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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 (89)화 (90/115)

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90)

“으읍.”

루비나드의 눈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입술 역시 평소보다도 훨씬 더 붉었다. 아니, 약간 부어오른 것처럼도 보였다.

눈물을 글썽이는 그 눈매가 유혹적이기도 했고, 귀엽기도 했다.

제빌은 잠시 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채 떨어지지 못하고 일렁이고 있는 눈물방울을 닦아 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보이나?”

“그러기에 제가 남기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루비나드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음식을 남기지 않았다. 그게 걱정되어서 몸에 해로울 것 같은 건 시키지 않겠다고 말한 건데. 정 안 되면 남기겠다며 약속을 하기에 시켜 주었더니 결국 이 사달이 났다.

“일단 디저트 가게를 먼저 가죠.”

“윽. 이제 먹는 건 됐어.”

“매운 걸 가라앉히는 데는 우유나 크림이 좋습니다.”

“…그, 그래?”

속이 따갑고 메스껍기까지 했다. 여기에 크림이 들어가면….

혹시 토하는 게 아닐까 걱정되긴 했지만, 제빌의 말이니 믿어도 될 것 같았다. 루비나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빌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미리 봐 두었던 디저트 가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으으.”

그사이, 루비나드는 드문드문 앓는 소리를 흘렸다. 문득 제빌의 눈동자가 살짝 일그러졌다.

좀 더 말렸어야 했나. 저렇게 괴로워할 줄 알았다면 좀 더 강하게 말했을 텐데. 제빌이 다 먹겠다고 해도, 이런 걸 그대에게 먹게 할 순 없다며 고집을 부리는 그녀가 사랑스러워서 끝까지 말리질 못했다.

그래도 말렸어야 했는데. 뒤늦은 후회가 그의 마음을 가라앉혔다.

“정말로 색다른 경험이었어.”

“…마지막을 그리 좋지 못하게 장식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

“무슨. 내가 고집부린 것 아닌가. 그대가 사과할 필요는 없네.”

그렇게 말하며 억지로 웃어 보이는 얼굴이 가련해 보였다. 물론 그렇게 말하면 루비나드는 펄쩍 뛰거나 반쯤 비웃는 얼굴로 아니라고 할 테지만.

제빌이 작게 한숨을 내쉬자 루비나드가 다시 그를 위로하려 입을 열었다.

“게다가 이게 마지막도 아니잖나. 오늘의 마무리는 그대에게 잘 어울리는 리본을 찾는 것이니.”

“…네.”

그래서야 루비나드는 괴로운 경험을 하고 자신만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게 되니 나온 의미가 없다. 이 일로 질려서 루비나드가 다신 같이 밖으로 나오지 않겠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지? 현실성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생각만 머리에 맴돌았다.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그를 올려 보던 루비나드가 시선을 돌려 주변을 돌아보았다.

점심시간이 꽤 지난 거리는 아까보다 한산해졌다. 아마도, 아까는 일하다 식사를 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까지 섞여 있어 더 붐볐던 모양이었다. 사람이 줄자 열기도 줄었지만, 대신 혼을 쏙 빼놓던 번잡함도 가라앉았다.

차분하게 주변을 둘러보던 루비나드의 눈에 한 노점이 보였다.

이제 겨우 열 살이나 넘었을까. 몸집이 몹시 작은 아이였다. 주변의 어른들 사이에 홀로 서 있는 그 아이는, 작아서 도리어 눈에 띄었다. 루비나드의 눈동자가 그 아이의 앞에 있는 가판대로 향했다.

아이는 염색된 천 몇 개만 앞에 놓은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신경 쓰이십니까?”

루비나드만을 바라보고 있던 제빌이 그 시선을 놓칠 리 없었다. 그가 묻자 루비나드가 엷게 웃었다.

“으음. 저 천, 질은 그리 좋지 않으나 색이 몹시 예쁘게 나왔구나 싶어서.”

“그렇군요.”

안타깝게도 제빌에게는 그런 소양이 전혀 없었다. 루비나드가 다프넬에게 호감을 품는 걸 보고 예술 쪽도 배워 보려 하긴 했었다. 하지만 가르치는 교사마다, -죄송하지만 공자께 이 이상 무언가를 가르쳐 드려도 의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공자의 작품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기교가 뛰어나도 안 되는 것이 있는 게 예술입니다. 공자께서는 노력가이시니 기교는 늘 수 있겠지만….

-…확실히 말해서 전혀 재능이 없으십니다.

마지막에 고용했던 교사는 그렇게 단언하며 저택을 떠났다.

확실히 그럴지도 모른다. 제빌의 의도가 불순한 것이었으니, 감수성 풍부했던 그 교사들이 무언가 느낀 게 아닐까. 그 후로 예술 쪽을 배우는 건 포기했다.

그래서 루비나드가 가리키는 천을 보면서도 별 감상이 들지 않았다. 다만 확실히 폐하의 말대로 천의 질이 좋지 않구나 싶을 뿐.

“저런 걸 좋아하십니까?”

“음? 으음…. 굳이 따지자면 별로 관심 없는 편이지만.”

사실 천도 천이지만 아이의 모습이 더 눈에 걸렸다. 깨끗하게 정돈된 천과 달리 아이 자신은 꽤 지저분한 몰골이었다. 더럽다기보다 정돈되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잠깐 보고 갈까?”

“매운 건 이제 괜찮으십니까?”

“음.”

루비나드가 걸음을 돌리자 제빌이 그 뒤를 따랐다. 가까이에서 본 아이의 모습은 더 안쓰러웠다.

“어, 어서 오세요….”

주눅이 잔뜩 든 것이, 어릴 때의 제빌이 떠올랐다. 예쁘장한 얼굴도 그렇고. 루비나드는 최대한 상냥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 천은 그대가 물들인 것인가.”

“네, 네!”

제 딴엔 부드러운 말투로 물은 거겠지만, 보통의 영애는 그런 말투를 쓰지 않는다. 하지만 제빌은 굳이 고쳐 주지 않았다.

“…나는 이게 마음에 드는구나.”

제 눈동자 색과 꼭 닮은 보라색이었다. 무엇으로 물들인 것인지 하얀 원과 보라색 원이 번갈아 가며 점점 커지는 모양새였다. 언제나 고급 염료로 물들인 루비나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다소 옅은 색의 염색이었다.

아이가 덜덜 떨며 입을 열었다.

“귀하신 분이 하실 만한 것이 아닙니다.”

루비나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 아이는, 이게 돈을 받고 팔 만한 물건이라 생각해서 장에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왜 물건을 파는 걸 거부하는 것일까. 루비나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이것은 귀하지 않다는 뜻이냐?”

“그, 그렇습니다.”

“왜 그리 생각하느냐.”

아이는 더듬거리면서도 차분하게 제 의견을 말했다.

“처, 천도 좋지 않은 것이고…. 염색도 견고하지 않아 물이 빠지기 쉽습니다.”

루비나드가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이 제품의 특성인 거지, 이 물건이 귀하지 않다는 이유가 될 순 없었다. 루비나드가 엷게 웃으며 되물었다.

“그런가. 그리고?”

“그리고….”

아이의 입이 멈췄다.

왜 이 귀족 아가씨는 이걸 사려 하는 걸까. 만약 나중에 이염되거나 색이 빠지기라도 하면 제 목을 칠지도 몰랐다. 귀족들이라는 건 언제나 제멋대로인 법이니까.

하지만 그걸 대놓고 말할 용기는 없었다. 눈치만 보는 아이에게 제빌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

“아가씨께서는 그대의 염색을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겁니다. 나중에 문제가 생길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 약속드리겠습니다.”

제빌이 제 지갑에서 반짝이는 금화 하나를 꺼내 아이에게 건넸다. 아이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손사래를 쳤다.

“이런 건 받을 수 없습니다.”

“제빌 ㄱ, 아니, 제빌. 그건 너무 과하네.”

루비나드는 확실히 세상 물정에 어두웠다. 하지만 이 금화 하나가 은화 백 개의 가치를 지니고, 은화 하나가 동화 백 개의 가치를 지닌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물건의 값으로는 지나쳤다.

“…도와주고 싶은 게 아니셨습니까?”

아이에게 들릴까, 제빌이 목소리를 낮춰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간질간질한 목소리에 루비나드가 살짝 몸을 떨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무작정 돈을 주는 게 도움을 주는 건 아니야. 이 물건의 가치에 맞는 금액을 지급하는 게 맞아.”

사람이라는 건 무상의 호의를 받으면 처음엔 고마워한다. 그 마음이 끝까지 이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사람이라는 건 감사를 잊기 쉬운 생물이었다. 처음에는 호의에 감사를 표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그걸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일할 생각은 않고 떨어질 콩고물만을 기다리게 된다.

어차피 나는 불쌍하니까. 나는 이런 호의를 받아 마땅한 존재이니까.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사실상 끝나는 거라고 봐야 했다.

뭐랄까. 사회적 존재로서.

“사람에게 힘을 주고 응원이 되는 건, 그 가치에 맞는 대가를 지불했을 때야.”

그렇다면 당신은 내게 왜 그랬던 걸까.

루비나드는 제빌의 가치에 맞는 호의를 베풀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보다 더 약하고 음습한 존재였다. 하지만 루비나드는 그에게 가능성을 이야기했다.

제빌은 처음으로 더 나아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처음 받은 기대에, 그는 부응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게 모든 것의 시작이었는데.

“이 천이 몹시 마음에 드는구나. 그대가 팔지 않는다면 오히려 곤란할 것 같아. 가격을 말해 주지 않겠나?”

어린아이는, 묘한 눈으로 루비나드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루비나드에게 천을 넘겼다. 루비나드는 제 지갑을 뒤져서 아이가 말한 금액을 맞춰 주려 애쓰고 있었다.

두 사람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제빌이 가만히 눈을 내리떴다.

그리고 이내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 * *

“정말 이걸로 괜찮나?”

“네.”

“하지만 전에 쓰던 것과는 질적인 면에서 꽤 차이가 나는데.”

제빌 역시 아이의 가판에서 제 눈동자 색과 비슷한 천 조각을 하나 샀다. 의아해하는 루비나드를 향해 제빌이 입을 열었다.

-이게 좋습니다.

-뭐?

-폐하께서 사 주시기로 한 리본, 이걸로 사 주십시오.

왜 갑자기 마음이 변한 걸까. 루비나드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시종 무뚝뚝한 그가 계산 직전에 그런 말을 한 이유를.

“괜찮습니다. 마음에 듭니다.”

마차의 흔들림에 몸을 맡긴 채, 제 목에 두른 리본을 만지작거리던 제빌이 루비나드를 보았다. 그녀는 타이로 사용하진 않았으나 가슴 쪽의 주머니에 손수건처럼 접어 넣어 두었다.

같은 물건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채워지는 자신이 있었다.

루비나드는 그 마음을 알기는 할까.

“제빌 경.”

“네?”

“이런 걸 ‘커플템’이라고 하던가?”

“…네?”

뜻밖의 단어에 제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루비나드는 그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시녀들이 그러더군. 부부나 연인이 같은 물건을 소지하는 걸 커플템이라고 한다고. 결혼반지도 일종의 커플템이라고 말이야.”

루비나드가 왼손을 들어 올려 제 가슴께에 놓았다. 주머니 사이로 엿보이는 보라색의 손수건과 손가락 위에서 반짝이는 블루 다이아.

루비나드가 싱긋 웃어 보였다.

“커플템이 또 하나 생겼군.”

“…….”

당신은, 언제나 내가 필요로 할 때 원하는 이야기를 해 준다.

하지만 그 안에 나에 대한 사랑은 없다. 나와 같은 마음에서 하는 게 아니다. 그걸 알면서도 당신께서 나에게 그런 말을 해 줄 때마다 기대하는 자신이 우습고 혐오스럽다.

그런데도.

나는 또 기대하고 만다.

“…그러게요.”

제빌이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겉보기엔 한없이 상냥한 미소였지만, 어째서일까. 루비나드에게는 그 웃는 얼굴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슬퍼하는 얼굴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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