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85)
“제 신병을 왜 악토그라토리아가 맡는단 말입니까. 로간 제국에서 벌어진, 그것도 황궁에서 벌어진 일인데!”
악토그라토리아에 돌아가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건 황족인 자신을 공개적으로 처형할 린 없으니까. 아버지는 마침내 이를 드러낸 맹수를 도리어 기꺼워하실지도 몰랐다.
그래도 싫었다. 루비나드가 없는 곳으로 돌아갈 바엔 차라리 그녀의 손에 죽는 게 나았다. 에브니겔은 이를 아득 갈고는 광기 어린 눈으로 외쳤다.
“저를 벌하시려거든 폐하께서 벌하소서! 다른 이에게는 처벌당하고 싶지 않습니다.”
한때는 그를 몹시 아꼈다. 에브니겔은 형보다 뛰어나다고 부를 정도는 아니었으나, 형만 한 아우이긴 했다. 프리빈트의 앞날을 가로막는 것이 자신이라는 것도, 그걸 피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을 정도로 영리했다.
쉽게 말하면 제 분수를 아는 남자였다.
그랬던 남자가 왜 이리도 망가져 버렸을까.
프리빈트가 아는 사랑은 언제나 위대한 것이었다. 약해서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다리를 지탱해 주고 보완해 주는 것. 더없이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이런 감정은 모른다.
사람을 미쳐 돌아 버리게 만드는 감정은.
“그대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오히려 더 다행이로군.”
루비나드에겐, 다른 이들보다 다소 선을 더 넘었을 뿐 익숙한 감정이었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누군가를 상처 입히려 하고 그걸 정당화하는, 그런 쓰레기 같은 감정. 그걸 사랑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의심스럽게까지 한.
그녀는 싸늘하게 웃어 보였다.
“그대에겐 더 큰 벌이 되어 줄 테니.”
루비나드는 그 웃음조차 에브니겔에게는 새로운 자극이 된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순식간에 미소조차 지워 버렸다.
그 얼굴 위에 남은 것은 완벽한 무관심.
그녀는 완벽하게 에브니겔에게서 손을 뗐다.
“황태자. 뒤는 맡기겠소.”
루비나드는 그대로 알현실을 빠져나가 버렸다. 그 멀어지는 뒷모습에 대고 에브니겔이 절규했다.
“왜! 대체 왜! 당신에게 애정을 받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미움이라도 받으려 했는데! 당신은 왜 그런 눈으로 날 바라보는 건데…! 왜!”
증오도 혐오도 보이지 않는다.
루비나드는 잔혹할 정도로 그에게 가장 큰 벌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 절규조차 그녀의 귀에는 닿지 못한 것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닫혔다. 문 뒤에서 이어지는 에브니겔의 절규에 루비나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쉬시겠습니까?”
“그러는 게 좋겠어.”
몸에 찌든 피의 냄새가 불쾌했다. 피투성이의 옷도, 거기에서 느껴지는 묘한 질척거림도. 루비나드는 그대로 욕실로 향했다.
제빌 역시 검은 옷을 입어 구분이 잘 가진 않았으나 베스트와 바지가 피로 젖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씻고 싶을 텐데, 그는 멀어지는 루비나드의 뒤로 호위 기사가 따라붙는 걸 보고 다시 알현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여전히 울부짖고 있는 에브니겔의 모습이 보였다.
“…빌어먹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기대에 찬 눈으로 돌아보던 에브니겔이, 이내 험상궂은 표정으로 이를 갈았다. 프리빈트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놓고 가신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요. 도와드릴 일이 없을까 해서 돌아왔습니다. 아마 저희 제안을 받아들이시면서도 반신반의하셨겠지요. 제2 황자는, 제 평판과 맞바꾸어 황태자의 위치를 견고하게 다져 주던 사람이니 믿으실 수 없으셨을 겁니다.”
힐끔 제빌이 바닥에 앉아 이를 득득 갈고 있는 에브니겔을 내려 보았다. 단지 자신이 황자라는 이유로, 제빌보다 더 좋은 부모를 타고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멸시하고 무시하던 남자가 초라한 꼴로 앉아 있는 걸 보며 제빌은….
속이 시원하다는 기분과 동시에 두려움을 느꼈다.
이 남자는 자신이다. 한 발자국만 삐끗하면 언제든 제빌도 이 꼴이 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추락을 마냥 웃으며 바라볼 수만은 없었다.
“지금도 꽤 충격이 크시겠지요. 원하신다면 제 친위대를 통해 호송을 돕도록 하겠습니다.”
“…배려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미 로간 제국에는 많은 폐를 끼친 상태입니다. 우리가 쉬쉬하더라도 이 일은 분명 바깥으로 새어 나갈 터. 더 빚을 만들 순 없습니다.”
한 나라의 황자가, 다른 나라의 황제에게 반해 싫다는 데도 끝끝내 따라다니다가 결국 제 형을 죽이려고까지 했다. 자신이 후계자가 되어 병권을 장악하고 여자를 힘으로라도 손에 넣기 위해서.
대륙 역사상 길이 남을 추문이었다.
이 일을 처음 제안할 때부터 제빌은 ‘비밀 엄수’ 역시 약속했다. 최소한 공식적인 자리에서 로간 제국이 악토그라토리아 제국에게 이 일에 대해 언급하거나 보상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대신 요구한 것들이 몇 있었다.
먼저 그 어떤 나라에도 넘겨준 적 없었던 희귀한 동식물의 사료를 ‘우호의 표시’로 넘겨줄 것. 그리고 정식으로 로간 제국과의 화평을 선언할 것. 그리고 향후 수년간 서로의 영토를 불가침 할 것.
처음엔 수년으로 충분했다. 어차피 일정 시간이 지나면, 어지간한 계기가 없으면 선전포고할 명분이 많이 사라진다. 거기에 황태자가 황위를 이어받으면 더 말할 것도 없어진다.
“그렇습니까.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제빌은, 그 시선을 에브니겔에게 고정한 채 프리빈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대화가 마무리되자 에브니겔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무심하게 지나쳤다. 그 작아지는 뒷모습에 에브니겔은 이를 갈았다.
이대로 끝날 줄 아느냐.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이런 사건을 대놓고 공론화할 리는 없으니 끽해야 유폐되는 것에 그치겠지. 그렇다면 지지해 주는 귀족들의 세력을 이용해 힘을 불려 다시 밟고 일어서면 된다. 다음에는 절대로 피할 수 없도록 더 크게 세를 만들어서 짓밟아 주면.
그러면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어리석은 놈.”
그 눈빛에서 에브니겔의 마음을 읽은 듯 프리빈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판국이 되어서도 여전히 포기하지 않은 건가. 그의 비정상적인 집착이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하긴, 에브니겔 스스로도 왜 자신이 이렇게까지 루비나드에게 집착하는지 알 수 없는데 오죽할까.
“돌아가자.”
프리빈트는 그렇게 중얼거리곤 제가 끌고 온 사병들에게 명해 에브니겔을 끌고 가게 했다.
* * *
“후우.”
“오셨습니까.”
씻고 방으로 돌아온 루비나드를, 제빌이 미소로 맞이했다. 그 손과 뺨은 이미 깨끗하게 치유되어 있었다.
“치료 마법사를 부른 모양이군.”
“네. 그 자리에서 있었던 공방을 자세히 본 건 폐하와 황태자뿐이니까요. 오늘 다친 자상인 척하면서 치료받았습니다.”
하긴. 손에 난 상처가 벌어져서 피까지 배어 나오고 있었으니 믿을 만도 했다. 애초에 다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더 그랬다.
“…다행히 흉터가 남진 않았군.”
물끄러미 제빌의 뺨을 바라보던 루비나드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제빌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탁자에 앉았다.
“생겨도 별로 상관은 없지만 말입니다.”
“내겐 상관있어. 그대에게 흉터가 더 생기는 건 원치 않아.”
피곤했다. 눈에 누군가가 불덩이를 넣어 놓은 것처럼 후끈거렸다. 침구를 파고드는 루비나드의 곁에 제빌이 다가왔다.
“조금 눈을 붙이시겠습니까?”
“음. 식사 시간이 되어도 깨우지 말게. 오랜만에 검을 휘둘렀더니 지치는군.”
물론, 그런 이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겠지.
루비나드가 이토록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죽인 건 처음이었다. 몸에 익혀 온 검이, 그야말로 무의식적으로 몸이 반응할 정도로 연습해 온 검이 그녀를 지키기 위해 대련을 할 때처럼 휘둘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승패를 가르는 정도에서 끝난 게 아니라 상대의 목숨을 앗았다.
아무리 루비나드가 냉정한 사람이라고 해도 아무렇지 않을 리 없었다. 그 몸에 뒤집어썼던 핏물 역시 한동안 머릿속에 선연하게 떠오르리라.
“저도 곁에 누워도 되겠습니까?”
“그대도?”
루비나드도 그랬지만, 제빌도 낮잠을 자지 않기로 유명했다. 그런 그가 침대에 오르겠다니.
루비나드가 의아함을 감추지 않자 제빌이 엷게 웃으며 답했다.
“아무래도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저도 피곤해서요. 싫으시다면 괜찮습니다.”
“싫고 좋고가 어디 있나. 그대가 피곤하다면 당연히 쉬어야지.”
루비나드가 톡톡, 제 옆을 두드렸다. 마치 빨리 침대 위에 올라오라고 조르는 것 같은 광경에 제빌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가 가라앉았다.
이분은…. 자신이 하는 행동이 얼마나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지 아셔야 할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제빌은 순순히 그녀의 옆자리에, 자신의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가끔 말이야.”
“네.”
“시녀들이 그런 말을 할 때가 있었어. 아, 오늘은 정말로 침대에서 일어나기 싫었어. 그런 말.”
루비나드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녀는 황족이었다. 수많은 의무를 몸에 지닌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설령 그런 감정이 든다고 해도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한 적도 없었지만.
“지금, 조금이지만 그녀들이 한 말이 이해가 됐어. 침대에 누우니 정말로 편안해. 일어나기 싫어질 정도로.”
루비나드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제빌이 조용히 손을 뻗어 뺨을 덮은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역시 당신에겐 이게 더 어울린다. 그 뺨을 피로 물들이고 위압감과 살기로 눈동자를 가득 채운 채 검을 들고 있는 것보다, 붉은 머리카락을 뺨 위에 늘어뜨리고 노곤한 듯 피곤한 듯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당신은 피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니까.
“그대도 피곤하다고 하지 않았나. 얼른 누워.”
“네.”
아쉬운 듯 떨어져 나간 손이 침구를 들췄다. 그 속으로 쏙 들어간 제빌이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루비나드의 몸을 끌어안았다.
언제나 서늘하던 루비나드의 체온이, 오늘은 조금 뜨겁게 느껴졌다.
“언제나 그대가 나보다 체온이 높았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그대 손이 시원하게 느껴지는군.”
“눈 위를 조금 덮어 드릴까요?”
“…으음. 그래 주면 더 잠들기 쉬울 것 같아.”
제빌의 커다란 손이 루비나드의 눈 위를 덮었다. 서늘한 체온에 루비나드가 시원한 듯 엷게 미소 지었다.
“시원하군.”
“안녕히 주무십시오, 폐하.”
“같이 눈을 뜨면 좋을 텐데. 같이 식사할 수 있도록.”
“제가 먼저 일어나면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야, 배고프면 먼저 식사하도록 해.”
그렇게 중얼거리던 루비나드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그리고 어느새인가 색색, 고른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숨소리를 듣고 있던 제빌이 가만히 상체를 일으켜 제 손등 위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닿은 것은 제 손등인데, 마치 그녀의 눈꺼풀 위에 입술을 가져다 댄 것처럼 느껴졌다.
“…편히 쉬십시오.”
앞으로 닥쳐 올 일들을, 또 견뎌 내기 위해서라도.
제빌은 지금의 평온을 조금이라도 더 길게 유지하기 위해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역시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들어 있었다.
창밖에서 내리쬐는 햇살은 어느새 여름을 가득 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