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86)
에브니겔의 소식은 은밀하게 귀족들 사이로 퍼져 나갔다. 황실에서의 함구령이 있었기에 공공연히 떠들진 못했지만, 각종 추측이 난무했다.
듣기 거북할 정도로 쓰레기 같은 추측부터 관련자가 들으면 흠칫할 정도의 추측까지. 각양각색의 추측에 대해 루비나드가 취한 대응책은 침묵이었다.
어차피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근거 없는 추측뿐이었다. 굳이 입을 열어 일을 키울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두면 언제나 그랬듯 조용히 사그라들 터였다. 다만, 덕분에 본의 아닌 효과를 보았다.
“선물이 확연히 줄었군.”
“예.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지를 못하니 섣불리 구혼하기 어려운 모양입니다.”
이미 구혼장을 거절해 둔 다휜가와 달리, 뭉크리안과 라자크 공작가에서는 은근한 압력이 들어오고 있었다. 빨리 답을 달라는 부류의 압박이. 그런데 그게 에브니겔 황자 사건 이후 사라졌다.
두 나라 사이를 수습하는 것이 급선무이기도 했지만, 루비나드가 당분간은 남자를 가까이하고 싶지 않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제국의 귀족들이 모두 알 정도로 에브니겔은 루비나드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했다. 그런 남자가 로간 제국과 악토그라토리아 사이를 이간질하고 전쟁을 일으키려 했다지 않았나. 심지어 우호의 표시로 선물한 데지니움도 황자의 독단이었고, 반출이 금지되어 있는 마력석까지 선물하려고 했다고 들었다.
그 모든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두 나라의 우호 관계를 깨뜨리려는 수작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항간에는 에브니겔 황자가 황제에게 수작을 건 게 두 나라 사이를 깨뜨리기 위한 미인계였다는 소리까지 돌았다.
그런 판국에 후궁에 자식들을 들이라며 황제를 압박하는 것이 썩 내키지 않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루비나드의 입장에서는 당분간 제게 수작 부리는 남자들을 쳐다도 보기 싫지 않겠나. 그런 생각에 잠잠해진 것이었다.
그것 역시 제빌의 노림수대로였다.
“덕분에 조금 편해졌군.”
“어차피 오래가진 않을 테지요.”
아직 레기안이 남아 있다. 그가 정식으로 후궁에 들어오게 되면, 국내 귀족들의 반발이 다시 시작될 것이었다.
그러니 그 전에 다음 수를 써 둬야겠지. 제빌은 그렇게 다짐하며 서류를 뒤적였다.
“그러고 보니.”
“네?”
“그대와 악토그라토리아의 황태자. 만난 적이라도 있었나?”
“…예?”
전투가 시작된 직후에 있었던 눈빛 교환. 전투가 끝난 직후에도 한 번 더 있었지. 그 눈빛 교환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지난 며칠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제빌이 제게 무언가를 숨기는 건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건 꽤… 신경이 쓰였다.
“눈빛 교환이 열렬하던데.”
“아, 뭐…. 그런 건 아닙니다만….”
“그 뒤의 일 처리도 이상할 정도로 빨랐지. 마치 미리 어느 정도 이야기를 맞춰 놓은 것처럼.”
루비나드가 어느 정도 눈치채는 건 예상한 일이었다. 제빌은 잠시 망설이다가 제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이야기는 하기로 마음먹었다.
“황태자를 초대할 때, 주의하라고 경고하긴 했습니다.”
“경고?”
“제2 황자가 잠잠한 것이 신경 쓰여서 뒷조사를 조금…. 그때 보니 불온한 움직임이 감지되어 주의하라고 미리 경고했습니다.”
“그런 게 있다면 내게도 말을 했어야지.”
루비나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자신만이 소외된 상황이 달가울 리 없을 터. 제빌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폐하께 보고를 드리기엔 증거가 너무 부족했습니다. 제2 황자 측도 주도면밀하게 일을 계획해서 좀체 꼬리를 잡을 수가 없었던지라…. 단순히 움직임이 심상치 않으니 주의해야겠다고 말씀드리기엔 억측의 범주에 가까웠습니다.”
“…흠.”
“황태자에게 말한 건, 그의 신변에 관련된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설마 저도 폐하와 따로 만든 자리까지 알아내어 일을 벌일 거라곤….”
주섬주섬 말을 이어 맞추니 그럴듯한 진실이 완성되었다. 루비나드는 여전히 의심된다는 눈초리였으나, 어느 정도 수긍한 듯 비뚜름하던 입술이 제 모양을 찾아갔다.
제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류 뭉치를 들고 루비나드에게 다가갔다.
“가끔 말이야.”
“네.”
“그대가 굉장히 멀게 느껴질 때가 있어.”
제빌의 손에서 후두둑, 하고 서류가 흘러 떨어졌다. 다행히 루비나드의 바로 곁까지 다가온 상황이라 조금 소리가 강하게 났을 뿐 제대로 책상 위에 안착했다. 그 상황을 알 리 없는 루비나드가 말을 이었다.
“아무리 추측이나 억측이라도, 내게도 한마디쯤 해 주면 좋았을 텐데.”
“…그, 크흠…. 폐하께서는 언제나 공명정대하셔야 할 분입니다. 그렇기에 선입견을 가지시면 판단을 그르칠 위험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건 안대도? 그래도 말이야.”
이렇게 밤낮으로 붙어 있는데 한마디쯤 언질을 줘도 되는 거 아닌가. 그게 괜스레 서운하게 느껴졌다.
부루퉁한 그녀의 표정이 귀여워 제빌은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도 잊고 피식 웃어 버렸다.
“앞으로는… 최소한의 증거가 갖춰지자마자 바로 폐하께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증거가 없어도 말해도 돼.”
“그건….”
“내가 가설과 사실을 혼동할 정도로 어리석어 보이나?”
“그건 아닙니다.”
흐음, 하고 입술을 삐뚜름하게 올린 루비나드가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빠르게 서류를 훑어 내리며 서명을 하는 몸짓을 보며 제빌은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최근, 루비나드가 그를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예리한 말을 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러고 보니.”
“…네.”
그러고 보니, 라는 말에 또 등골이 오싹했다. 제빌의 몸이 긴장으로 굳어진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무심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헤르젠의 왕자 입지가 꽤 거북해졌을 거야.”
“이런 일이 생기면 타국인에 대한 경계가 높아지기 마련이니까요.”
“황궁 사람들은 괜찮겠지만, 가급적 귀족들이랑은 거리를 두게 해. 당분간만이라도 좋으니.”
“네.”
이번에야말로 그러고 보니, 가 모두 끝난 것인지 루비나드가 침묵했다.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평온한 침묵이 집무실 안을 맴돌았다.
이 평온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다시 찾기까지는 아마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 제빌 역시 제자리로 돌아가 느긋한 얼굴로 서류를 펼쳤다.
* * *
“루비나드는 괜찮은 건가?”
엔도르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최근 성도에서 있었던 습격 사건에 대해 베카르티가 전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폐태자의 질문에 베카르티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되십니까?”
“당연하지. 여동생이 아닌가.”
“저하께서 그러시면, 다들 불안해할 것입니다.”
엔도르빌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언제,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일까.
시작은 분명 이게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엔도르빌의 세력은 물밑에서 ‘반란군’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의 목적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는데도.
하지만 이미 붙은 세력을 흩을 수도 없었다. 엔도르빌에게 힘이 필요한 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루비나드가 다치길 바라지 않아.”
“알고 있습니다. 저하께서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는.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저하의 첫 뜻에 동조하여 모여든 자들보다, 지금의 오해가 생긴 후에 붙은 세력이 더 많지 않습니까. 지금 부정하면 모든 걸 잃게 될 겁니다.”
“…….”
황제의 자리 따위엔 욕심이 없었다. 아니, 이미 루비나드가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느꼈다. 엔도르빌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제빌뿐이었는데.
“그러고 보니.”
“음.”
“다휜가의 차남이 찾아왔습니다.”
그 남자에 대해선 엔도르빌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원래 가문에서는 엔도르빌의 놀이 친구로 추천하려고 했으나, 스스로 원해 루비나드의 곁으로 갔다고 했던가. 그런 것치곤 무례한 자라며 루비나드에게 꽤 미움받는 듯 보였다.
“국서가 저지른 일에 대한 증거를 몇, 가지고 있더군요.”
“어떤?”
“별건 아니긴 합니다. 어릴 때 저지른 일 중 채 감추지 못한 증거가 몇 가지.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그 남자가 딴마음을 품은 채 폐하의 곁에 있었다는 증거는 될 수 있겠지요.”
“그래….”
그건 달가운 일이었다. 그 남자에게 속아 눈과 귀가 막혀 있는 어린 여동생을 눈뜨게 하는 데 분명 도움이 될 테지.
하지만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다.
다휜가는 한때 공작가 반열에 오를 것이라 점쳐졌을 정도로 세가 큰 가문이었다. 게다가 오랜 황실에의 충성을 인정받고 있는 가문이기도 했다. 그런 가문의 차남, 그것도 약한 장남 대신 가주가 될지도 모른다고까지 소문이 도는 자가 제 아래로 온다는 게 현재 상황에서 어떻게 비칠지가 문제였다.
만약 엔도르빌에게 더 정당성이 있어서 다휜가까지 움직였다고 소문이 돌면.
“루비나드의 입지에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겠군.”
“…저하. 어차피 늦었습니다. 폐하께서는 본디 황제가 되려는 마음조차 없었던 분입니다. 오히려 저하께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걸 바라셨던 분이기도 하죠. 오히려 이게 폐하를 위한 길일지도 모릅니다.”
궤변이라는 건 베카르티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엔도르빌이 먼저 황제의 자리에 올랐더라면, 마탑이 지금의 위치까지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엔도르빌은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격의, 성군이 될 자질을 갖춘 남자였지만 능력은 확실히 루비나드보다 못했다.
어쩌면 그는 마법을 실생활에 응용하는 사업을 진행하는 것도, 그걸 국가가 지원한다는 개념도 떠올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루비나드는 정당한 수단으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었다. 론디아스가, 엔도르빌이 누렸어야 할 것이 모두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 남자 때문에.
“이제는 마음을 다잡으셔야 합니다. 때가 머지않았습니다.”
선황의 목숨이 경각에 달해 있었다. 엔도르빌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아버지는 존경할 만한 남자였다. 루비나드에게 황위를 넘겨준다는 결단 역시, 그였기에 할 수 있었던 과감한 결정이었다. 지금도 엔도르빌은 그를 존경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그래야….”
“알고 있습니다, 저하.”
베카르티는 엔도르빌의 앞에 무릎 꿇었다. 제 주군이 될 사람을 향해.
그리고 그의 의사를 받아들인다는 것을 표하기 위해.
초여름이 지나 조금씩 더위가 기승을 부리려 하는 때인데도, 이 무인 지대는 지독히도 춥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 곧 여름이 올 것이다.
그리고 엔도르빌이 이 감옥에서 벗어날 날 역시 곧 올 터였다.
미명이 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