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88)
“데이트…요?”
“음. 오후 알현을 취소하고 함께 나가도록 하지.”
폐하가? 일을 미루고? 데이트를?
제빌의 머리가 생각을 멈췄다. 받아들이기 힘든 키워드가 많은 탓에 제대로 굴러가질 않았다.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제빌의 모습을, 거부로 받아들인 것인지 루비나드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싫다면….”
“싫지 않습니다.”
그 멎어 버린 사고로도 그녀가 취소의 말을 내뱉자 먼저 입이 움직였다.
일단 말을 내뱉고 나니 제빌의 머리도 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데이트라면….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상단에 좀 갔다 오도록 하지.”
“상단에요?”
“아니면 상업 지구도 괜찮고.”
제빌은 제 손에 들린 리본을 내려다보다가 루비나드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의 시선 역시 리본과 제 얼굴을 오가고 있었다.
그런 건가.
제멋대로, 머리로는 하지도 않은 기대를 품은 채 두근거리던 가슴이 가라앉았다. 언제나 있는 일이지만, 이 가라앉는 순간의 싸늘함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안 그러셔도 됩니다.”
“응?”
“리본, 신경 쓰여서 그러시는 거 압니다. 안 그러셔도 됩니다, 폐하.”
역시나 그렇게 말하나. 예상했던 반응이다. 루비나드는 고개를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마음에 걸리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것만은 아니야. 정말로 그대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그래.”
툭, 하고 심장이 내려앉는다. 그녀가 이런 말을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을 때마다 제빌의 마음은 하늘 높이 치솟았다 이내 가라앉곤 했다.
그런 의도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또 심장이 두근거린다.
“폐하.”
“그리고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 보고 싶어질 때가 있지 않나. 실용화한 물건들이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잘 팔리긴 하는지. 아, 그리고 서점에도 들러 보지. 헤르젠의 왕자에게 줄 선물도 살 겸.”
가라앉다 못해 늪 속으로 파묻힌다. 왜 이 타이밍에서 레기안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일까.
제빌의 가라앉은 눈을 보지 못한 것인지 루비나드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궁의 서고에는 그가 기호하는 소설이 많지 않으니 말이야. 연애 소설은 이미 다 읽었는지 다른 소설을 읽고 있더군. 새로 나온 소설이 있으면 사다 주는 것도 괜찮겠어.”
알고는 있다. 그녀는 지금, 제빌의 리본을 사기 위해서 상점가에 가는 게 아니라 이런 목적도 이룰 수 있다고 강조하는 것뿐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또 지긋지긋한 질투가 고개를 쳐들었다.
그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왕자가 꽤 마음에 드신 모양입니다.”
“마음에 들었달까. 신경 쓰이지 않나.”
“왜요?”
제빌답지 않은 거친 말투였다. 놀란 루비나드가 고개를 들자 자신을 내려 보고 있는, 끝도 없이 깊고 차가운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언제 이렇게 가까이 온 것일까.
루비나드가 저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왜라니?”
“왜 왕자가 그렇게 신경 쓰이십니까?”
그건… 그대와 닮았으니까.
그를 보고 있으면 제빌이 떠올랐다. 최근에 여러 표정을 보여 주게 되면서 더 그랬다. 처음에는 주눅 들어 침울한 표정밖에 보여 주지 않던 제빌이, 점차 마음을 열고 그녀에게 여러 표정을 보여 주었던 그때가 떠올랐다.
처음에는 친우가 별로 없는 제빌이 그와 잘 지내길 바랐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과도 좋은 친우가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뿐인데.
그걸 제빌에게 직접 말하기는 꺼려졌다. 그녀가 그를 남자로 보고 있다는 말을 둘러 전했을 때도 제빌은 불쾌해 보이지 않았던가. 그런지 얼마나 됐다고 또 이런 이야기를 하면 분명 기분 나빠 할 테니까.
잠시 고민하던 루비나드가 겨우 대답을 꺼냈다.
“이 황궁에 그를 챙길 사람이야 그대와 나뿐이지 않나.”
“시녀들이 잘 챙겨 주고 있습니다.”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럼 어떤 의미입니까?”
제빌이 한 발 더 루비나드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물러났을 때와는 달리, 큰 보폭의 한 걸음이었다. 두 사람의 사이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그걸 피해 또 걸음을 뒤로 물리다 보니 등 뒤에 벽이 느껴졌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는 신호였다.
청회색 눈동자가 제 품에 갇힌 루비나드를 온전히 담았다.
늘 이렇게 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보석보다도 화려하게 빛나는 이 보라색 눈동자에 자신만이 가득 차고, 자신의 눈동자에는 그녀만이 가득 찬다. 누군가가 이 작은 머릿속에 가득 찰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오로지 서로만이 존재하게 될 수 있다면.
그러면 당신도 나를.
아니, 어쩌면 그래도 당신은 나를.
참 신기한 일이었다. 누군가를 그녀의 앞에서 치워 낼 계략이라면 머릿속에 한가득 떠올릴 수 있는데, 그녀에게 사랑받는 데 필요한 계략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마다 머리를 가득 채우는 건 그가 그녀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 리 없다는 현실감 가득한 자조뿐이었다.
“그는 폐하께 어떤 의미입니까?”
그녀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면, 그 머릿속이라도 환히 들여다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녀가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다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미움받지 않을 수 있는지도 알고 있다. 어떻게 해야 미움받을 수 있게 할 수 있는지도.
하지만 알 수 없는 게 있었다.
그녀가 누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특히나 그녀가 호의를 가지는 인물이 너무 적었던 탓에 연구할 수 있는 사료가 부족했다.
루비나드가 레기안에게 가지고 있는 호의는 어느 쪽일까.
이성에 대한 것?
아니면 언제나처럼 그라는 사람 자신에 대한 것?
평소라면 느긋하게 관찰하며 루비나드의 행동이나 표정을 읽어 냈을 터였다. 하지만 그가 나타난 후 루비나드는 변했다. 여자의 얼굴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만든 게 레기안이라면.
어쩌면 제빌이 느긋하게 관찰하고 있는 사이 그녀의 마음이 온전히 그를 향하게 될지도 모를 일 아닌가.
“그와는… 친우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
진심이었다. 제빌과 닮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라는 사람 자체가 루비나드에게 또 기대를 품게 했다.
이 사람은 믿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제빌처럼 언제나 제 곁에 있어 줄, 오랜 동반자가 되어 줄지도 모른다.
남색의 속눈썹이 가만히 내려앉았다.
“저로는 부족합니까?”
“응?”
“저는… 폐하로 족한데.”
제빌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반쯤 충동으로 내뱉은 말이 과연 그녀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그녀는 어떻게 생각할까.
잠시 멍하니 제빌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루비나드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더니, 제빌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러고 보니 두고 온 일이 있었어.”
“내일 하시면 됩니다.”
“아니야. 오늘 꼭 해야 하는 일이었어.”
“동행하겠습니다.”
“괜찮아. 벌써 시간이 늦었잖나! 그대는 쉬도록 해.”
“…….”
누가 봐도 이 자리를 벗어나려는 변명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제빌은 순순히 그녀를 놓아 주었다.
대답을 듣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항상 사람을 믿고 싶어 했다. 그토록 배신당했으면서도 여전히. 그런 그녀에게 자신만으로는 부족할지도 모른다고 늘 생각해 왔다.
그래서 완벽하려 했다.
그녀의 좋은 조언자가 되려 했고, 좋은 부하가 되려 했고, 좋은 친우로 있고자 했다. 그녀가 호감을 느꼈던 이들의 행동을 따라 하면서. 그가 그 모든 이들의 역할을 채워 주려 했는데.
그게 부족했다고, 그녀는 역시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는 대답이 나온다면 제빌은 무너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대답을 듣기 두려웠다.
“으, 음. 그럼 갔다 오겠네. 늦을지도 모르니 그대 먼저 자도록 해.”
허둥지둥 발걸음을 옮기는 그 뒷모습이, 자신에게서 멀어지려 하는 그녀의 모습이 보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제빌은 다시 입을 열었다.
“빨리 돌아오세요, 폐하.”
“가능한 한 빨리 오겠네.”
“이제 폐하와 함께가 아니면…, 저는 잠들 수 없으니까요.”
금방이라도 꺼질 듯 연약한, 마치 촛불 같은 목소리에 루비나드가 뒤를 돌아보았다. 제빌은 마치 버려진 어린아이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처량한 얼굴로 루비나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마음이 약해졌다.
“…아니, 역시 내일 해도 될 것 같기도 하군.”
루비나드가 내뱉은 한마디에 제빌의 표정이 바뀌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던 얼굴이 환하게 피어났다.
마치 시들었던 꽃이 다시 피어난 것처럼.
“그럼 이만 자도록 할까요?”
“어? 음. 그러지.”
예쁘긴 한데 그 표정 변화가 뭔가 묘했다. 뭔가… 뭔가가 까끌까끌하게 거슬렸다.
“폐하?”
꿈쩍도 하지 않는 루비나드가 이상했는지 제빌이 그녀를 불렀다. 그제야 루비나드는 침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뭐, 별것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침구를 들치는 그녀의 마음에 한 줄기 위화감이 스몄다.
* * *
-기왕이면 점심도 나가서 먹도록 할까요?
서명이 끝난 서류를 정리하던 제빌의 한마디에 루비나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뒤에 있을 일은 모두 취소해 두었다. 오늘 오후는 오롯이 제빌과의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소중한 것이 망가진 것은 그 무엇으로도 보상이 되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상실감을 위로해 주고 싶었다.
제빌이 언제나 그녀 곁에서 그러했듯이.
“밖에서 식사하는 건 처음이군.”
“드시고 싶은 건 있습니까?”
“글쎄…. 궁에서 먹지 못하는 걸 먹어 보고 싶은데.”
황궁의 요리사는 꽤 실력이 좋은 사람이었다. 많은 나라의 귀빈을 맞이하는 만큼, 어지간한 타국의 음식도 모두 현지인 이상으로 할 줄 알았다. 외교를 강화하고 싶어 하는 루비나드를 위해 제빌이 특별히 초빙한 사람이었으니 당연했지만.
평소에 먹지 못하는 것이라.
“그럼 가장 인기 있는 대중 식당으로 가 보시겠습니까?”
“대중 식당?”
“네. 귀족들이 다니는 곳이 아니라 서민적인 음식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폐하께서 드셔 보시지 못한 음식이라면 그 정도뿐이겠지요.”
제빌의 설명에 보라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자신이 제대로 된 제안을 했다는 걸 알아챈 제빌이 빙긋 미소 지었다.
“기왕 거리의 생활상을 보러 나온 참이니 그것도 좋겠지요.”
“으음. 아주 좋아.”
“식당에 연락을 넣어 두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모처럼 가는 대중 식당이다. 굳이 황제가 방문한다는 걸 알릴 필요는 없을 터였다. 평소의 생활상이 보고 싶은 것이니.
그 의중을 알아챈 제빌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 외에 또 가고 싶은 곳은 있으십니까?”
“으음. 디저트를 파는 곳이 궁금하군. 거리에서만 먹을 수 있는 과자가 있다던데.”
“그런 건 빵집에서 파는 게 아니라 거리의 노점에서 판매합니다. 가 보시겠습니까?”
“음.”
문득 루비나드가 제빌을 보았다. 그의 옷차림이야 언제나 수수하기에 귀족이 아니라 그냥 좀 사는 중류층의 차림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지만….
루비나드의 시선이 이번엔 제 옷으로 향했다. 티 하나 없이 잘 세탁되어 새하얀 제복. 그것도 고급 천을 사용한 게 한눈에 보이는 이 의복으로는 거리에서 틀림없이 주목을 모을 테지.
“식사 전에 들러야 할 곳이 있어.”
“어디입니까?”
루비나드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옷 가게부터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