 봐도 좋았다. 그녀가 자신을 전혀 신경 써 주지 않아도, 그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럴 수만 있다면 평생을 바쳐도 좋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곁에 있고 싶다는 마음은, 그녀가 자신의 자리를 암묵적으로 인정해 주면서 더 부풀었다.

루비나드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다. 그러던 중 커드닐이 나타났다. 그의 존재는 제빌에게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게 하는 방아쇠가 되었다. 제빌은 그녀를 여자로 사랑하고 있었다.

태양 같은 존재, 동경하던 존재가 이성이 된다는 건 생각보다도 괴로웠다. 자신이 절대 닿을 수 없는 곳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사교계에서는 루비나드의 약혼자가 누가 될 것인지와 제빌이 얼마나 한심하고 보잘것없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느라 바빴다.

수많은 남자 중 하나라도 좋다. 그녀의 남편이라는 자리를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설령 평생 그녀에게 남자로서 사랑받지 못하더라도 만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제빌은 인간이길 포기했다.

뭐든지 했다. 그녀의 곁에 있기 위해서. 그녀의 남편이라는 위치에 앉기 위해서.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이룬 지금, 다시 욕심이 몸집을 부풀렸다.

수많은 남자 중 하나는 싫다. 그녀에게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고 싶다. 그녀가 사람인 이상, 누군가를 결국 사랑할 수밖에 없다면 그게 내가 되길 바란다. 그녀가 누구에게도 마음 한 조각 주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을….

자신이 그렇듯이.

“…제가 깨웠습니까?”

“으음…. 곁이 서늘해서 일어난 것 같아.”

눈을 감은 채 그렇게 중얼거리던 루비나드는, 제빌이 옆자리에 눕자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의 뺨에 제 손을 대었다.

“이러면… 시원하지?”

생글 웃는 그 얼굴이 너무 무방비해서, 귀여워서. 제빌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뺨으로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만질 용기는 나지 않아 그 갸름한 선 위를 덧그리듯 손을 움직였다.

루비나드의 손이 이번엔 그의 목덜미로 향했다. 몸에 열이 오른 탓에 뜨겁게 달아오른 곳에 그녀의 손이 닿자 확실히 시원했다.

“그대는 열이 많으니까…. 그… 시원한 바람이 나오던 마법 도구를 준비해 두라 해야겠어.”

몽롱한 정신 탓에 이름이 기억나질 않는지, 그렇게 중얼거린 루비나드가 이내 다시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었다. 아마 내일 눈을 뜨면 이런 대화를 한 것조차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잠에 취한 루비나드는 종종 그랬으니까.

제빌은 목덜미에 닿은 루비나드의 손 위를 살며시 제 손으로 덮었다. 작고 사랑스러운 손. 하지만 노력의 결실로 가득 차 있는, 존경할 만한 손.

겨우 닿은 이 손에 만족하지 못하는 자신은….

“폐하….”

깊이 잠든 루비나드는 제빌의 목소리도 듣지 못한다. 이미 제빌의 존재에 그만큼 익숙해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게 너무 기쁘면서도 슬펐다.

자신은 여전히 피곤해서 거의 기절하듯 잠들 때가 아니면 곁에서 가슴 두근거리며 밤을 새우고 있는데. 그녀에게 자신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존재인 것 같아서.

하지만.

-심장이 너무 뛰어서 아플 정도라고 했네!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는 걸까. 아니면, 둔하던 루비나드가 사랑을 알게 되면서 ‘남자’와 밀착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된 것뿐일까.

제빌의 마음에서 기대감이 툭 치고 올랐지만, 그걸 비웃듯 자조가 기대감을 내리눌렀다.

너 같은 걸 폐하가 사랑해 주실 것 같아? 네가 한 짓들을 생각해 봐. 뻔뻔하기도 하지. 네가 사람이라면 절대 폐하께 사랑을 갈구해선 안 돼. 알고 있잖아? 폐하의 마음을 그토록 아프게 만든 네가 감히 사랑을 기대하다니!

쓰레기. 너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구제 불능의 쓰레기야.

아아. 알고 있다. 그녀를 위한다는 이유로,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그녀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아프게 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겠지.

사실은 알고 있다. 그 모든 것은 그저 그녀의 곁에 있고 싶어서 저지른 자신의 욕심일 뿐이라는 걸.

그래도.

“저는… 욕심을 부려 보려 합니다.”

언젠가 품 안의 작은 몸에, 제 욕망대로 접하고 싶다. 그녀의 곁에 있고 싶다. 그 모든 것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딱 하나의 길밖에 없었다.

저는 당신의 마음을 원합니다, 폐하.

그걸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정도로.

어둠 속에서 청회색의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한참이나.

한참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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