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 (82)화 (83/115)

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83)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루비나드였다.

찻잔을 꽉 쥐고 단검 대신 던져 낸 뒤에 곧바로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바닥에 부딪혀 깨진 컵에 모두의 시선이 모인 사이, 루비나드와 습격자의 검이 맞부딪쳤다.

일부러 틈을 만들어 내려 잔을 던진 것인데 습격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건 ‘단 하나의 목적’만을 보고 내달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검 끝에는 프리빈트가 있었다.

“윽.”

놀란 프리빈트가 조금 뒤늦게 반응하는 사이 제빌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서 놀라 달려오는 친위대의 모습이 보였다.

수 분. 끽해야 오 분여의 여유가 있을 뿐. 습격자에겐 시간이 부족했다.

처음 달려든 자의 뒤로 넷이 더 나타났다. 루비나드의 눈동자가 싸늘해졌다.

“어리석군.”

누군가를 지키면서 싸운다는 건 어려운 법이었다. 그런데도 루비나드가 지켜야 할 대상에게서 조금 떨어져서 싸울 수 있었던 건 제빌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제빌은, 무위는 다소 낮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걸 커버하고도 남을 정도로 수읽기에 능했다. 이런 돌발 상황에서도 그라면 분명 돌파구를 찾아내리라.

그것만을 믿고 루비나드는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칫.”

습격자는 이를 악물었다.

제 딴엔 기척을 죽인다고 죽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 미묘한 살기까지도 잡아낼 줄이야. 제 주군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기에 둔한 줄 알았더니, 생존을 위한 감은 뛰어난 여자였다.

정면으로 맞붙어서는 승산이 없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역시.

“한꺼번에 덤벼!”

새된 목소리는 신원을 특정하기 어려웠다. 일부러 높은 목소리를 내는 듯했다. 하지만 딱 하나. 성별만은 알 수 있었다.

그때의 그 여기사인가. 제빌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프리빈트에게 딱 달라붙은 그가 작게 속삭였다.

“이제 믿으시겠습니까?”

“…믿을 수밖에 없겠군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눈빛을 교환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제빌이 갑자기 검을 뽑아 제 오른쪽으로 휘둘렀다.

아래에서 위로 휘둘러진 검날이 무언가에 부딪쳐 쨍, 소리를 냈다. 불의의 일격을 받은 상대는 미처 대비하지 못했는지 순간적으로 검을 놓쳤다. 아마 제빌이 습격당한 날, 곁에서 그의 움직임을 지켜봤던 자였겠지.

그때의 제빌은 이 기습을 피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 ‘보였다’. 습격자의 방심이 모든 것을 갈라 놓았다.

“……!”

낮은 기합과 함께 제빌이 검을 되돌려 곧바로 오른쪽에 찔러 넣었다. 막아 낼 수단을 잃은 상대는, 반사적으로 피해 내긴 하였으나 발밑이 너무 불안정했다. 흙과 돌, 그리고 풀 따위가 그의 발목을 얽었다.

잠시 멈칫한 사이 찔러 들어왔던 은빛의 검신이 방향을 바꾸었다. 제 배를 향해 휘둘러지는 선을 막지 못한 그의 몸이 맥없이 무너졌다.

또 다른 습격자가 가제보의 천장에 달라붙어 있다가 아래로 뛰어내리며 기습을 걸었다. 하지만, 그 타이밍이 너무 늦었다.

분명 제 동료의 몸에 박혀 빠지지 않았어야 할 검 끝이 자신에게로 향해 있었다. 놀란 그가 재빨리 검을 더 길게 뻗어 보았지만, 그 큰 동작을 맞아 줄 정도로 제빌은 느리지 않았다. 살짝 옆으로 피한 제빌의 검이 습격자의 배를 꿰뚫었다.

“크허… 억!”

순식간이었다. 두 명의 습격자가 제거당하는 건.

그 모습을 바라보던 프리빈트가 이를 악물고 검을 강하게 쥐었다. 멍하니 있을 때가 아니었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하지만….”

“지금 황태자께서 움직이시다 예기치 못한 기습이라도 받으면 더 곤란해집니다. 이 장소를 고른 건 지키기에 용이하기 때문입니다. 부디 제 뒤에서 나오지 말아 주십시오.”

황태자가 서 있는 위치는, 그 어느 쪽에서도 공격할 수 없었다. 공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빌을 거쳐야만 한다. 그리고 제빌은 절대 길을 터 줄 생각이 없었다.

제빌이 두 명의 습격자를 상처 하나 없이 쓰러뜨리는 사이 루비나드는 다섯을 상대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칫.”

루비나드는 쇄도해 오는 검의 궤적을 빠르게 쳐 냈다. 여럿과의 싸움에서 믿을 수 있는 건 오로지 하나.

감뿐이었다.

읽고 움직이려 하면 늦는다. 본능을, 감을 믿고 움직여야 한다. 루비나드는 검을 쳐 내기가 무섭게 몸을 돌려 뒤로 한 발 크게 물러났다.

절대 프리빈트의 앞에서 움직이지 않을 기세였던 루비나드가 의외의 방향으로 물러나자, 다섯 명의 습격자들이 둘로 나뉘었다. 둘은 프리빈트와 제빌을 향해, 셋은 루비나드를 향해 몸을 돌렸다.

세 명의 습격자가 루비나드를 향해 한 걸음 내딛기가 무섭게 루비나드가 다시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붉은 것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느껴졌다.

그 한 번의 스쳐 지나감이 한 명의 목숨을 앗았다. 정확하게 발목을 베어 넘어뜨린 루비나드가 언제나 품속에 넣고 다니는 단검을 꺼내 다른 한 명에게 던졌다. 혹여 제빌과 프리빈트에게 맞을까 걱정되었던 건지 방향이 모호했다. 덕분에 손쉽게 피한 습격자가 그녀를 무시하고 황태자에게 검 끝을 향한 순간.

“컥!”

무언가가 그의 목 중앙에 박혔다.

그렇게 느꼈을 땐 이미 모든 게 끝난 후였다. 챙그랑 맑은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진 검을 재빠르게 주워 든 루비나드가 검 끝을 교차하여 앞으로 내밀었다.

쌍검을 사용한다는 건 그만큼 체력과 근력의 소모가 커진다는 뜻이었다. 속도를 중시하는 루비나드는 별로 쓰지 않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지금 굳이 이 방법을 취한 건.

“왜 그래? 겁먹었나?”

굳이 혼자서 셋을 다 상대할 필요는 없다. 투척용 단검 두 개도 모두 사용했고, 뒤에는 지켜야 할 두 사람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겨우 일이 분 거리에 있는 기사단을 기다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상대는 기다려 주지 않을 터.

그렇기에 변칙이 필요했다. 루비나드에게 무언가 비장의 한 수가 있을 거라는 허세.

물론, 허세만은 아니었다.

“큭…!”

세 사람 역시 검에는 일가견이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루비나드의 쌍검을 허세라고 간파했다. 그래서 제각각의 루트로 검을 휘둘렀다.

하나는 루비나드의 정면을 찔러 들어갔고, 하나는 위에서 아래로 크게 찍어 내렸으며, 또 하나는 발목을 노렸다.

“하.”

어이없다는 웃음과 함께 루비나드가 몸을 갑자기 낮췄다. 살짝 옆으로 돌며 낮춘 덕에 정면에서 찔러 들어 오던 검을 바로 회피할 수 있었다. 루비나드는 검 하나를 땅에 박아 발목을 노리는 검을 막아 내고, 또 하나는 위로 들어 올려 곧바로 방향을 틀어 흘려 냈다.

위에서 찍어 내린 이의 무게 중심이 흐트러지는 걸 확인한 루비나드가 곧바로 튕기듯 몸을 날렸다. 그 힘을 이용해 바닥에 박혀 있던 검을 뽑고, 다른 한 손을 휘둘렀다. 그 휘두른 검에 정면에 있던 자의 팔이 깊게 베였다.

아무리 숙련된 검사라도 팔이 베이면 근육의 경련 때문에 검을 놓치게 된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루비나드는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팔이 베인 검사의 배에 검을 찔러 넣었다. 반사적으로 피하기 위해 몸을 돌린 모양이지만, 그것 역시 루비나드의 예상 안.

그녀는 찌르던 검을, 스텝 하나로 기세를 죽여 바로 횡으로 휘둘렀다.

남은 것은, 둘.

“어지간히도 쉽게 본 모양이야. 겨우 이 정도로 우리 셋을 상대하려 했다니.”

“…….”

아무리 무위가 뛰어나도 다섯에게 둘러싸여 이 정도까지 할 줄이야.

키아네는 이를 악물었다.

저하께서 대적하지 못하실 정도, 가 아니었다. 이 여자는 분명 실전 경험이 미천할 터. 그런데 왜 이토록이나 자유로운 검술을 구사하는 것일까. 마치 오랫동안 전장에서 굴러온 용병 같았다.

아니, 그것과는 조금 다른가. 싸우는 방법이 더럽다기보다….

마치 실체가 없는 것을 베려 한다는 느낌이었다.

상대가 정해져 있으면, 그 상대에 맞는 검술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여자는 그런 고정관념이 없어 보였다. 마치 허공이 언제 어디서든 자신을 베어 넘길 거라 믿기라도 하는 것처럼.

하나의 공격에 수많은 갈래를 준비해 놓는다. 그녀의 근력이나 속도 역시 뛰어난 건 맞았지만, 그녀의 전투 수준은 훨씬 더 높은 경지에 있었다.

대체 어떻게 이런 수준의 검술을 구사할 수 있는 거지.

“…….”

키아네가 슬쩍 다른 기사에게 눈짓했다. 이걸 놓치면 기사단이 들이닥친다. 이 딱 한 번의 공격이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니.

다른 습격자가 먼저 루비나드에게 덤벼들었다. 하지만 거기엔 적의도, 살기도 없었다. 교란인가. 루비나드가 한 발,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며 검을 옆으로 휘둘렀다.

하지만.

“……?!”

습격자는 루비나드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그걸 본 제빌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감히, 저 더러운 새끼가 어디에 손을…!

그 분노에 저도 모르게 한 발 앞으로 내디뎠다. 그 틈을 키아네가 파고들었다.

“으윽…!”

루비나드는 안 되지만, 제빌은 얼마든지 상처 입혀도 상관없었다. 그래서 키아네는 사양 않고 검을 휘둘렀다. 연한 청회색의 리본이 반으로 갈라졌다.

“…하.”

제빌의 입에서 옅은 웃음소리 같은 것이 새었다.

미쳤나? 공포로 인해 정신을 놓은 건지도 모른다. 차라리 잘되었다. 키아네는 제빌을 향해 검을 강하게 찔러 넣었다. 뒤에 있는 황태자까지 같이 꿰어 버릴 생각이었다.

“크흑…!”

하지만 꿰뚫린 것은 제빌이 아니라 키아네였다.

어디서 나온 것일까. 키아네가 파악하지 못한 곳에서 나온 작은 단검으로 제빌은 정확하게 키아네의 찌르기를 막아 냈다. 말도 안 되는 기예. 당황한 키아네가 검을 옆으로 휘두르기도 전에 제빌이 제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내질렀다.

정확하게 폐를 꿰뚫은 검 탓에 피가 울컥 차올랐다. 입을 타고 흘러나오는 그 붉은 액체를 보며 제빌이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죽고 싶어서 환장한 것에도 정도가 있지…, 감히 네깟 게 이 귀한 걸 건드려?”

제빌은, 마치 검을 빼내려는 것처럼 손을 휘저었다. 그 탓에 키아네의 입술을 타고 오르는 핏덩이가 더 거세졌다.

“얌전히 죽었으면 이런 꼴은 안 당하잖아? 응?”

제빌은, 강하게 검을 밀어 키아네를 바닥에 넘어뜨렸다. 일어나려 버둥거리는 그녀는 숨이 모자란 탓인지 좀체 몸에 힘을 주지를 못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바닥을 기어 다닐 뿐이었다.

그 모습을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갑게 식은 눈동자로 바라보던 제빌의 눈에 루비나드가 들어왔다. 그녀는, 감히 그녀의 몸을 건드린 남자의 팔다리 힘줄을 끊어 무력화시키고 있었다.

기사단이 도착하기까지의 겨우 오 분.

그사이에 모든 것이 끝났다.

“폐하!”

“빨리 왔군, 고레야스 경. 황태자와의 대화를 위해 일부러 경비를 좀 멀리 배치했었는데.”

루비나드는 별것 아니라는 듯 싱긋 웃어 보였다. 그 얼굴에 튄 피가 하얀 얼굴을 더 요염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새하얀 제복도 온통 피투성이였다. 제빌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루비나드에게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저자는 포박해서 지하 감옥에 가두십시오. 심문은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제빌이 프리빈트에게 눈짓을 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의 대화가 오가는 것을 바라보던 루비나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제빌은 프리빈트가 허가의 뜻을 보이기가 무섭게 루비나드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의심으로 가득 찬 채 자신을 바라보는 보라색 눈동자에 순간 등골이 서늘했다.

“…일단 이거라도 걸치십시오.”

제빌은 제 외투를 벗어 루비나드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뺨에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채 낫지 않아 벌어진 상처 사이로 제 피가 새어 나오는 것을 보곤 멈춰 섰다.

“괜찮아.”

“피가 많이 묻었습니다. 더러우니 닦아 드리겠습니다.”

제빌은,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려다 뭉뚝 잘린 제 리본을 보고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린 듯 하얀 손수건으로 루비나드의 뺨을 닦아 주었다.

“괜찮으십니까?”

“물론. 그대는?”

“괜찮습니다.”

당신께서 괜찮으시다면 뭐든.

청회색의 눈동자가 휘어지며 미소 지었다. 루비나드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기사단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제빌은.

“…후우.”

피에 젖은 채 바닥에 떨어져 있는 천 조각을 주웠다. 그리고 가만히 주먹 쥐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제 주먹 속에 꼭꼭 숨기려는 듯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