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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 (75)화 (76/115)

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76)

시간이 더디게 흘러갔다.

각자가 준비하고 있는 일들이 조용히 진척되고, 제빌은 그 모든 것을 관망하고 있었다. 한발 물러선 곳에서 모든 것을 지켜본다는 건 언제나 두려운 일이었다.

직접 사건 속에 뛰어들면 생생한 현장감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도리어 보지 못하는 것들이 생긴다. 게다가 제빌이 주시하고 있는 건 한 두 명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그렇기에 또 보지 못하는 것이 생긴다. 아무리 면밀하게 조사하고 따져도 언제나 돌발 상황은 생기기 마련이었다.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끝까지 수집하고 생각하고 궁리해야만 했다. 루비나드에게 조금이라도 진흙이 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흠….”

서로 다른 사건이 얽히고설켜 하나의 사건이 되길 기다린다. 일망타진.

가장 적은 노력으로, 최대한 많은 것을 잡아낸다. 그걸 위한 기다림이었다. 그러니 제빌이 현 상황에서 그쪽보다 더 신경 쓰고 있는 건 오히려 국내 귀족들의 동향이었다.

에브니겔과 레기안이 온 후로 국내 귀족들의 발등이 뜨거워졌다. 후다닥 후궁 경쟁에 뛰어드는 꼴이 우습기도 하고, 초조하기도 했다.

슐라민 공작이 후궁 경쟁에서 물러난 이상, 후궁에 무조건 들어갈 것이라 손꼽히는 유력한 후보 중 하나는 바로 뭉크리안가의 차남이었다. 그는 감이 좋은 남자였다. 아마 이번 일도, 될 거라 생각해서 들이대는 것이겠지.

실제로 제빌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중이었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연회까지는 이제 일주일 남짓 남았을 뿐이다.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후궁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걸 막아 내야 하는데.

알현 약속을 잡는 것은 부관인 제빌의 일이었다. 그러니 그럴 만한 이들은 애초에 알현할 수 없도록 막아 버리면 된다. 그렇다면 제일 문제 되는 것은 바로 정례 회의였다.

일주일에 한 번 열리는 정례 회의. 황제가 독단으로 결정하기 어려운 사안이나 논란의 여지가 있는 사안에 대해서 귀족들과 논의하는 자리. 그리고 현재는, 황제에게 직접 읍소하는 자리가 되기도 했다.

알현권도, 면접권도 심지어 건의서조차도 제빌이 모두 관리한다. 그러니 그의 눈과 귀에 들어가면 곤란한 사항은 모두 정례 회의에서 이야기하곤 했다. 아마 이번 정례 회의에서는 틀림없이 뭉크리안이 나설 테지.

“…어떻게 할까.”

억압하기만 해서는 조종할 수 없다. 적절한 당근 역시 필요한 법이었다.

하지만 그 뭉크리안이 과연 눈치채지 못할까? 감이 좋은 남자인 만큼 제빌이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건 알아챌지도 모른다. 그 자세한 내역까지는 알 수 없을 테지만.

그렇다면.

“…하는 수 없군. 그다지 사용하고 싶지 않은 방법이지만.”

제빌은 종이를 한 장 꺼냈다. 겉보기엔 일반 종이와 별로 다르지 않아 보이지만, 사실은 이 한 장으로 일반적인 가정이 한 달은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식량을 살 수 있다.

제빌은 잠시 종이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펜을 들어 글씨를 써 내렸다.

이 서신은, 전용 봉투에 담겨 수신인에게 가 닿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서신을 꺼낸 뒤 삼 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발화하여 재 한 조각 남지 않고 사라질 것이었다.

그 말인즉 삼 분 내에 읽고 파악할 수 있을 정도의 내용만 적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어차피 제빌이 내릴 명령은 그리 어려운 내용이 아니었다. 다만 보는 이가 글자를 읽는 데 서툴러서 걱정일 뿐이지. 그는 최대한 큰 글자로 쉬운 단어를 골라 쓴 후 서신을 마무리했다.

봉투 끄트머리에 파란색 잉크를 묻혀 표시한 제빌이 입을 열었다.

“카란.”

부르는 소리에 문 그림자에 숨어 있던 카란이 앞으로 나섰다. 제빌은 싱긋 웃으면서 그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부탁합니다.”

어디로 갈 것인지는 말할 필요 없었다. 파란색 잉크.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카란은 대답 대신 예를 갖춘 뒤 방에서 나갔다.

“후.”

나머지는 순조롭게 진행 중이었다. 최소한 관망하고 있는 그의 입장에서 볼 때는.

어려운 건 속도 조절이었다. 너무 빨라선 안 된다. 너무 느려서도 안 된다. 몸집을 부풀릴 수 있는 최대한의 시간까지 기다리되 감당할 수 없는 선을 넘어선 안 된다.

“…괜찮아.”

수집하고, 분석하고, 준비하고, 행한다.

그것만 잘 지키면 뒤끝이 생길 리가 없었다. 물론 뒤처리 역시 완벽하게 할 생각이었다.

“괜찮아.”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불안감이 치솟았다.

문득 옆방에서 자고 있을 루비나드가 떠올랐다.

루비나드는 그가 레기안을 닮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제빌은 알고 있었다.

그는 레기안 왕자처럼 될 수 없다. 홀로 고고하게, 제 길을 묵묵히 가는 그런 남자는 될 수 없었다. 그는 언제나 발버둥 치고 진흙탕 속에서 기어 다녔으며 늘 불안하고 두려웠다.

지독한 겁쟁이기에 도리어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는다. 제 감정을 드러내는 것조차 약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폐하.”

지독한 겁쟁이. 그렇기에 그는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더 선호했다.

노 리턴, 노 리스크.

뭔가를 얻으려 하지 않으면 무언가를 잃을 위험도 없는 것이니까. 그런 그가 생애 처음으로 가지고 싶은 것이 생겼다. 그걸 손에 넣기 위해 장장 이십삼 년 동안 이런 불안과 공포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하루하루, 절벽 위를 걷는 것 같은 그 공포를 견딜 수 있었던 건.

“폐하.”

당신이 아니었더라면 저는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아니었더라면 저는 분명 중간에 포기했을 것입니다.

당신이기에 저는….

제빌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루비나드의 모습을 떠올리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마음이 들뜬다. 상반되는 두 감정이 뒤섞여 소용돌이쳐서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된다. 두려움도 공포도 마비된다.

틀림없이 당신은 이런 날 이해하지 못하겠지.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지도 몰라. 그러니까 나는….

제빌은 가만히 눈을 떴다. 하늘에는 반달이 떠올라 있었다.

“당신의 앞에서만큼은 모든 것을 숨겨야만 합니다.”

달이 다 차오르는 그날을 기다리며 제빌은 조용히 숨을 죽였다.

* * *

겔라드는 두 손을 꽉 주먹 쥐었다. 그 기세에 눌려 손안의 서신이 우그러졌다. 꼴도 보기 싫은 내용이었기에 우그러진 것 역시 상관없었지만, 이내 그는 주섬주섬 서신을 책상 위에 펼쳤다.

잔뜩 구겨진 종이를 억지로 펴도 원래대로 돌아가진 않는다. 그 꼴이 마치 루비나드와 저 사이 같아서 괴로워졌다. 겔라드는 담담한 서신 속 필체에서 유독 도드라져 보이는 글자 위를 손가락으로 덧그렸다.

“폐하.”

그녀를 사랑한 건, 그녀를 발견한 건 자신이 먼저였다. 겔라드가 일곱 살, 그녀가 고작 다섯 살 때였다.

아버지를 졸라 황궁에 따라온 건 좋았지만, 어린아이였던 그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분위기가 무거웠다. 위압감으로 가득했다고 해야 할까. 아직은 연약했던 아이였기에 도리어 더 위축됐던 건지도 모른다.

그 답답하고 숨 막히는 공기 속에서, 그는 끝내 숨이 멎고야 말았다.

-…황녀 저하를 뵙습니다.

고요하고 엄숙하던 공간이 순식간에 그녀로 가득 차는 느낌이었다.

답답하게 숨통을 쥐고 있던 것이 밀려나고, 그 자리를 그녀가 차지해 지그시 목을 조르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작고 사랑스러웠으며 귀엽고 아름다웠다. 그것만으로는 채 다 나타낼 수 없을 정도로 빛이 났다. 그날, 겔라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눈에 담았다.

한 번 만난 그녀는 도저히 머리에서 지워지질 않았다. 아버지에게 조르고 졸라, 제2 황자 대신 황녀의 놀이 친구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그녀 역시 자신을 기억하고 있을까? 혹시 자신과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다휜가는, 쿠온가가 공작가에서 밀려나면 틀림없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래서 수많은 귀족이 겔라드를 원했다. 특히 가문을 이을 아들이 없는 집안에서. 집안의 뜻을 등에 짊어진 작은 영애들은 겔라드에게 언제나 호의적이었다.

그런 소녀들만 만나 왔던 겔라드는 당연히 루비나드 역시 자신에게 호감을 품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못해도 호감, 잘하면…. 심지어 그녀의 놀이 친구로 확정된 후엔 호사가들의 입에 황녀의 남편 후보로까지 오르내렸으므로 더 그랬다.

하지만.

-그대는 정말 예쁘게 생겼군. 특히 눈동자는 가히 세계 제일이라고 칭해도 좋을 정도야.

수업이 길어져 다소 늦게 도착한 테라스 룸.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낭랑한 목소리가 칭찬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니었다. 모두가 쓰레기라고, 찌꺼기라고 업신여기던 작디작은 소년이었다.

그 얼어붙은 분위기 속에 들어선 겔라드는, 그래도 기대했다.

그녀와 처음으로 말을 나눈 게 자신이 아니라는 건 아쉬웠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이 늦게 도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이름 역시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페틀리 디 맥시 영식, 만나서 반갑네.

-제3 황녀, 루비나드 디 테비시안 저하를 뵙습니다.

-시에타디스 디 에스티 영애, 만나서 반갑네.

-황녀 저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사나브닌 디 샤고르 영애, 악타비 디 테밀 영식. 만나서 반갑네.

형식적인 인사들뿐이었다. 하나하나의 이름을 다 기억하고 계신 것에는 조금 놀랐지만, 쓰레기에게 했던 것 같은 달콤한 한마디는 없었다. 그들도 그게 느껴졌는지, 답하는 소리가 작게 기어들어 가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마지막으로 겔라드를 향했다.

-무언가 문제라도 있었던 건가?

-실례했습니다, 저하. 합동 수업의 시간이 예고 없이 길어지는 바람에 연락조차 하지 못하고 늦었습니다.

-…아니, 그대 역시 제국을 짊어지고 나갈 인재. 수업에 열의 있게 참석하는 것은 중요하지.

만약 다른 이유로 늦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게 생각될 정도로 늦은 이유를 묻는 그녀의 눈동자는 차가웠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겨우 일 년 사이에.

한없이 인형 같고 사랑스럽던 사람에게서 날카로운 가시가 느껴졌다. 그의 안에서 점차 부풀어 오르고 있던 환상에 구멍을 내려는 것처럼.

하지만 이미 겔라드의 안에 있는 그녀는 확고부동했다. 천사처럼 사랑스럽던 소녀에서 다소 까칠하지만 아름답고 기품 있는 소녀가 되었을 뿐. 그의 마음에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더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첫 만남의 좋지 않은 인상을 지우려고 애썼다. 아버지를 졸라 값비싼 선물을 보내기도 하고, 같은 물건은 딱 하나만 만든다는 장인에게 특별 주문한 장신구를 선물하기도 했다. 이국의 독특한 디저트를 선물해 보기도 했다.

그때마다 루비나드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거절하곤 했다. 자신에게는 필요 없는 것이라는 이유였다.

우리 황녀 저하는 검소하기도 하시지. 그렇게만 생각했다.

그녀의 유일한 흠은 곁에 맴도는 제빌을 내치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가끔 자신보다도 제빌이 더 가까이 있는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아 괴롭히기도 했다. 그때마다 몸을 움츠리며 헤헤 웃는 그를 보면 괴롭히는 것조차 바보 같아졌다.

그런데.

-저하, 괜찮으시다면 저와 함께 축제를 돌아 보시는 건 어떠십니까.

일 년에 한 번, 제국에서 열리는 커다란 축제.

황궁이나 귀족들의 자택에서 열리는 연회와는 달리 모든 제국민들이 즐길 수 있는 축제였다. 이국의 연극이나 상인 등을 볼 기회이기에, 치안을 염려하면서도 귀족 자제들 역시 손꼽아 기다리는 큰 행사였다.

누가 황녀의 동행이 될지 모두가 주목했다. 그 동행인이 황녀의 남편감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점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겔라드는 그 곁에 설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확신했다.

-미안하군. 선약이 있어서.

선약이란 게 누구인지는 뻔했다. 자신이 낮잡아 보던 그 청회색 눈동자가, 저하가 칭찬했던 그 눈동자가 우월감마저 품은 채 자신을 내려 보고 있었다.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십니다.”

그날, 겔라드가 그녀의 놀이 친구의 자리에서 밀려났던 그날.

“그 남자가 어떤 남자인지.”

그 후로 겔라드는 제빌을 주시해 왔다. 그리고 이제는 때가 왔다.

워낙 철두철미한지라 이 정도로 그러모으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 마침, 그 남자는 제가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위치에 올라 있었다.

그러니 분명.

잃는 것도 많아지겠지.

“이제 알게 되실 겁니다.”

그 남자가 무슨 짓까지 했는지도.

겔라드의 연갈색 눈동자가 광기를 품은 채 섬뜩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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