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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 (83)화 (84/115)

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84)

프리빈트 드 악토그라토리아가 처음으로 로간 제국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건 지금으로부터 반달도 더 전이었다.

-네 동생이 미친 것 같구나.

-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말에는 묘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표정은 담담한데 어이가 없어 보이기도 하고, 황당한 듯 보이기도 했다.

반면 어떤 면에서는 유쾌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보거라.

아버지가 내민 작은 구슬을 받아 들고,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른 채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자 아버지가 구슬을 강하게 눌렀다.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의 앞에 환영과도 같은 영상이 나타났다. 어떻게 기록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듯한 각도였다.

-이건….

-쉿. 보아라.

붉은 머리카락의 여자와 동생. 낯선 이와 익숙한 이의 조합이 묘한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

붉은 머리카락의 여자가 입을 열었다.

[ 먼저 짐이 개인적으로 사과하고 싶은 것이 있소. ]

짐, 이라고 스스로를 지칭하는 것을 보자 그녀의 신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 대륙에서 동생의 앞에서 자신을 짐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자는 단둘뿐. 아버지와 로간 제국의 여제뿐일 테니.

[ 그대의 흥미가 금방 식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안일하게 대처한 건 사실이오. 하지만 생각보다 그대가… 마음을 가라앉히기 쉽지 않은 듯하여 오늘 이 자리를 빌려 확실히 말하도록 하겠소. ]

동생이 난봉질을 하고 다닌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로간 제국의 황제에게까지 손을 대려 했을 줄이야.

프리빈트는 머리가 욱신거리는 걸 느꼈다.

심지어 상대는 결의에 찬 표정이었다. 대체 동생이 얼마나 귀찮게 굴었기에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인지.

동시에 의아하기도 했다. 동생은 여자에 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렇기에 싫다는 여자를 쫓아다니는 성미가 아니었다. 오히려 제 매력을 알아보지 못한다며 비아냥거릴지언정.

그런데, 상대가 저렇게까지 말했음에도 동생의 표정이 묘했다.

[ 짐이 그대와 밤을 보내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오. 그러니 이만 그대의 본국으로…. ]

여제가 단언했다. 그러자 동생은 망설임도 없이 무릎을 꿇었다.

동생은, 허허실실 웃는 얼굴로 감추고는 있으나 자존심이 강한 남자였다. 누군가의 앞에 무릎을 꿇어 본 적도 없었다. 심지어 제 아버지 앞에서도. 그런 남자가 지금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지.

하지만 그렇게 질책하기엔 동생의 얼굴이 너무나도.

[ 폐하와 함께 있으면 무채색인 세상에 빛이 깃듭니다. 이토록 다양한 색이 존재했다는 걸 지금껏 알지 못했습니다. 폐하께서 엷게 웃어 주시는 것만으로도 저는 세상 그 무엇도 필요 없다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충족됩니다. ]

동생의 고백은 충격적이었다.

어떤 의미에서였냐면, 사랑이라는 걸 평생 모른 채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 것 같았던 그가 사랑에 빠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프리빈트는 그 눈동자를 잘 알고 있었다. 제 아내가 자신에게 보내던 눈빛과 한없이 닮아 있었기에.

[ 저도 당황스러울 정도로 제가 흐트러지는 걸 느끼고 있습니다.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지고 흘러넘치고야 맙니다.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

하지만 로간의 황제는 그런 동생의 눈동자에 흔들리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약간 혐오하는 표정마저 지었다.

왜 그녀는 그런 표정을 지었던 걸까.

[ 그대의 모든 무례를 용서하겠소. 그러니……, 마침 알현 시간도 끝났군.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소, 황자. ]

에브니겔의 표정이 바뀌었다. 사랑을 고백하며 행복에 가득 찬 미소를 짓던 동생의 얼굴에 절망이, 분노가,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득 차올랐다.

프리빈트조차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 무엇을 바치면 저를 봐 주시겠습니까. 나라를 바치면 절 봐 주시겠습니까? ]

뒤돌아선 여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몸의 떨림만 보아도 그녀가 분노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 제 형제를, 제 아비를 이 손으로 해하고 나라를 탈취하여 당신께 바치면. 그때가 되면 저를 봐 주시겠습니까? ]

황족으로서 해선 안 될 말이었다. 그것조차 잊을 정도로 동생은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겼다는 건가.

…심지어 자신을 혐오하고 있는 그녀에게.

[ 더 들을 필요도 없는 말이군. 조심히 돌아가시게. ]

로간의 황제는 혐오가 극에 달한 표정이었다. 황제인 그녀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었을 터였다.

겨우 여자에게 홀려 제 나라를 바치겠다고 말하는 에브니겔이.

[ 나라를 바쳐도 난 안 된다고, 그렇게 말하는 건가. 억지로라도 내 곁에 있게 만드는 수밖에. ]

그렇게 중얼거리는 동생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영상이 사라졌다.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멍하니 아버지를 바라보자, 그가 묘한 눈으로 프리빈트를 보았다.

-왜 그러느냐?

-이걸 왜 제게 보여 주셨습니까?

-글쎄. 왜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설마, 진심은 아닐 거라고.

하지만 에브니겔은, 단 한 번도 여자를 유혹하기 위해 빈말한 적이 없었다.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는 건.

-설마, 진심으로 에브니겔이?

-아니라고 믿고 싶다만.

황제가, 황좌의 팔걸이에 올려 두었던 서류 뭉치를 툭 바닥에 던졌다. 프리빈트가 황급히 주워 들어 내용을 확인했다.

거기엔 에브니겔의 손에 들어갔을, 그를 지지하는 귀족들의 명단과 서명이 적혀 있었다. 그 규모에 놀랐고 그걸 손에 넣은 아버지에게 또 놀랐다. 그리고 이어지는 보고서에는 에브니겔이 어떻게 세를 불렸는지에 대해 적혀 있었다.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보고서를 읽고 있는 지금도.

하지만 믿을 수가 없게 되었다.

점점.

-이걸 준 건 로간 제국의 국서다.

-…그렇다면,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 있긴 하겠군요.

로간 제국이 자신과 에브니겔 사이를 이간질하여 무언가 이득을 얻으려 한다거나. 하지만 이내 그의 머릿속에 생각 하나가 고개를 쳐들었다.

로간은 스스로가 원해서 악토그라토리아와 동맹을 맺었다. 이 시기에 대체 자신과 에브니겔을 이간질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오히려 뒤가 켕기는 일을 만드는 건 약점을 만드는 것에 더 가까운데.

하지만 인간은 가끔 어리석은 일을 하기도 했다. 지금의 제 동생처럼.

-확인을 해 보자고 하더구나.

-확인, 말씀이십니까?

-너를 로간 제국으로 보내라고 하더군.

황태자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로간의 국서가 프리빈트를 제 나라로 끌어들일 이유.

그런 건 둘 중 하나겠지. 프리빈트를 해하려고 하거나, 그들이 보낸 이 자료들이 모두 사실이라서 증명을 하려는 거거나. 그리고 프리빈트는.

-갔다 오겠습니다.

-너는 내 후계다.

-후계자란, 아버지의 피를 이은 자녀라면 누구나 될 수 있습니다. 로간 제국만 해도 여자인데도 황제의 자리에 앉지 않았습니까. 그런 차별을 하나씩 제하다 보면 분명 길이 보일 겁니다.

-너는 내 장자란 말이다.

-장자일 뿐입니다. 제가 죽으면, 제 아래의 남동생이 장자가 될 테지요.

이 한목숨 바쳐 로간 제국에 빚을 만드는 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거짓이라면, 그들의 흉계에 프리빈트가 위험한 꼴을 당하고 그걸 약점 잡아 폭로하면 그만이다. 참이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버지.

그렇게 반쯤 강제로 아버지를 설득해 로간 제국행을 결정했다. 그날 밤, 로간의 국서에게서 연락이 들어왔다.

거기에 상세한 설명이 적혀 있었다. 에브니겔을 끌어들일 방법, 친위대를 다소 멀리 물려 놈들에게 일부러 빈틈을 보여 주자는 간계에는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결국, 그가 맞았다.

프리빈트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제 앞에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 * *

악토그라토리아의 병사 손에 이끌려 모습을 드러낸 에브니겔의 앞에 서 있는 것은 루비나드와 제빌, 그리고 제 형님이었다. 죽이려 했던 제 형을 보는 눈에는 일말의 죄책감도 서려 있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보고 있지도 않았다.

루비나드와 제빌을 핏줄 선 눈으로 노려보느라 바빴으니.

“에브니겔.”

프리빈트의 부름에도 에브니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작게 한숨을 내쉰 루비나드가 에브니겔을 불렀다.

“황자.”

루비나드의 부름에 에브니겔이 고개를 들었다. 핏줄이 가득 선 그 눈은, 무섭다기보다 차라리 처량하게 느껴졌다. 저를 봐 주지도 않을 여자를 애타게 그리는 그 눈동자는.

프리빈트가 이를 악물고 고개를 홱 돌렸다.

“왜 황자가 이 자리에 있는지 알고 있소?”

루비나드의 부름에 에브니겔은 이를 악물었다.

몇 명이나 살아남았을까. 그의 아래에 있는 사병 중 가장 강력한 이들을 뽑아 보냈다. 그들이 어디까지, 어떻게 말했는지를 알아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을 텐데.

잠시 더 생각하던 에브니겔이 비릿하게 웃으며 물었다.

“제가 알아야만 합니까?”

차가운 목소리였다. 시치미를 떼기로 작정한 것인가. 그렇게 둘 생각은 없었다.

“…….”

제빌이 루비나드에게 눈빛으로 허가를 구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제빌은 친위대에게 유일하게 살아남은 습격자를 데리고 오도록 명령한 후 에브니겔의 반응을 살폈다.

담담해 보였지만, 눈에 서린 독기가 조금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이어 친위대가 살아남은 남자를 데리고 들어왔다.

에브니겔과 습격자.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어리석은 짓이었다.

“황태자, 당신께서 아는 사람입니까.”

친위대가 강제로 복면을 벗겨 내자, 에브니겔의 사병단 중 한 명의 얼굴이 드러났다. 프리빈트는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충분했다.

“에브니겔 드 악토그라토리아 황자. 그대는 시답지 않은 이유로 로간과 악토그라토리아 사이를 이간질하고 전쟁마저 일으키려 하였소. 그 죄, 용서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나.”

루비나드가 흘끔 프리빈트 쪽을 보았다.

이번 일은 완벽하게 로간 제국에게 유리했다. 그를 구한 것은 루비나드와 제빌이었고, 황태자를 습격한 건 제2 황자의 일당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황태자가 로간을 방문한 시기를 노린 이유는 딱 하나뿐이지 않은가.

황태자가 로간에 있을 때 다치면 설령 누가 습격한 것이든 로간의 책임 소재를 피할 수 없게 된다. 죽기라도 하면 더더욱.

그걸 노렸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로간과 악토그라토리아는 이제 서로를 신뢰하기 시작한 동맹국. 짐은 이 일의 마무리와 그대의 신병을 악토그라토리아에 인수하기로 했소.”

에브니겔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루비나드가 무어라 더 말하기도 전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광기가 가득 서린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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