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89)
“정말로 괜찮아?”
“괜찮습니다.”
“이상한 것 같은데.”
평상시 입지 않는 옷이라 낯설게 느껴진 것일까. 루비나드가 연신 고개를 갸웃하며 제 옷차림을 살폈다.
검푸른 원피스는 그녀의 종아리께까지 내려왔다. 소매 끝과 옷깃, 그리고 허리춤에서 새까만 프릴이 하늘거렸고, 옷깃을 장식한 새하얀 자보 타이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눈에 띄는 적발을 가릴 요량으로 베일 달린 모자를 썼는데, 까만 베일 뒤로 보이는 붉은 머리카락이 도리어 눈길을 끌었다.
제빌이 입은 옷이 수수하지만 좋은 원단을 사용한 것이라, 그와 비슷한 수준의 신분으로 보이려 맞추다 보니 예상보다 화려한 옷이 많았다. 그중에서 가장 수수한 것을 고른다고 골랐지만….
“정말로 잘 어울리십니다.”
역시나 이번에도 옷이 루비나드의 덕을 입어 빛나 보였다.
하긴, 그녀가 입으면 어떤 옷이라도 이렇게 될 테지.
“그대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겠지.”
어릴 때부터 편한 옷을 입어 버릇했던 루비나드이기에 영 어색했다. 그래도 정식 드레스보다는 훨씬 낫기에 얌전히 입긴 했지만.
“근데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 같은데.”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인데.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제빌이 설명할 말을 고르는 사이 주변을 둘러보던 루비나드가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여기가 좋겠어.”
다양한 시선이 날아들었다.
그중 제빌을 가장 기분 좋게 만든 건 남자들의 질투 어린 시선이었고, 가장 기분을 나쁘게 만든 건 루비나드를 향한 탐욕 어린 시선이었다. 순순히 끌려가 줄까 생각했던 그가 마음을 바꾼 건 그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폐하.”
“음?”
“귀족이 아니라도 성인 남녀가 길거리에서 손을 잡고 다니진 않습니다.”
“아, 그런가?”
루비나드가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놓았다. 잠시 생각하던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 둘 다 반지를 끼고 있지 않나. 결혼한 부부로 보지 않을까?”
“부부는 손을 잡기보다는….”
제빌이 루비나드의 곁에 서서 슥, 좁은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어깨에 닿기 직전에 그 손이 파르르 떨렸다는 것을 그녀는 알까.
혹시 쳐 내시면 어쩌지. 기분 나빠하시면? 눈썹을 찌푸리며 치우라고 명령하실지도 모른다. 온갖 나쁜 상상이 머리에 가득 차오른다.
물론, 그리하셨을 때는 장난이라 웃어넘길 생각이었다. 그렇게 긴장으로 벌벌 떨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을 때, 루비나드는.
“…….”
곤란하다는 얼굴로 제빌의 손을 바라보았다.
어깨를 감싸 안았다는 것은 몸이 밀착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언제나 안겨서 잠들긴 하지만, 많은 사람 앞에서 이렇게 붙어 있는 건 처음이었다. 그 색다른 경험에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사람들이 오가는 소음 속에서 왠지 제 심장 소리만이 크게 들렸다. 온갖 냄새가 가득 차 있는 거리인데 제빌의 향기만이 유달리 강하게 다가온다. 많은 사람의 시선보다도 제빌 한 사람의 시선이 더 따갑게 느껴졌다.
“싫으십니까? 손을 뗄까요?”
이 남자는 왜 이런 걸 묻는 걸까. 그럴 바엔 차라리 하지 말지.
심장이 콩콩 뛰는 소리가 귀를 계속 울린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아니, 도리어.
“…괜찮아. 부부로 보이려면 어쩔 수 없지.”
그녀 스스로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이해가 가질 않았다. 꼭 부부로 보여야 할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는데.
제빌이 물끄러미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보다 싱긋 웃었다.
“그럼 가죠.”
일부러 마차를 옷 가게에 두고 걸어온 보람이 있었다. 루비나드에게 향하던 더러운 시선이, 질투로 변해 제게 오는 것을 느끼며 제빌이 입꼬리를 올렸다.
우스운 일이었다. 그녀를 가둬 두고 혼자서만 보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히는가 하면, 이렇게 그녀와 다정한 모습을 보이며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기도 했다. 그 상반된 욕망이 어떻게 한 사람의 마음에 존재할 수 있을까.
“식당은 여기서 먼가?”
“아니요. 조금만 더 걸어가면 됩니다.”
그녀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오랫동안 사람들 사이에 있는 건 위험했다. 그래도, 일부러 평상복을 입은 친위대원들을 곳곳에 배치해 뒀으니 이 정도는 괜찮겠지. 두 사람은 대낮의 대로를 느긋한 걸음으로 즐겼다.
“사람들이 많군.”
“예. 가장 번화한 거리니까요.”
“모든 거리가 다 이처럼 번화하면 좋을 텐데.”
당연히 이뤄질 수 없는 소망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루비나드는 진심으로 그렇게 바랐다.
마음 같아선 가난이 없는 나라를 만들고 싶다. 누구나 높은 질의 삶을 누릴 수 있게 해 주고 싶다. 모두가 평등하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누구도 굶주릴 일 없고 아플 일 없이.
약자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 있다면.
“그러면 그건, 번화라고 부르지 않고 일상이라고 부르게 되겠지요.”
제빌의 나직한 한마디에 루비나드가 피식 미소 지었다.
마음에 드는 말이었다. 특별이 아니라, 일상이 된다는 말. 언젠가 정말로 그렇게 되면 좋을 텐데.
“그대는 가끔 좋은 말을 하곤 해.”
“가끔, 만입니까?”
제빌의 눈초리가 새초롬해졌다. 가늘어진 눈이 어쩐지 요염해 보여서 루비나드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아, 저기인가 보군.”
“말을 돌리시는군요. 저한텐 말 돌리지 말라고 하셨으면서.”
“끄응.”
제가 한 말이 비수가 되어 돌아온다. 루비나드는 불만 섞인 얼굴로 앞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대는 쓸데없이 너무 예리해.”
“그렇습니까?”
제빌은, 어쩌면 자신보다도 자신을 더 잘 알지도 모른다. 오래전부터 해 왔던 생각이었다.
문득 보라색 눈동자가 살짝 가라앉았다.
그런 그가 루비나드의 말을 못 알아들었을 리 없다. 그가 남자로 보인다는 의미를 담은 그 말을.
그는 루비나드를 여자로 볼 리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루비나드의 한마디를 끝내 모르는 척, 아니, 기분 나쁜 티까지 냈다. 그런 걸 보면 분명히 이 감정은 가져선 안 될 감정이었다.
친우인 제빌을, 그런 눈으로 보는 건 그만둬야 하는데도.
“그대가 나빠.”
“네?”
자꾸 하지 않아도 될 스킨십을 하니까.
가까이 다가와서 너무 예쁘게 미소 지으니까.
루비나드의 모든 걸 알고 거기에 맞춰 주려 하니까.
…루비나드를 지키려 하니까.
그 모든 것이 루비나드를 변하게 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란 사람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것이라고 믿어 왔던 루비나드에게, 설렘이라는 걸 줬다.
정리하려 해도 또 다가와서 예쁘게 웃어 버리니 가라앉힐 수도 없었다.
“이럴 때의 그대는 꽤 얄미워. 다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할 때.”
그건 오해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확실히 제빌은 루비나드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최근의 루비나드에 대해서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녀는 제빌의 관측과 계산에서 어긋난 언행을 너무나 많이 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도 전에 식당에 도착했다.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는군.”
“꽤 사람이 많은 모양이네요.”
루비나드가 말을 돌리자, 제빌도 하는 수 없이 거기에 대답했다. 루비나드는 제빌을 올려 보며 엷게 웃고는 제 손으로 식당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번화가라고 생각했던 거리보다도 훨씬 더 큰 소란과 열기가 그들을 맞이했다. 루비나드는 제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던 음울한 생각도 잊은 채 놀란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라색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거린다. 입구에 선 채 주변을 둘러보는 그녀에게, 누구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다들 무언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종업원은 커다란 쟁반 위에 접시를 몇 개나 올린 채로 바쁘게 뛰어다녔고, 손님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보따리를 풀며 음식을 먹기 바빴다. 종종 주변을 둘러보는 이들도 있긴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한 인물을 찾으면 그와의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굉장하군.”
앓는 듯한 소리로 감탄을 내뱉은 루비나드의 시선이 다시 바쁘게 움직였다. 이러다간 자리를 잡지 못할 것 같아, 제빌은 그녀의 어깨를 살짝 끌었다.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시지요.”
“어? 으, 음. 자리가 있을까?”
“네.”
루비나드가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제빌은 가장 먼저 그녀가 앉을 자리부터 물색했다. 다행히 가장 구석진 자리가 하나 남아 있었지만, 문제는 호위로 온 기사들이 앉을 곳이 없었다. 벽에 선 채 술 한 잔을 들고 이야기를 하는 이들도 적지 않으니 알아서 잘 처신하겠지.
제빌은 루비나드를 감싸 안은 채 빈 자리로 향했다.
빽빽하게 들어찬 테이블을 비집고 들어가 겨우 자리에 앉은 루비나드가 살짝 상기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곳은 항상 이런가?”
“저도 와 본 적이 몇 번 없긴 하지만…. 올 때마다 이랬습니다.”
“굉장해. 아주 활기가 넘쳐.”
루비나드는 새 장난감을 얻은 아이 같은 표정이었다. 눈은 놀라 휘둥그런데 입술은 활짝 웃고 있었다. 그 표정만으로도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여기에 올 가치가 있었다.
“드셔 보시고 싶은 건 있으십니까?”
테이블에 마련된 낡은 메뉴판을 꺼내 루비나드에게 주자, 겨우 그녀의 시선이 밑으로 내려왔다. 메뉴판을 훑던 그녀가 고개를 내저었다.
“무슨 메뉴인지 하나도 모르겠군.”
“그럼…, 아침에 닭고기 수프를 먹었으니 점심때는 해산물 위주로 시켜 볼까요?”
“음. 그대에게 맡기겠어.”
루비나드는, 대부분 부드러운 음식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조미료가 강하지 않은 걸 좋아한다.
문제는 이 식당에 그런 음식이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폐하의 취향에 맞을 만한 음식은 별로 없군요.”
“음…. 새로운 경험을 해 보는 거니, 음식도 평소에 먹지 않던 것을 먹어 보도록 하지. 이건 무엇인가?”
루비나드가 메뉴판에 적힌 글씨 중 하나를 짚자, 제빌이 재료부터 요리법까지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이나 메뉴판을 연구하고 무엇을 먹을지에 대해 토론했다.
“…뭐 하시는 거지?”
“음식 이름을 잘 몰라서 고민하고 계신 거 아닐까요.”
“도와드리러 갈까?”
몇몇 기사들은 다행히 자리에 앉았지만, 일부는 제빌의 우려대로 앉을 수가 없었다. 눈에 띄지 않게 술을 시키긴 했지만, 차마 마실 순 없어 술잔을 손에 들기만 한 채 벽에 기대어 있던 이들 중 하나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의 곁에 있던 젊은 기사가 고개를 저었다.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너무 오래 계시면 위험할 수 있잖아.”
“…저기 좀 보세요.”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댄 채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때로는 격한 동작으로 무언가를 설명하기도 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젊은 기사가 흐뭇한 듯 미소 지었다.
“저렇게 보기 좋은데 괜히 방해하지 마세요. 정 안전이 걱정되면 좀 더 주변을 경계하시면 될 일 아닙니까.”
젊은 기사의 말에 몸을 일으키던 중년의 기사가 멈춰 섰다. 확실히….
국서 전하를 위해서라도 여기선.
“…매의 눈으로 살펴라. 절대 일 생기면 안 돼. 일 터지면 다시는 두 분 못 나오시는 거야.”
“당연히 알죠. 선배님이나 농땡이 치지 마세요.”
“너 인마, 내가 언제 농땡이를 쳤다고…!”
중년의 기사가 목소리를 높이자, 신경 쓰였는지 루비나드가 그들을 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젊은 기사가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방해하지 마시라니까요.”
“윽…!”
분한 듯 이를 빠득 간 중년의 기사가 홱 고개를 돌렸다. 이놈을 상대하고 있을 시간에 주변을 더 살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기사들 사이에 있었던 작은 다툼은 전혀 모르는 듯,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두 사람은.
“매운 양념? 얼마나 매운 건가?”
“폐하께서는 드셔 본 적 없을 정도의 맵기일 겁니다.”
“으음, 흥미가 솟는군. 도전 의식이라고 해야 할까.”
“…그럼 이건, 도저히 못 먹겠으면 남기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음식을 남기면 안 되지.”
“그럼 못 시켜 드립니다.”
여전히 메뉴에 대한 토론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