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91)
“폐하!”
루비나드가 서고에 들어서기 무섭게 레기안이 엷은 미소로 맞이했다.
기척에 많이 예민해진 모양이군. 하긴, 최근 황궁 안의 불온한 공기를 그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었다. 루비나드 역시 엷은 미소로 그에게 화답했다.
“그대는 정말 한결같군. 이 시간에도 서고에 있을 줄은 몰랐네.”
“아, 그건….”
최근 루비나드가 그를 거의 찾지 않은 탓에 얼굴조차 보기 힘들었다. 얼마나 바쁜지 식사 시간에도 간단한 샌드위치 같은 것으로 때운다고 했다. 게다가 에브니겔 황자의 일이 쉬쉬하면서도 궁 전체로 퍼졌기에, 레기안도 그 소식을 들었다.
폐하는 괜찮으실까. 걱정이 마음 가득 차올랐다.
어쩌면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자신을 찾아오는 이 순간을.
책에는 집중도 하지 못하고 계속 입구만 곁눈질하면서.
“그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괜찮으십니까?”
걱정스러운 얼굴로 루비나드의 상태를 살피던 레기안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비나드가 입을 열었다.
“괜찮다니, 뭐가?”
“그…, 습격을 당하셨다고 들어서.”
“하여간. 시녀들의 입방정은 알아줘야 해. 누군지 물어도 대답해 주지 않을 테지?”
“…….”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떨구는 폼이, 제빌과 썩 닮아 있었다. 루비나드는 피식 웃곤 손에 들고 있던 책을 건넸다.
“이건….”
“어제 잠시 나갈 일이 있어서. 그대에게 주는 선물이네.”
“저한테….”
레기안이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루비나드가 내민 책을 받아 들었다. 달달한 느낌이 드는 표지에는 「당신의 곁에 있기 위해서라면」이라는 제목이 양각되어 있었다.
“서고에 있는 연애 소설은 이미 다 읽었다지? 이건 어제 나온 거라니 아무리 그대라도 읽지 못했을 거야.”
“…감사합니다, 폐하.”
그런데 받아 든 레기안의 표정이 묘했다. 그냥 기뻐 보인다기엔 눈썹을 일그러뜨린 채 눈물을 뚝뚝 흘리기라도 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슬프다거나 기분 나쁜 표정과도 조금 달라 보였다.
이건 대체 무슨 감정일까.
가만히 바라보던 루비나드가 입을 열었다.
“이미 읽은 건가?”
“아니요. 아닙니다. 기쁘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라….”
레기안은, 지금껏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생활에 필요한 건 성에서 모두 준비해 주었지만, 이런 식으로 레기안을 생각해 무언가를 선물해 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모두가 왕의 진노를 피하고 싶어서 레기안도 피했으니까.
처음이었다. 누군가에게 이런 식으로 호의를 받은 건.
“혹시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가? 그럼 다른 책으로….”
“아니요. 절대 아닙니다. 그저….”
이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레기안조차 알 수 없었다. 그가 생전 처음으로 느껴 보는 감정이었으니까.
그래서 대답할 수가 없었다. 말을 흐린 채, 글썽이는 눈동자로 루비나드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루비나드 역시 어째서인지 그 눈동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폐하, 이제 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두 사람의 사이에 감돌던 적막을 깬 것은 차가운 목소리였다. 냉정하고 담담한 목소리가 끼어들자, 루비나드의 시선 역시 소리가 난 쪽으로 흘렀다.
레기안은, 그게 못내 아쉬웠다.
“으음. 하루 일을 미룬 여파가 이렇게 크군.”
“다행히 일정을 옮기는 데 다 동의해 주어서 다행이지 않습니까. 덕분에 오늘 하루만 고생하시면 끝날 수 있습니다.”
“…그래. 다행이지.”
차라리 나눠서 하는 게 더 나았을 것 같은데. 뭐, 어쩔 수 없나.
시무룩해져서 어깨를 으쓱거리는 루비나드와 달리 제빌의 입가에는 미소가 스며 있었다. 혹시나 이런 일이 있을까 싶어서, 루비나드의 입에서 ‘왕자에게 선물’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알현 일정을 수정했다.
원래는 며칠에 걸쳐서 무리 없이 보충하고자 했는데, 오늘 하루에 모든 일정을 다 몰아 넣어 버린 것이다. 원래는 오후에만 있던 일정이 오전에까지 밀려 올라왔다.
덕분에 서류 정리시간도 당겨져 레기안과의 대화를 방해할 명목이 생겼다.
문밖에서 계속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제빌은, 레기안의 표정 역시 정통으로 볼 수 있었다. 분명 위험인물이 아니었다. 그래서 안심했다. 그런데도 루비나드는 결국 그마저도 제게 호의를 갖게 만들어 버렸다.
당신이란 사람은….
“그럼, 왕자. 오늘은 식사를 함께할 수 없을 것 같더군. 내일 만나도록 하지.”
“…네, 폐하.”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잔뜩 있는 듯한 얼굴로 루비나드를 바라보던 레기안이 이내 고개를 숙였다.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에 제빌은 엷게 웃으며 묵례했다.
그리고 보란 듯이 루비나드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서고를 빠져나갔다.
“제빌 경.”
“네?”
“여기는 거리가 아닌데. 굳이 이런 자세를 취할 필요 있는 건가?”
“싫으십니까?”
루비나드가 슬쩍 고개를 들어 제빌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왜인지 그는 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어제의 외출이 나름대로 효과가 있었던 걸까. 언제나 낡은 리본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는, 어제의 천으로 만든 크라바트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게 어째서인지 썩 만족스러웠다.
“너무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그렇게 가깝진 않잖습니까.”
“가까워.”
“…….”
생글생글 웃고 있던 제빌의 얼굴이 침울해졌다. 무서울 정도로 빠른 표정 변화에 당황한 루비나드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 아니야. 정말로 싫은 게 아니라…. 그….”
“싫은 게 아니라?”
제빌은 루비나드가 그를 남자로 보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니 어쩌면, 사실대로 말하면 앞으로 이런 행동을 그만두어 주는 게 아닐까.
“그대가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면.”
“네.”
“…인단 말일세.”
제빌은, 어지간해선 루비나드의 말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놓칠 정도로 작디작은 목소리였다. 아니, 거의 소리가 나지 않았다.
제빌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입을 열었다.
“너무 작게 말씀하셔서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으으. 그걸 다시 말해야 하는 건가.
루비나드 나름대로 용기를 내서 했던 말인데.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무조건 큰 소리로 말해서 다시 말할 일이 없게 만들려 했는데.
“심장이 너무 뛰어서 아플 정도라고 했네!”
“…….”
놀란 제빌이 얼어붙었다.
뭐지, 방금 말씀하신 건. 내가 너무 상상이나 망상을 많이 한 나머지 헛것까지 들리나? 아니면 백일몽?
멍하니 루비나드를 바라보는 제빌의 눈에,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보였다.
“그, 그러니까 앞으로 너무 달라붙지 말게.”
제빌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그녀의 얼굴이 시선을 못 박은 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기에.
* * *
“폐하.”
“…….”
“이걸로 됐을까요?”
“저기, 제빌 경.”
제빌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들었다. 고개를 갸웃하는 그 모습이 얄미워서 루비나드는 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대, 내가 아까 한 부탁을 잊었나?”
“뭐였었죠?”
“좀… 떨어져 달라고 부탁했었는데.”
“그랬던가요?”
싱글싱글 웃는 얼굴이 몹시도 얄미웠다.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응. 이제라도 알았으니 제발 떨어져 주겠어?”
“싫습니다.”
“…왜?”
“서류를 아직 확인해 주지 않으셨으니까요.”
“그건 책상 너머로 보여 줘도 충분하지 않나.”
“거꾸로 보면 제가 읽기가 힘드니까요.”
“그럼 내가 거꾸로 볼 테니 제발 좀.”
루비나드의 곁에 딱 달라붙어서, 상체를 숙여 그녀의 얼굴 바로 옆에 제 얼굴을 들이댄 제빌이 연신 생글거렸다. 루비나드의 목소리에서 약간의 노기가 느껴지는데도. 아직 선을 넘을 정도가 아니라는 걸 확신했기 때문이리라.
“제가 곁에 있으면 안 됩니까?”
“아까 말했잖나.”
“기억이 안 납니다.”
물론, 그럴 리가 없었다. 제빌은 루비나드가 한 말 한마디 한마디를 모두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그저 다시 듣고 싶을 뿐이었다.
그걸 위해 일부러 더 달라붙었는데, 루비나드는 얼굴만 붉힐 뿐 그 한마디를 해 주질 않았다.
“아무튼, 좀! 저리 좀….”
계속 시치미를 떼는 제빌 탓에 화가 난 루비나드가 홱 고개를 돌려 제빌을 보았다. 제빌이 그녀의 말을 듣기 위해 고개를 기울이고 있던 탓에 순간 그 뺨에 입술이 스칠 뻔했다.
화들짝 놀란 루비나드가 의자를 뒤로 물렸다.
“가라니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루비나드가 크게 발소리를 내며 반대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가듯 제빌도 자세를 바로 하고 루비나드를 보았다.
“그대가 안 가겠다면 내가 가지!”
“…아니, 제가 장난이 지나쳤습니다. 자리에 앉으세요, 폐하.”
제빌이 그녀의 손목을 끌자, 루비나드는 순순히 따라가 제 의자에 다시 앉았다. 제빌이 책상 반대편으로 자리를 옮기자 그제야 서류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
당신이라는 사람은, 정말.
그렇게 가까이 붙어 있는데 고개를 돌리면, 당연히… 그렇게 되지. 왜 그걸 모르는 걸까. 머리도 좋은 분이면서.
의문이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해답도 떠올랐다. 분명 제빌의 탓이겠지. 남들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라고 조언한 것 때문일 것이다. 언제나 거리를 유지하던 루비나드에게 지금 같은 상황이 있었을 리 없다.
조금 더 고개를 기울이고 있을걸. 그랬다면 어쩌면 닿았을지도 모르는데.
진중한 얼굴로 서류를 확인하는 루비나드의 얼굴에서는 분명 물들었던 홍조의 흔적조차 찾기 힘들었다. 그게 또 아쉬웠다.
저로 인해 얼굴을 붉히는 루비나드는, 제빌의 안에 있는 수많은 루비나드 중에서도 특히나 사랑스럽고 예뻤는데. 앞으로 자주 붙어야 하나? 그랬다가 또 진노를 사면 안 되는데.
“제빌 경.”
“네?”
“이건 이대로면 될 것 같아.”
“네.”
루비나드가 서류를 챙겨 든 제빌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뭔가 더 할 말이 남으신 건가?
제빌이 얌전히 그 눈동자를 바라보며 기다리자 루비나드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제빌 경.”
“네.”
“그대가 날 여자로 안 본다는 건 잘 알았어. 하지만 그… 일단은 생물학적 성별이 남녀이긴 하니 조금은 주의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 그대가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루비나드의 말을 해석하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는 제빌조차 순간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잠시 더 생각한 뒤에야 깨달았다.
아무래도 루비나드가 뭔가를 오해한 듯했다. 제빌이 오기를 부린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루비나드가 그를 밀어낸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게 또 귀엽다.
“…폐하.”
“음?”
“저희는 부부이기도 한데 뭐 어떻습니까.”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루비나드가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제 얼굴을 쓸었다.
…당분간 계속 못 알아듣는 척을 해야겠다. 제빌은 그렇게 다짐하며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생글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