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79)
“실례합니다, 폐하. 고레야스입니다.”
갑작스러운 친위대장의 방문에 루비나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제빌을 바라보자, 그는 무언가 묘한 눈동자로 집무실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나가 보겠습니다.”
“으음.”
여기까지는 평소와 그리 다를 것이 없었다. 언제나 방문객이 오면 제빌이 먼저 맞이하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 뒤의 반응은 평소와 꽤 달랐다.
“조금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 두 번씩 내용 체크해 둔 것들이니 폐하께서 한 번 더 보시고 서명해 주시면 됩니다.”
마치 서류 작업을 마치기 전에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듯한 말투였다. 루비나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빌을 보자, 그가 엷게 웃었다.
“경이 찾아온 이유가 대충 짐작이 가서 그렇습니다.”
“…흐음, 그래. 알겠어.”
개인적인 용무인 걸까. 그렇다기엔 고레야스는 자신을 불렀다. 루비나드는 어딘지 석연찮은 감정을 지워 내며 종이 뭉치를 받아 들었다.
씩 웃은 제빌이 집무실 문을 열자 곤란한 표정의 고레야스가 서 있었다.
“잠시.”
제빌이 탁, 하고 문을 닫았다. 그러고도 혹시나 그녀에게 들릴까 고레야스와 함께 소알현실 근처까지 걸음을 옮겼다.
“다휜가의 차남 일입니까?”
“네…. 폐하를 꼭 만나 뵈어야겠다며 소란을 피우셔서.”
후작가의 차남이긴 해도, 장남보다 더 후계로서 유력한 그를 무시할 순 없었을 것이다. 제빌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아, 하지만….”
“괜찮습니다.”
겔라드는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검사였다. 그 커다란 체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과 그 체격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 만약 그가 무력을 사용하면 제빌로서는 대적할 수 없을 터였다. 물론 그럴 일은 없어야 하겠지만.
고레야스가 망설이자 제빌은 제 손으로 소알현실의 문을 열어 젖혔다.
“폐…, …….”
루비나드가 온 줄 안 것일까. 벌떡 일어나며 폐하를 외치던 그의 입이 꾹 다물렸다. 그 눈동자에서는 증오마저 느껴졌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다휜 경.”
제빌이 괜찮다는 듯 옅은 미소를 보이곤 문을 닫았다. 잠시 그 앞에서 머뭇거리던 고레야스는 이내 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멀리 가지는 않고, 이야기 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을 정도까지만 거리를 벌렸다.
만에 하나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서.
그의 발소리가 멀어진 것을 확인한 제빌이 문에서 벗어나 방 안으로 들어섰다.
“…왜… 전하께서?”
전하라는 말을 씹어 뱉는 목소리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아마 제빌을, 그 호칭으로 불러야 하는 날이 올 줄은 상상도 해 본 적 없었겠지. 만족의 미소를 띤 채 제빌이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바쁘셔서 제가 대신 왔습니다. 제게 말씀해 주시면 폐하께 전달해 드리도록 하지요.”
눈꼬리를 휘며 내비치는 그 웃음에는 자신감이 서려 있었다. 어린 날의 비굴하고 약한 제빌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빌어먹을. 겔라드는 이를 빠득 갈고는 비웃음을 띠었다.
“전하께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아닙니다. 폐하께 직접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바쁘시다면 여유가 생기실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죠.”
너 따위가 감히 폐하의 대신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렇게 말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제빌 역시 물러서지 않고 미소로 응대했다.
“당분간은 연회 준비와 국가 사업 관련으로 바쁘실 예정입니다. 부족하지만 국서 된 자로서 폐하의 대리를 맡게 되었으니,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겔라드는 더 대화할 생각이 없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대로 제빌을 스쳐 나가려던 그가 멈출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냥 가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제빌의 비웃음 섞인 목소리 때문이었다.
겔라드가 불쾌감을 가득 담은 연갈색 눈동자로 그를 보자, 얼음 같은 청회색 눈동자가 사르르 녹았다. 그 뒤에 드러난 건 다름 아닌 적의였다.
“아쉬우시겠습니다. 폐하가 여유가 되셨다면, 제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알 수 있는 기회가 되셨을 텐데.”
겔라드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이 남자가, 어떻게? 정보 수집은 오랜 기간에 걸쳐 아주 조심스럽게 이루어졌다. 이 남자가 얼마나 주도면밀한지, 치밀한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겔라드가 그러모을 수 있었던 아주 작은 조각들은 대부분 이 남자가 아주 어렸을 때의 것들이었다.
아직, 이런 괴물이 되기 전.
하지만 아무리 괴물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수십 년간 제 곁을 지켜 왔던 부관까지 매수하진 못했을 텐데.
“경께서도 어지간하시군요. 설마 폐하께 차였다고 모든 걸 이르겠다며 달려오실 줄이야.”
비아냥거리는 말투가 거슬렸다. 그런데도 한마디 반박도 하지 못한 건 몸이 얼어붙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적의가, 점차 살의로 변하는 것이 느껴졌기에.
“경의 구혼장을 거절하신 건 폐하이십니다.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찌 저를 끌어내려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걸 억하심정이라 하던가요.”
싸늘한 목소리. 몸을 짓누르는 위압감.
뛰어난 검사이기에 알 수 있었다. 눈앞의 남자는 무력으로 어찌해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겔라드의 예상을 훨씬 빗나간 괴물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남자는.
그런데도 겔라드가 제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던 것은, 검을 빼낼 수 있었던 이유는.
“네놈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그 뻔뻔함에 치가 떨릴 정도로 분노가 치밀었기 때문이었다.
“폐하의 주변에서, 폐하께 호의를 갖는 남자는 모두 쳐 내고 그 옆자리를 강제로 꿰차 놓고? 폐하의 곁에 남자라곤 네놈 하나밖에 남겨 놓지 않았으면서? 나도, 보르본 공작가의 공자도 네놈 때문에 폐하께 버림받았는데!”
역시, 겨우 그 정도인가.
분노로 일그러진 정신은 가리고 숨기는 것이 서툴러지는 법이었다. 특히 겔라드 같은 유형의 남자는.
이 남자는 처음 루비나드를 봤을 때부터 올곧게 호의를 보냈다. 마치 앞으로 달리는 것밖에 모르는 경주마처럼. 하지만 그렇게 달리다 보면 장애물을 보지 못하는 법이었다.
제빌이 준비한 건 그저 작은 돌부리였을 뿐. 그걸 보지 못하고 넘어진 건 이 남자였다.
“제가 없었으면 폐하의 곁에 설 수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하지! 너 같은 결함품은 폐하의 곁에 어울리지 않아!”
“그게 당신의 결함입니다.”
제빌이 한 발 가까이 겔라드에게 다가갔다. 그 기세에, 도리어 검을 든 겔라드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제빌은 상관없다는 듯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가 벽으로 밀어 넣었다.
막다른 곳에 몰린 겔라드가 검을 내밀어도 제빌은 싸늘하게 미소 지을 뿐 물러서지 않았다.
“그대가 폐하의 곁에 설 수 없었던 건 저보다 뛰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뭐…!”
“그대가 저보다 이성적이었다면, 앞을 내다보는 수읽기가 빨랐다면, 무력이 뛰어나 절 죽이거나 감금하거나 폐하의 앞에서 치워 버릴 수 있었다면. 저는 당연히 여기에 있지 못했겠지요.”
무엇이라도 하나. 단 하나라도 그가 더 뛰어났더라면 제빌은 여기 있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제빌이 그녀의 옆을 차지할 수 있었던 건 더러운 수를 써서가 아니었다.
더러운 수까지 썼기 때문이지.
“한낱 빵 한 조각만큼의 가치도 없는 그 자존심이라도 버리고 폐하께 매달려 빌었더라면 후궁에 자리 하나쯤은 차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대는 보르본 공작가의 차남보다는 덜 미움받지 않았습니까.”
물론, 한 짓은 둘 다 다르지 않다. 다만 커드닐은, 겔라드의 다음에 일을 저지른 탓에 가중처벌을 받았을 뿐.
설마 둘 다 그걸 아직도 모르는 건가.
제빌은 그들이 우스웠다.
사랑한다면 철저하게 파헤쳐야 한다. 절대로 미움받지 않기 위해서,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 제빌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행했다.
하지만 이들은 대체 뭘까. 루비나드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녀에 대해서 더 깊이 알려 하지 않는다. 절대로 미움받지 않으려 노력하지 않는다. 당연히 자신이 그녀의 곁에 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버림받으면 그걸 제빌의 탓이라 생각한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계기를 준 건 제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제빌의 계략에 말려든 건 그들이 무지하기 때문이었다. 그 넘쳐 나는 자신감이 오만함을 심었기 때문이었다.
“그대가 이 자리에 설 수 없었던 건 그대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제빌의 손이 겔라드의 검날을 쥐었다. 넋이 나간 겔라드가 그저 지켜만 보는 사이, 그는 서서히 검을 당겨 제 얼굴에 가져갔다.
예리하게 갈린 날이 하얀 뺨을 파고들었다.
주르륵 날을 타고 흐르는 붉은 피가, 겔라드의 눈에는 푸르게 보였다.
“지금도 그렇지 않습니까. 왜 함부로 제 앞에 무기를 들이미시는 겁니까.”
여전히 정신을 차리진 못했지만, 공포에 질린 겔라드가 본능적으로 검을 당겼다. 하지만 놓아 주질 않았다. 분명 날이 손을 파고들어 아프고 괴로울 텐데 제빌은 고통에 찬 소리 하나 내지 않고 빙그레 웃고 있었다.
“그대와 저, 두 사람만 이 방에 있었습니다. 그런 제가 상처를 입었다면 누구에게 입은 것이 됩니까?”
제빌의 뺨을 타고 흐른 붉은 액체가 입술에 닿는다. 발간 입술이 빨갛게 물들어 묘한 색기를 뿜어냈다. 살짝 내리뜬 눈동자가, 겔라드의 몸이 점점 아래로 허물어지고 있음을 알게 했다.
벽을 타고 주르륵 미끄러져 내려간 겔라드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미 검을 잡았던 손에서는 힘이 빠진 지 오래였다.
“턱없이 부족합니다. 폐하에 대한 마음도, 능력도. 유일하게 내세울 수 있었던 가문도 이제는 소용이 없어졌죠. 쿠온가는 앞으로 영원불멸, 공작가의 자리를 지켜 낼 테니까요.”
탱그랑.
차가운 바닥과 피를 머금은 검이 만나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제빌은 괴물을 보듯 공포에 질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겔라드를 향해 상체를 숙였다. 그리고 그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대가 가지고 있는 것들, 폐하께 보여 보십시오. 말리지 않을 테니. 하지만 각오는 되신 거겠죠?”
싱긋, 휘어진 청회색의 눈동자가 살기로 형형하게 빛났다.
“그로 인해 제가 버림받으면 어떻게 될 것인지, 그 뒷감당을 하실 각오 정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