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87)
“흐음.”
루비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제빌의 리본은, 악토그라토리아의 황태자가 습격당했던 날 뭉뚝 잘려 나갔다. 지겨울 정도로 하고 다니던 그 리본을 한 모습을 이제는 볼 수 없겠다고 생각했는데.
“제빌 경.”
“네.”
“음….”
불러 놓고 앓는 소리만 내는 루비나드를, 제빌이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 얼굴을 보면서도 루비나드는 좀체 입을 열지 못했다.
대체 누가 준 것이기에 이렇게 애지중지하는 것인가.
그렇게 묻고 싶은데 왠지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제빌은 어렸을 때부터 거의 고립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루비나드를 만나기 전에는 모욕에 가까운 대우를 받았었고, 루비나드를 만난 후에는 그녀의 곁에 딱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그런 그가 대체 누구에게서 저런 걸 받은 걸까. 루비나드가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다.
언제부터 저걸 하고 있었더라.
“폐하?”
“그 리본 말인데.”
제빌이 흠칫, 몸을 굳혔다.
역시 이건 안 되나? 확실히 보기에 좀 흉하기는 했다.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에 얼기설기 바느질된 리본이 보였다.
나름대로 손재주는 있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바느질을 하려니 손이 떨렸다. 결국, 완성된 건 바느질한 자국이 꽤 심하게 남은 너덜너덜한 천 쪼가리였다.
그런데도 버릴 수가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처음으로 루비나드에게 받은 소중한 것이었으니까.
“다시 바느질해 줄까?”
“…네?”
“그대에게 소중한 것이라는 건 잘 알겠어. 남의 손을 타게 하고 싶지 않았던 걸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대보단 내가 더 티 나지 않게 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제빌이 반사적으로 제 리본을 붙잡았다.
이걸 폐하가?
루비나드가 바느질을 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굳이 할 필요가 없으니까. 정확히는 손으로 무언가 만들어 내거나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아예 없어서, 손재주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호했다.
맡겼다가 정말로 아예 넝마가 되면 어쩌지.
그런 생각이 머리에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내 그는 굳은 결심을 한 표정으로 리본을 풀어냈다.
어쩌긴 어쩌겠어. 넝마가 된들 폐하께서 기워 주신 거면 소중히 간직해야지.
제빌이 루비나드에게 리본을 건네자, 잠시 이리저리 살피던 루비나드가 문득 입술을 삐죽였다.
“근데 대체 누가 준 것이기에 이 모양이 되도록 버리지 않는 건가.”
“제겐 누구보다도 소중한 사람이 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누구냐고 묻는 거야.”
“…….”
제빌은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웃었다.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있으면 늘 나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루비나드도 물러서지 않았다.
“웃기만 하지 말고.”
“…그게 왜 궁금하십니까?”
마치 루비나드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최소한 루비나드에게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 남편의 일인데 그 정도도 묻지 못하나? 혹여 정인이라면 나도 얼굴이나 한번 보고 싶어서 그런 건데.”
정인.
그게 당신이라는 걸 알면, 당신은 어떤 얼굴을 하게 될까. 아마도 혐오에 물든 눈으로 나를 바라보겠지. 당신에게는 사랑이란 그런 것일 테니.
자신에게 향하지 않으면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자신을 향하면 밀어낸다. 에브니겔이나 커드닐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 역시도 그녀에게 접근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얼굴을 봐서 뭐 하시려고요.”
“어? 어….”
그러고 보니.
루비나드의 얼굴이 짐짓 심각해졌다.
정인이 있든 말든 그건 제빌의 사생활이었다. 거기까지 루비나드가 알아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리본을 준 자의 정체가 신경 쓰이는 것일까.
잠시 더 고민하던 그녀가, 반쯤은 생각 없이 입을 열었다.
“내가 그대의 친우니까…?”
“네?”
“원래 친우의 연인이 어떤 사람인지 걱정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
말끝이 흐렸다. 그녀 자신조차도 스스로의 답이 이해가 가지 않아서였다.
제빌은 석연찮은 표정을 짓고 있는 루비나드를 바라보다 피식 미소 지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하지만, 제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게 있습니다.”
그대는 말하지 않는 것뿐이지 않나.
목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가 겨우 가라앉은 한마디에 루비나드는 겨우 제 마음을 깨달았다.
그런가. 나는 제빌이 내게 이토록이나 많은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가.
생각해 보면, 그에게 계약 결혼을 제안했던 그때부터 이미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루비나드는 어쩌면 생각보다 그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그 위화감은 갈수록 커졌다.
제빌이 그녀가 생각지도 않은 행동을 할 때마다, 말을 할 때마다.
그에게서 그녀가 모르던 모습을 볼 때마다.
제빌은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루비나드에게 마치, 보여 줘야 하는 모습이 있는 것처럼 군다. 그 모습 외의 자신은 모조리 숨겨 버리는 것처럼 보였다.
루비나드는, 그에게 모든 것을 다 드러내 보이는데.
심지어 그를 남자로 느끼고 있다는 것까지도.
“그대에게서는 항상 벽이 느껴져.”
툭 내뱉듯 뱉은 루비나드의 말에 제빌이 몸을 굳혔다. 하지만 루비나드는 제 생각에 빠져 그런 그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손안의 리본만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대는 만들어진 그대밖에 보여 주지 않아. 그건 분명, 그대가 언제나 철저하게 자신을 관리하고 통제하기 때문이겠지.”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제빌. 언제나 이성적인 제빌. 늘 냉정한 제빌.
하지만 가끔 그 눈동자에서 흘러넘치는 알 수 없는 감정 역시 분명 제빌의 것이었다. 그녀의 가슴을 설레게 한 돌발 행동도, 다프넬에게 향했던 질투도. 모두 제빌의 일부였다.
감정에 휘둘리는 건 싫다. 이성을 잃고 행동하는 건 싫다. 분명 루비나드는 그래서 제빌에게 이토록이나 깊은 신뢰를 품고 있는 거겠지만.
“나는 그런 그대를 존경마저 하고 있어. 나조차도 쉽지 않은 것을, 언제나 그대는 태연한 얼굴로 해내니까. 하지만.”
그래도 그가 남자로 느껴지는 지금은, 그게 조금 서운했다.
누구도 모르는 그가 알고 싶었다. 감정에 물들어서 있는 그대로의 그를 내비치는걸. 아아, 그런가.
루비나드는 친우로서의 제빌을 알고 있었다. 부관으로서의 제빌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그녀가 그의 앞에서 종종 그렇듯.
남자로서의 제빌을 보고 싶었다.
“가끔은 그대도 내 앞에서는 조금 더 편하게 있어 주면 좋겠어.”
꽉 닫아 놓은 뚜껑이 열리려 한다. 제빌은 재빨리 손으로 제 가슴을 꽉 억눌렀다. 절대로 열리지 않도록.
이 안에 있는 것이 넘쳐흐르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 주면 그녀는 분명 떠난다. 자신이 얼마나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지, 그 사랑이 얼마나 더럽고 질척하고 음습한 것인지 알게 되면.
그녀는 분명 떠나 버린다.
“…폐하께서는 제 친우이시기도 하지만, 상사이시기도 하니까요.”
부드럽게 미소 짓는 제빌의 얼굴에서는 다시 벽이 느껴졌다. 루비나드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제 손에 있는 리본을 꽉 쥐었다.
언젠가는 볼 수 있을까. 그 마음에 있는 걸.
그 웃는 얼굴 아래 있을 무언가를.
* * *
“…그, 음. 나름대로 노력해 보았네만.”
루비나드가 머뭇거리며 리본을 내밀었다. 아까 제빌이 기운 것보다야 훨씬 낫지만, 여전히 잘렸던 티가 났다. 하지만 제빌이 보고 있는 건 리본이 아니라 루비나드의 손이었다.
“이건….”
제빌이 살며시 그녀의 손을 감싸 들었다. 리본에 가려져 있던 반창고가 드러났다. 그 작고 가는 손에 다섯 개나 반창고가 휘감겨 있었다.
루비나드는 쑥스러운 듯 미소 지으며 제빌의 손에서 제 손을 빼내려 했다.
“제빌 경, 좀….”
놔 주게. 그렇게 말하려는 루비나드보다 제빌이 더 빠르게 입을 열었다.
“연고는 바르셨습니까?”
“어, 음. 발랐지.”
“…이렇게까지 해 주지 않으셔도 되는데.”
제빌의 손가락이 반창고 위를 쓸었다. 행여 그녀를 아프게 할까 두려웠는지 몹시도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루비나드는 다시 한 번 힘을 주어 제빌의 손에 잡혀 있던 제 손을 빼냈다.
“무슨. 내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나. 끝까지 책임지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야.”
“…….”
말리지 않은 제 잘못이었다. 루비나드가 한 번도 바느질을 해 본 적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가 기워 준 리본을 가지고 싶어서 침묵했다. 그 탓에 루비나드가 다쳤다.
제빌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으음. 좀 티가 많이 나지?”
그걸 결과물에 대한 한탄으로 느꼈는지, 루비나드가 슬쩍 그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화가 났다.
한 나라의 주인이,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뭐든 다 할 수 있는 분이 겨우 이런 리본 하나 때문에 제 눈치를 본다는 게 속상했다. 그렇게 만든 게 자신이라는 게 더더욱.
“그 때문이 아닙니다. 폐하께서 다치신 게 속상해서 그럽니다.”
살짝 눈살을 찌푸린 채 그렇게 내뱉는 제빌은, 약간 거칠었지만 제 진심을 말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던 것인데 원래대로 되돌려 주지 못해 아쉬웠다. 보기엔 꽤 쉬워 보였는데.
막상 바늘을 손에 들자 그 조그만 것이 생각보다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얇은 옷감 아래에서 위로 찌를 때마다 가늠이 제대로 되지 않아 손가락을 찔려야만 했다.
그 핏방울이 손수건에 묻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느질을 잘하는 이에게 부탁해 다시 해 줄까?”
“아니요, 괜찮습니다.”
속상한 건 속상한 거지만, 이 귀한 걸 누구의 손에 넘길 마음은 없었다.
루비나드가 주었고, 루비나드가 고쳐 주었다. 설령 좀 어설프면 어떤가. 그녀가 다친 게 속상한 것 외에는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한구석도 없었다.
“그래도. 하고 다니기엔 좀 티가 많이 나서.”
“…아쉽지만 이건 이제 보관만 해 두겠습니다. 확실히 알현 시간에나 타국의 귀빈들을 맞이할 때를 생각하면 하고 나가긴 좀 그러니.”
루비나드에게 받은 손수건이 해질 때까지 들고 다니다가 손재주가 좋은 하녀에게 부탁해 리본으로 만든 것이었다. 오랫동안 그의 목을 장식하고 있었던 것인 만큼, 리본의 빈자리가 엄청나게 허전하게 느껴졌다.
손에 들면 이토록 가벼운 것인데.
“…….”
생각에 잠겨 있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비나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음, 그…. 제빌 경.”
“네.”
“우리 내일… 데이트할까?”
제 색을 꼭 닮은 리본을 내려다보던 얼음 같은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