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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 (77)화 (78/115)

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78)

“쯧.”

결국, 눈치 보던 귀족 중 일부가 일을 쳤다.

루비나드에게 대놓고 건의를 하지 않았기에 시간을 미룰 수는 있겠지만, 그게 들켰다간 나중 일이 귀찮아질 게 뻔했다. 그래도 보통 구혼장의 대답 기일은 반달. 그 정도의 시간 여유가 있으면 충분했다.

제빌은 제 손에 들린 세 통의 구혼장을 루비나드의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혀를 찼다.

“이제 초여름인데, 오늘은 꽤 쌀쌀하군.”

“날이 흐려서 그런가 봅니다.”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제빌의 표정이 바뀌었다. 조금 전의 불만스럽던 얼굴은 어디 갔는지, 평소의 무덤덤한 얼굴로 답한 제빌이 제 자리에 앉았다. 루비나드 역시 자신의 책상으로 향하다가 문득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뭉크리안 공작가, 라자크 공작가, 다휜 후작가에서 온 구혼장입니다.”

서신을 손에 들고 곰곰이 성씨를 곱씹던 루비나드의 얼굴이 한층 더 일그러졌다. 다휜 후작가라니.

“설마 차남은 아니겠지?”

“맞습니다.”

“…….”

어이가 없다는 듯 손안의 붉은 봉투를 내려다보던 루비나드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툭, 책상 위에 던져 놓곤 자리에 앉더니 보는 것도 싫다는 듯 구석으로 치워 버렸다. 그 모습에 제빌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슬슬 내가 우스워 보이기 시작한 건가?”

“폐하가 탐이 나는 것이겠지요.”

“탐이 나? 내가 물건도 아니고.”

커드닐도 그렇고, 다휜가의 차남도 그렇고. 대체 자신의 말을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물론 겔라드에게는 다신 제 앞에 모습을 보이지 말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하지는 않았지만 설마 제게 구혼할 줄은 몰랐다.

“다휜가에는 거절의 뜻을 전해 두도록 해.”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지 않을 것은 또 무언가. 혹시 반발이 있다면 가주와의 알현을 잡아 줘.”

“알겠습니다.”

애초에 다휜가의 가주는 이 구혼에 반대했다. 겔라드와 제빌 사이에 있었던 일을, 가주 역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실과 반목하는 후실이라니. 앞날이 뻔했기에 가주는 반대했다.

하지만 겔라드는 뻔뻔하고 오만하게,

-국서는 제게 관여할 수 없습니다. 제게 수가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

그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어리석은. 그가 손에 쥐고 있는 건 제빌이 한 일들의 부스러기에 지나지 않았다. 제빌이 어디까지 선을 넘었는지 그는 아직 모른다. 그러기에 두려움도 없이 그런 소리를 내뱉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겠지. 혹시 제빌이 파악하지 못한 부분까지 손에 넣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니.

“폐하.”

“음?”

“혹시 제가 폐하가 모르는 곳에서 어떤 잘못을 했다면…. 폐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점심 뭐 드시겠습니까?

그렇게 묻는 것처럼 담담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속에 있는 떨림을 전부 숨길 수는 없었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바라보던 루비나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그 잘못이 폐하와 관련 있는 것이라면요.”

“흐음….”

갑자기 저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뭘까. 대체 무엇을 잘못했기에.

별일 아닌 듯 가벼운 말투지만, 표정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이 상당했다. 그렇다는 건 루비나드도 제대로 생각한 후 대답해 주는 게 맞겠지.

인간은 누구나 잘못을 한다. 다만, 루비나드는 그 잘못이 누군가를 상처 입히는 잘못이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게 심지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벌어져선 더더욱 안 될 테지.

잠시 더 생각하던 루비나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모르겠군.”

“…그렇게 말씀하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제빌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서렸다.

루비나드는, 그게 무슨 잘못인지 모르는 이상 확실하게 대답하지 못한다. 설령 그게 제빌이 저지른 일이라고 하더라도.

제빌 역시 언제든 끊어 낼 수 있는 사람에 불과하니까.

다만 가슴 속 어딘가에서는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그대가 한 짓이라면… 엄하게 질책하고 추궁하여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지.’라고 대답해 주기를.

자신만은 특별하기를.

그녀가 자신의 예상대로 답해 주어서, 제빌은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아무리 그대라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게 있으니 말이야.”

“…용납할 수 없는 잘못이란 어떤 것인지 여쭈어봐도 괜찮겠습니까?”

제빌은, 언제나 루비나드보다 더 루비나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루비나드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혐오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 질문의 답도 어쩌면 루비나드보다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묻는 이유는 뭘까.

루비나드는 그가 말하는 ‘잘못’이라는 게 어쩌면 그 선에 걸쳐져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뻔하지. 사람으로서의 선을 넘어선 일을 행하는 것이네.”

루비나드는 모른다. 사람으로서의 선이라는 건,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제빌은 일부러 그 말을 수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루비나드가 생각하고 있는 사람으로서의 선이라는 건 뻔했다. 그리고 이미 자신은 확실하게 그 선을 넘어서 있었다.

다만 겔라드가 쥐고 있는 것은….

아슬아슬하게 루비나드의 선을 넘어서지 않는 것일 수도 있었다.

“폐하의 기준은 너무 엄격합니다.”

“그런가?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는데.”

“때로 사람은…. 선을 넘어섰을 때조차 자신의 편이 되어 줄 사람이 필요한 법입니다.”

선을 넘었을 때도 편을 들어 주는 사람. 루비나드에게는 없었다.

그녀는 황족이었다. 황족이기에 오히려 보통 사람들 이상으로 선을 넘어서선 안 되는 입장에 있었다. 모든 이의 생사를 손안에서 굴릴 수 있기에 더더욱 신중하게 생각하고 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의 행위의 책임은 오롯이 그녀에게 있기에.

확실히 어지간한 잘못을 해도 목숨만은 건질 수 있을 것이다. 신의 핏줄을 제 손으로 해할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 하지만 그건 용서받거나 편을 들어 주어서가 아니라 그녀가 황족이기 때문에 받는 특혜에 불과했다.

“잘 모르겠군. 애초에 그런 잘못을 하지 않으면 되는 게 아닌가.”

루비나드의 말에 제빌이 미소를 띠었다. 그 얼굴이 어딘지 쓸쓸해 보여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합니다. 그게 때로는… 사람의 선을 넘어설 수도 있겠지요.”

“그건 가해자의 논리에 불과해. 사람인 이상 감정적으로든 충동적으로든 그런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역시 당연한 거야.”

피해자에게 그런 논리는 가증스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루비나드의 머릿속에 ‘그 여자’가 떠올랐다.

-폐하! 살려 주십시오, 폐하!

-그대는 인간이 해선 안 될 짓을 했소. 변명의 여지가 없소.

-폐하…. 제게 어찌 이러십니까? 그토록 어여쁘다고, 사랑스럽다고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그깟…, 그깟 계집년에게 빠져서!

-무슨…! 루비나드는 짐의 딸이오! 그깟 계집년이라니, 말을 조심하라!

-그 계집년이 말을 깨치고 난 후부터 폐하께서는 저를 주에 한 번 찾을까 말까 하게 변하지 않으셨습니까! 기껏해야 황녀 아닙니까. 결연의 도구에 불과한 그 계집이 무어 중요하다고 저를 내치십니까!

그 여자의 눈은 완전히 광기에 젖어 있었다. 루비나드를 증오에 찬 눈으로 노려보며, 그 여자는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었다.

마치 루비나드가 정말로 가해자라도 되는 것처럼.

루비나드는 그 여자를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그녀 때문에 다친 제빌을 생각하면, 생사의 기로에까지 섰던 오랜 친우를 생각하면 분노로 가슴 속이 들끓었다. 그녀는 겨우 사랑 때문에 제빌을 죽일 뻔했다.

겨우, 감정 하나 때문에.

아버지는 한때 사랑했고, 어쩌면 지금도 사랑하고 있을지도 모를 여자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황족을 시해하려 한 죄는 그 어떤 감형의 여지 없이 사형이 선고되곤 했으니까.

하지만 아버지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니.

“아버지는 한 번도 사사로운 정에 휩쓸려 움직이지 않으셨어. 나는 그 아버지의 후계자고. 나 역시 정에 휩쓸려 누군가의 편을 들 순 없어.”

당신은…, 정말로 당신 자신을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에 제빌은 그녀의 곁에 있을 수 있었다. 그녀의 곁에 다가오는 벌레들을 떼어 낼 수 있었다.

그녀의 커다란 착각에 빌붙어서.

제빌은 이번에도 그 착각을 고쳐 주지 않았다. 그저 흐릿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언제든 폐하의 편입니다.”

그 속에 많은 말을 내포한 한마디. 하지만 루비나드는 그 뜻을 눈치채지 못할 터였다.

그거면 됐다. 제빌은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제 옆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보랏빛 시선을 무시한 채.

* * *

에브니겔은 제 손에 들린 서신을 다시 한 번 훑었다.

『 황태자, 로간 제국 방문 예정.

다음 황실 연회 참석.

연회 첫날, 로간의 황제와의 티 파티. 』

나쁘지 않은 기회다. 다만 조금 걸리는 것은 왜 이 시기에 형님이 로간을 방문하느냐, 였다. 그리고 그의 의구심을 해소해 주는 또 다른 서신을 펴 들었다.

『 에브니겔.

아버지께서 많이 진노하셨다.

이번 주 일요일까지 귀국하지 않으면 내가 직접 가기로 했다.

로간 제국과는 이미 이야기가 되어 있다.

네 추태도 이미 퍼질 대로 퍼졌으니, 최대한 빨리 돌아오도록 해라. 』

간결한 서신이었다. 그리고 에브니겔의 마음에 자리 잡은 위화감을 해소해 주는 서신이기도 했다.

에브니겔이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자 로간 제국에서 악토그라토리아에 도움을 청한 모양이었다. 그와 황제 사이에 있었던 일이 공공연하게 퍼지면 두 나라의 사이가 모호해진다. 둘 모두에게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비밀리에 조용히, 연회를 핑계로 형님이 방문하여 에브니겔을 끌고 갈 생각인 듯했다.

“어떻게 끌어내야 하나 고민했는데.”

“로간 제국이 수고를 덜어 주었군요.”

“설마 내가 이렇게까지 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겠지.”

심지어 로간 제국으로 끌어들여 주기까지 하다니. 일이 더 편해졌다.

에브니겔은 손에 들고 있던 페이퍼 나이프로 형님의 서신을 가로로 길게 그었다. 반토막이 난 그것을 칼끝으로 툭툭 치던 그가 광기 어린 눈으로 웃었다.

“바보 같은 소리긴 하지. 여자 하나 손에 넣으려 제 형님을 죽이려 하는 황자라니.”

“…바보 같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이유는 제각각인 것 아니겠습니까. 최소한 제게는, 저하께서 폐하가 되실 각오를 세워 주셨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오랫동안 에브니겔을 봐 온 시종은, 그가 황태자보다 못하지 않다는 걸 알았다. 부족한 건 오직 하나.

다 가졌기에 무언가를 가지고 싶다는 마음조차 없어 그 자리에 안주하던 그를 끌어 올릴 계기뿐이었다. 그게 여자든, 돈이든, 명예든 그건 시종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저는, 저희는 있는 힘껏 저하를 보필할 것입니다.”

처음으로 갈망하는 것이 생겼다. 그래서 힘을 갈망하게 되었다.

그 갈망이 제 주인을 죽게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채, 시종은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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