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75)
눈을 뜬 루비나드는 불같이 화를 냈다.
“대체 왜 깨우지 않은 거야!”
“워낙 곤히 주무시기에.”
“으윽…!”
확실히 두 번이나 잠든 건 루비나드였다. 점심시간이 되도록 엎드린 채 잠들었었던 걸 보면 깨워도 다시 잠들었을지도 모른다. 루비나드는 분한 얼굴을 하면서도, 제빌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아마 그 분함은 제빌을 향한 것이라기보다 스스로를 향한 것이었겠지.
그 얼굴이 귀여워서 제빌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으, 으으…!”
비웃는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루비나드가 홱 고개를 돌리며 이를 갈았다.
저러다가 이 다 상하시겠네. 제빌은 엷은 미소를 띤 채 그녀에게 다가가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폐하.”
“왜!”
대답해도 제빌은 말을 잇지 않았다. 그저 루비나드가 자신을 바라봐 주길 가만히 기다릴 뿐.
이어지는 침묵에 루비나드가 고개를 돌려 제빌을 보았다. 그제야 제빌은 환하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사실은 주무시는 얼굴이 너무 귀여우셔서 깨우질 못했습니다.”
뭐 저리도 예쁜 얼굴로 말하는 것일까. 정말로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것을 봤다는 듯이.
그 얼굴에 순간 울컥하고 무언가가 올라왔다.
“뭐…, 그대…!”
“앞으로도 이런 말을 해도 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뻔뻔스러울 정도로 시원시원한 웃음이었다.
제빌이 원래 이런 인상이었나? 마치 얼굴에 철판이라도 깔아 놓은 듯했다.
하지만 제빌은 이미 새로운 ‘선’을 알았다. 루비나드는 이 정도로는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진심 어린 찬사를 칭찬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니까.
그러니까.
터져 버리기 전에 이 정도로 흘려주는 건 괜찮겠지. 제 안에 가득 찬 감정을 아주 조금 꺼내 든 제빌이 기분 좋은 듯 싱글싱글 웃었다.
그 미소에 두근, 하고 루비나드의 심장이 튀어 올랐다.
제발 얼굴을 들이밀고 저리 웃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이 남자는 제 얼굴의 위력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더러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할 땐 언제고.
“새로 빗질을 해 드릴까요?”
“그걸 왜 그대가 하는가. 시녀들을 시키면 돼.”
“실은, 평소에 꼭 한번 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하면 안 될까요?”
머리 빗질을 왜…?
루비나드가 살짝 고개를 들어 제빌의 얼굴을 보았다. 사뭇 진지한 표정이 거짓인 것 같지는 않았다.
으음…. 가끔 둘째 오라비인 엔도르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빗겨 준 적이 있긴 했다. 그러면서 복슬복슬한 강아지 털 같기도 하다는 말을 하기도 했었지. 제빌도 그런 거려나.
“상관은 없는데….”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제빌이 활짝 웃더니 제 자리로 향했다. 언제 가져다 놓은 것인지, 루비나드가 평소에 사용하는 것과 같은 형태의 빗을 서랍 안에서 꺼내 왔다.
“왜 그런 게 그대 서랍에 있는 거야?”
“가끔 머리가 흐트러졌을 때 빗는 용도입니다.”
“그대가…?”
그건 곱슬머리용 빗일 텐데. 아니, 뭐 직모라고 해도 쓰지 않을 이유는 되지 않나…?
루비나드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제빌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제빌이 책상 위에 빗을 놓더니, 그녀의 머리카락을 등받이 뒤로 살살 끌어당겼다. 그 탓에 목덜미에 와 닿는 커다란 손의 감촉이 낯설었다. 목 뒤가 원래 이토록 예민한 곳인 걸까. 뜨거운 열기가 와 닿을 때마다 간지러움이 몸을 타고 흘렀다.
루비나드가 아플까 걱정되었는지 제빌이 살살 움직이는 통에 머리카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참다못한 그녀가 살짝 제 등을 떼어 주었다.
곱슬곱슬 윤기 나는 머리카락이 등받이 뒤로 쏟아져 내렸다. 감탄 섞인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제빌이 빗으로 손을 뻗었다. 사르르 흘러내리는 남색 머리카락과 제빌의 옆얼굴이 순식간에 시야 안을 가득 채웠다.
이게 뭐라고 저리도 열중한 건지. 진중한 얼굴로 빗을 집어 든 그가 루비나드의 등 뒤로 사라졌다.
사르르 사르르. 머리카락을 빗는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이토록 간지러운 소리였던가. 시녀들이 빗겨 줄 때면 어쩐지 잠이 왔었는데. 지금은 머리카락을 빗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손길인데도 온통 신경이 곤두섰다.
“…흠흠, 많이 엉켰나?”
“조금…. 아프진 않으십니까?”
“으음.”
귓가를 간질이는 소리 때문에 어쩐지 안절부절못하게 되어 시작한 대화는, 그대로 끊겼다. 평소라면 제빌이 좀 더 대화를 이어 갔을 텐데 온통 그녀의 머리를 빗기는 데 정신을 쏠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신기했다. 이토록 가늘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인데 전혀 엉켜 있지 않다는 것이. 그렇다고 기름진 것도 아니고 윤기도 적절했다.
루비나드의 어디에 닿든 언제나 가슴이 두근거리고 몸이 달아올랐었다. 하지만 이 머리카락만큼은 조금 달랐다. 만지면 만질수록 마음이 진정된다. 그렇다고 그녀에 대한 마음이 가라앉는다는 건 아니었다. 다만 뭐랄까….
뜨거움이 가라앉고 조금 더 냉정한 상태에서 루비나드의 사랑스러움을 깨닫게 된다고 할까.
“아직인가?”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어차피 뒤에 있으니 루비나드는 볼 수 없다. 그게 방패막이가 되어 주는 듯 제빌은 하염없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오늘 서명 못 한 서류는?”
“얼마 없습니다. 내일 조금 더 일찍 일어나도록 할까요.”
“으, 으음.”
“폐하의 머리카락은….”
“응?”
갑자기 말이 뚝 끊겼다. 그게 루비나드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머리카락이 뭐 어떻다는 거지?
곱슬머리라서 지저분해 보인다는 걸까? 아니면 너무 엉켜서 빗기 힘들다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돼지 털 같다는 걸까.
-황녀 저하만 유독 곱슬이 심하시지?
-뻣뻣한 게 돼지 털 같을 때가 있어. 엉켜 있으면 살살 푸는 게 진짜 힘들다구. 그럴 땐 확 쥐어뜯고 싶어져.
-기름을 발라 드리면 너무 떡 진 것처럼 되어 버리고…. 보면 항상 이상하게 지저분해 보이지 않아? 부스스해서.
-다른 황족분들은 그러지 않으시는데 왜 그럴까.
-글쎄…. 딸이라 그런가? 그래서야 나중에 좋은데 시집 가실 수나 있을지 모르겠어.
-하긴. 황녀의 능력은 지식이나 체술이 아니라 외모니까 말이야.
당연히 그녀가 듣지 못할 거라 생각해서 나눴던 뒷담화일 것이다. 문제는 그녀가 드물게도, 잊은 물건이 있어 수업 중 잠시 제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는 것일까.
복도 청소를 지도하며 구시렁거리는 두 시녀의 목소리에 루비나드는 입술을 깨물었었다.
그 뒤로 제빌에게 물어 머리카락을 부드럽고 윤기 나게 만드는 데 좋다는 약초 물로 머리를 감곤 했다. 루비나드의 그 행동에 눈치챈 것일까. 그 뒤로 시녀들의 뒷담화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래도 불안했다.
신경 쓰지 않는다고, 구설 따위 좋을 대로 떠들어 대게 두어도 된다고 생각하게 된 지금도.
그게 만약 제빌의 입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면….
“곱슬머리인데도 굉장히 부드럽고 잘 풀리네요.”
“그래…? 어렸을 때 그대가 추천해 준 약초 물로 계속 감아서 그런 게 아닐까.”
“어릴 때부터도 그러셨습니다.”
“그런가?”
“그래서 폐하께서 그런 효능을 가진 약초가 없냐고 하셨을 때 의아했었죠.”
알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루비나드는 어느 순간부터 티 나게 특정 시녀를 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예전에 그녀가, 일하는 모습이 마음에 든다며 호감을 가졌던 시녀였다. 아마 루비나드에게도 정중하고 선을 딱 지키는 모습이 좋다고 했었던가.
그런 시녀를 피할 이유야 뻔했다. 루비나드는 생각보다 알기 쉬운 사람이었다.
-클라렌 경, 부탁이 있습니다.
-쿠온 공자 아니십니까. 무슨 일이십니까.
선황 때부터 시종장의 자리를 지키고 있던 클라렌은,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젊은 중년의 신사였다. 선황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자였고 황궁 내의 조율자였다.
시녀들의 인선 역시 그가 최종 재가를 하곤 했다.
-약초를 구하고 싶은데 저희 가문에서는 구하기가 힘들더군요.
-약초… 말씀이십니까?
제빌이 건넨 종이쪽지에는 꽤 구하기 어려운 약초도 섞여 있었다.
왜 이런 걸 어린 공자가 구하려는 거지? 심지어 시종장을 통해서?
의문으로 가득 찬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제빌이 서글픈 얼굴로 중얼거렸다.
-황녀 저하께서 쓰실 것입니다.
-황녀 저하께서요? 하지만 이건 다….
화장품에 사용되는 약초가 대부분이었다. 아직 어린 황녀가 이런 걸 요구했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제빌이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녀들이 저하께서 듣지 않으신다고 생각해 뒷담화를 한 모양이더군요.
-뒷담화를요?
-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황녀 저하의 곱슬머리에 대해서…, 모욕에 가까운 이야기를 한 모양입니다.
내용은 대충 알고 있었다. 듣고 있던 하녀 중, 제빌과 친하게 지내던 하녀가 있었으니까.
하녀 중 일부는 잘난 척 서서 청소 지도라는 이름으로 수다나 떠는 시녀들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이들이 있었다. 이번에도 그런 이들 중 하나가 알려 준 것이었다.
-시녀들이요? 감히 그런 짓을.
-…저나 경께서 이 이야기를 알고 있다는 걸 알면 저하께서 몹시 슬퍼하실 겁니다. 다만, 제가 따로 하녀들에게 이야기를 묻는 과정에서 그 시녀들이 누군지는 알아냈습니다. 괜찮다면 저하의 시중에서 제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공자. 오히려 제가 해야 할 일인데 공자께서 해 주셨다는 것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그 시녀는, 루비나드의 담당에서는 물론이고 황궁에서 모습을 감췄다. 하녀들 사이에 돈 소문에 의하면 추천장조차 받지 못하고 쫓겨난 모양이었다. 그 후에도 한동안 루비나드가 침울해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제빌은 이를 갈았었다.
그냥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추방은 너무 관대한 처사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빌에게는 힘이 없었다. 그러니 그런 식으로 남의 힘에 기대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날 제빌은 다짐했다.
더 힘을 키우자. 루비나드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모두 치워 버릴 수 있도록.
그 누구의 손을 빌리지 않고도, 누구에게 기대지 않고도 해낼 수 있도록. 그러면 저하는…, 저하는 항상 웃어 주실 것이다. 아니, 그렇게 만들겠다.
그렇게.
“손가락에 휘감기는 감촉이 너무 부드러워서 언제까지고 이렇게 어루만지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 진심을 내뱉으며 제빌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손가락 사이사이를 간질이는 머리카락의 감촉을 충분히 맛보며 생각했다.
힘을 가진 지금도 루비나드가 웃게 해 주는 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마지막에 루비나드가 짓고 있는 표정은 틀림없이 웃는 얼굴이리라.
그것도 세상 그 누구도 본 적 없는.
자신조차도 본 적 없는.
그런 태양 같은 웃음이리라.
그 외의 엔딩은 있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반드시.”
제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요.
제빌은 빗을 내려놓고 눈을 떴다. 그리고 제 손에 휘감긴 몇 가닥 머리카락을 들어 올려 가만히 입을 맞췄다.
흘러넘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전해 주고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