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82)
이제 추위는 가시고 더위가 찾아오려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사람들의 옷차림에도 봄과 여름의 경계가 보였다. 그 형형색색의 드레스를 바라보고 있던 루비나드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십니까.”
“보기만 해도 답답해서.”
“저런.”
제빌이 안타깝다는 듯한 목소리를 흘리자, 루비나드의 자세가 더 삐딱해졌다. 저러다가 아예 드러누우시겠는데. 제빌이 그녀에게 주의를 주기 위해 다가선 그때 낯익은 남자가 다가왔다.
금색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를 지닌 호감형 미남자.
하지만 분명 호감형이었던 그의 얼굴은 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질투와 분노겠지. 제빌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스몄다.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자.”
“…….”
무례한 행동이었다. 인사에 답을 돌려주지 않는다는 건.
하지만 에브니겔은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는 듯 루비나드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제빌은 끈질기게도 그 시선을 차단하기 위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직 상처가 남아 있는 뺨 위를 덮은 반창고가 눈에 거슬렸다.
“다치셨나 보군요.”
“예, 조금. 황자께서 걱정해 주실 정도는 아닙니다.”
“그래 보이는군요. 다행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간 짧은 대화에 담겨 있는 가시가 서로를 찌른다.
다친 김에 더 심한 꼴을 당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라고 말하는 듯한 에브니겔과 네가 신경 쓸 바 아니라고 대답을 돌려주는 제빌. 두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신경전이 루비나드의 심기를 거슬렀다.
“…우린 남은 일이 있어서. 그만 가도록 하지, 국서.”
“예.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제빌은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루비나드의 뒤를 따랐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에브니겔이 으득, 이를 갈며 주먹을 꽉 쥐었다.
잘난 것 하나 없는 쓰레기가.
하지만 애정 싸움에서는, 더 많은 애정을 받는 쪽이 언제나 승리하기 마련이었다.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어도,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아무리 강해도 소용없다. 그저 루비나드의 애정을 더 받는다는 이유로 저 남자가 더 우월해지는 것이다.
“참으십시오, 저하.”
시종이 그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여기서 소란을 일으켜 연회에서 쫓겨나기라도 하면 곤란해지기 때문이었다.
에브니겔은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홱 고개를 돌렸다. 그 눈에 서린 광기는 이미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자극받게 만든 것일까.
“내가 이 제국을 점령하는 그날.”
“네.”
“저 새끼는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가장 참혹한 꼴을 당하게 해 줄 것이다. 죽지도 못하게 억지로 숨을 붙여 놓고.”
제빌 자신이 그에게 무언가를 한 건 없었다. 대놓고 비웃거나 비아냥거린 적도, 모욕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차라리 그게 나았을 터였다. 루비나드의 애정을 받는 것보단.
자신은 조각조차 받을 수 없었던 그 애정. 그걸 자그마치 이십여 년이나 누려 온 저 남자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저 남자의 앞에서 그녀를 안아 주는 것도 괜찮겠군.”
아마, 그게 그 어떤 고문보다도 저 남자를 망가뜨릴 수 있을 테니.
저 우월감에 가득 차 있는, 자신을 깔보는 눈동자가 망가지는 꼴은 틀림없이 즐거우리라. 시종이 에브니겔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손에 넣기만 하면 저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다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래.”
그러려면 일단 손에 넣어야 할 것이 있었다.
일단은 황태자의 자리. 그다음에는 아버지를 설득해 볼 생각이었다.
현 황제는 전쟁을 겪어 본 적이 없다. 선황제는 병석에 누워 하루 악화됐다가 하루 호전되는 것을 반복하고 있다고 하니, 아무런 조언도 할 수 없을 터. 이 호기를 놓치면 로간 제국을 정복하는 건 훨씬 더 후의 일이 될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무슨 생각으로 로간과의 동맹을 수락한 건진 알 수 없지만, 만약 젊고 미숙한 황제를 방심시키기 위해 그러하신 거라면….
“준비는.”
“일곱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호위는 없다고 했지?”
“네. 멀리 물려 둔다고 했습니다. 소란이 일어나도 합류하는 데 오 분은 걸릴 겁니다.”
“멍청한 짓이군.”
호위란 언제든 바로 달려올 수 있는 곳에 두어야 하는 것인데. 하긴, 그 찌끄레기가 일을 하면 얼마나 잘하겠나.
에브니겔의 입술이 비틀어졌다.
“형님은 언제 도착하신다고?”
“점심시간이 조금 지났을 무렵에 도착하실 것 같습니다. 계속 감시 중입니다.”
“그래. 잘 진행되면 좋겠는데. 여러 가지로.”
“예…. 오늘 일이 잘 마무리된다고 하더라도 폐하의 지지 없이는 국내의 혼란을 수습하는 데도 꽤 시간이 걸릴 테니까요.”
“무얼.”
어차피 형제의 피를 이 손에 묻히려 한다. 아비의 피까지 묻힌들 무어 예사일까.
악토그라토리아의 황실 역사는 피로 뒤덮여 있었다. 거기에 자신이 새로운 핏자국을 하나나 둘쯤 추가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에브니겔이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방해되는 건 모조리 치워 버리면 그만 아니겠어.”
그 목소리는 시종의 귀에 닿지 못했다. 순간 불어온, 봄 햇살에 어울리지 않는 찬바람에 몸이 부르르 떨렸기 때문이었다.
기분 탓일까. 바람 속에 피비린내가 배어 있는 것 같았다.
* * *
악토그라토리아의 황태자, 프리빈트 드 악토그라토리아가 대연회장에 도착한 것은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후였다. 그는 들어서자마자 주변을 둘러보며 분위기를 파악했는데, 주위의 귀족들이 제게 관심을 가지는 걸 꽤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였다.
한동안 입구 근처에 서서 주변을 관찰하던 그가 이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붉은 눈동자는 루비나드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루비나드가 본 프리빈트는 제 동생과는 꽤 다른 인상이었다. 진중하고 엄숙한 표정이 아비인 황제와도 느낌이 달랐다.
“만나서 반갑소, 황태자.”
루비나드는 정중하게 인사하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고, 프리빈트는 잠시 그 손을 내려 보다가 제 손을 내밀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황제시여.”
그는 폐하라는 호칭을 쓰는 걸 삼갔다. 하긴. 현 황제가 양위하면 당장 내일이라도 황제가 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런 그가 타국의 황제에게 폐하라는 호칭을 쓰는 건 꺼려지는 게 당연했다.
일견 무례해 보일 수 있는 호칭에도 루비나드는 호의적인 미소를 띠었다.
“이번엔 이런 일로 만나게 되어 유감이오. 좀 더 두 나라의 미래에 대해 논할 수 있는 자리에서 만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저 역시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 기회가 있으니 다음엔 조금 더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루비나드가 보일 듯 말 듯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미소 짓더니 황태자가 잡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고는 그를 연회장 바깥으로 이끌었다.
이미 이야기가 되어 있었기에 황태자는 순순히 그녀의 뒤를 따라왔다. 그 뒤를 제빌이 따랐다.
얼핏 보기에 세 사람의 행렬은 꽤 평온해 보였다. 로간의 황제가 먼저 대화의 운을 띄우고 악토그라토리아의 황태자가 받는 것이 반복되었다. 그 속에서 제빌은 담담하게 뒤를 따르는 것처럼 보였으나 손은 검 손잡이에 가 있었다.
“황태자도 검을 즐기는가.”
“굳이 따지자면 저는 활을 더 즐겨 쏩니다. 부족한 솜씨이긴 하나 지난가을 사냥 대회에서는 곰을 쏘아 쓰러뜨린 적도 있습니다.”
“곰을! 대단하군. 짐도 어렸을 때는 활을 즐겼지. 그때는 힘이 부족해 수노를 사용해야 했지만 말이야. 그래도 조금 더 큰 후에는 제대로 활을 사용해 늑대를 잡은 적도 있네.”
“늑대를? 대단하십니다. 늑대는 속도가 워낙 빨라 자칫 놓치기가 쉬운데.”
“으음. 첫발이 빗나갔을 땐 짐도 등골이 서늘했지. 꽤 남아 있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지더군. 반사적으로 활을 당기지 못했더라면 놓쳤을 거야.”
“순발력이 대단하시군요.”
진심으로 대화를 즐기는 루비나드와 달리 프리빈트는 적절하게 맞장구치면서도 주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가 달려들기라도 할 것처럼. 제빌 역시 신경을 곤두세우며 주변을 살폈다.
무사히 후원에 마련된 작은 가제보에 도착하자 거기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와 다과가 차려져 있었다. 미리 제빌이 주방에 일러 준비시켜 둔 것이었다.
“일단 앉지.”
“네.”
프리빈트가 흘끗 제빌 쪽을 바라보았다. 제빌이 엷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황태자는 루비나드의 맞은편에 앉았다.
어딘지 숨 막히는 공기가 느껴졌다.
“황태자가 좋아하는 찻잎이라 들어 특별히 준비하도록 했는데, 입에 맞을지 모르겠군.”
“향만 맡아도 알겠습니다. 무척 상질의 찻잎이군요.”
“으음. 사실 짐은 찻잎을 잘 몰라서. 이런 건 모두 국서가 준비해 준 것이네.”
“국서께서. 내조가 대단하시군요.”
그 말에서 묘한 어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적의와는 결이 다른 그 무언가를 눈치채지 못한 루비나드가 생글 미소 지으며 찻잔을 들었다.
“짐에게 있어서는 그 누구도 따를 수 없을 정도의 배우자지.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있네.”
순간 제빌의 긴장이 흐트러졌다.
이 사람은 대체…. 처음 보는 남자 앞에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지만, 이 정도라면 귓바퀴가 붉어지는 정도에서 끝나리라.
제빌은 한순간의 방심이 모든 걸 망칠 수 있다는 걸 상기하며 이를 악물었다.
“황태자는 이미?”
“네. 성년이 되자마자 처를 들였습니다.”
“그런가.”
“제 처 역시 국서께 비견될 정도는 아닐지도 모르나…, 제게 있어서는 최고의 처입니다.”
빙그레 웃는 얼굴에서 감정이 드러난다. 엄격하기 그지없던 얼굴에 피어난 부드러움은, 보고 있는 루비나드의 가슴을 간질일 정도였다.
이 남자는 진심으로 아내를 사랑하고 있구나.
둔한 루비나드가 느낄 수 있을 정도의 감정이었다.
“으음, 혹시 불쾌하다면 대답해 주지 않아도 되네. 짐 역시 이런 질문이 실례일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네. 두 사람은 그냥 정략혼이 아닌 것 같은데.”
다소 무례하다고 여길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 얼굴에 피어난 미소를 보자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황태자는 기분이 상하지 않았는지 쑥스러운 듯 웃어 보였다.
“오히려 제가 죄송합니다. 가끔 아버지께서는 팔불출처럼 행동하고 다니지 말라고 하시긴 하는데…. 처 이야기만 나오면 이렇게 되는군요.”
루비나드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언제나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이었다.
‘그 여자’도 그랬고, 커드닐도 그랬고, 에브니겔도 그랬다. 겔라드 역시.
그래서 루비나드는 차라리 정략혼이 더 낫다고 여겼다. 서로에 대한 아무런 감정 없이, 후계와 나라만을 위해 맺는 결혼. 얼마나 간결하고 깔끔한 관계인지.
하지만 지금 처음으로 루비나드의 앞에서 행복한 얼굴로 사랑을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 그의 표정이 어쩐지….
“아니, 보기 좋군. 아주.”
루비나드가 들어 올린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한 모금을 머금으려던 순간. 문득 그녀의 손이 멈춰 섰다.
“…….”
그녀의 손이 기울어졌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 사이로 드러난 보라색 눈동자가….
위압감으로 가득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