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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 (73)화 (74/115)

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74)

어색한 침묵이 침실 안을 가득 채웠다. 탁자에 앉은 채 책을 읽고 있는 루비나드는 때때로 침대 쪽을 곁눈질했고, 침대 등받이에 기대어 앉은 제빌은 대놓고 루비나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투명한 시선을 견디지 못한 루비나드가 탁, 하고 책을 덮었다.

“그…, 그만 자는 게 좋지 않겠나.”

“폐하께서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으셨는데 어찌 제가 먼저 잠들겠습니까.”

“난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그렇게 답했지만, 여전히 제빌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루비나드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사실 잘 시간을 꽤 넘겼기에 졸리긴 했다. 책을 보면서도 내용이 거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버틴 이유는 제빌의 얼굴을 보기가 민망해서였다.

아까 집무실에서 중얼거린 한마디가 들렸다는 건, 그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걸 보자마자 알았다.

뭐랄까. 내뱉을 땐 별생각이 없었다. 루비나드가 진심 어린 칭찬을 들으면 좋아한다는 것쯤은 제빌도 이미 알고 있었을 테니까. 다만 대놓고 말하기엔 쑥스러웠다. 오랫동안 알아 온 그에게 아이 취급당하고 좋아했다는 게 왠지 좀 민망해서.

그래서 들릴 듯 말 듯 작게 말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제빌의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보니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게다가 그게 잘못 들으면…,

뭐랄까. 제게 그런 마음이 있어서인지는 모르지만, 그가 남자로 보여서 귀엽다는 말을 기꺼워하는 것처럼도 보이지 않는가. 그런 생각이 드니 차마 제빌을 보기가 어려웠다.

제빌도 그랬던 걸까. 집무실 안에서도 두 사람 사이에 침묵만이 맴돌았다.

원래도 그러긴 했다. 뭔가 대화할 일이 없다면 대부분 두 사람 사이에서는 정적만이 감돌긴 했다. 하지만 그렇게 어색하고 숨 막힐 것 같은 정적은 아니었었다.

게다가.

말만 안 할 뿐이지 루비나드의 시선은 계속 제빌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진정되었는지 평소와 다를 게 없어 보이는데, 자신만이 계속 신경 쓴다는 게 왠지 분했다. 그래서 끝내 모르는 척했는데.

침실로 오니 그게 안 된다. 같은 침대에 누워야 한다는 게 갑자기 쑥스럽게 느껴졌다.

“폐하?”

침대에 눕지 못하고 앞에 선 채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루비나드를, 제빌이 나직하게 불렀다. 루비나드는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라도 되는 것처럼 느릿한 움직임으로 침대 위에 올랐다.

그제야 제빌도 몸을 눕혔다.

“그럼 좋은 꿈 꾸게.”

그렇게 말한 루비나드가 뒤돌아 누웠다.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제빌이 살며시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

뭔가 말하려고 열린 루비나드의 입술이, 이내 닫혔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놔달라고 해야 하나? 아니, 지금까지 실컷 끌어안고 잤으면서? 오히려 그가 없는 밤에는 허전하다고, 쓸쓸하다고까지 느꼈었다. 그의 품에 있으면 편안함까지 느끼지 않았던가.

아마 자신처럼 제빌도 뭔가를 끌어안지 않으면 허전해서 그러는 걸 테지.

그게 아니라면…, 소설에 관해 이야기했던 그 밤 그렇게 반응했을 리가 없다. 너무나도 자신과 제빌의 이야기와 닮은 그 소설에 대해 말하며 루비나드는 제 마음을 조금 얹어 말할 셈이었다.

-기뻤겠지, 무척이나.

그건 귀족 영애의 입장을 분석해서 한 말이 아니었다. 루비나드의 마음이었다.

제빌은, 제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 아마 그녀의 마음을 눈치채고 기분이 상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녀의 변심이 자신에 대한 배신으로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 뒤에 이어진 대화에서도 끝내 제빌은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다. 그저 질문만 했을 뿐.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제빌은 조금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레기안 왕자 앞에서는 평소와 다름없이 자신을 대했지만.

그 끝에 오늘은 귀엽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친우는커녕 여동생 같은 존재로 본다는 증거였다. 그런데도 그게 조금 기뻤던 자신이 웃기고 슬펐다.

여기서 손을 떼어 달라고 하면…. 눈치 빠른 제빌이다. 아마도 그녀가 아직도 그를 남자로 느끼고 있다는 걸 알겠지. 아니, 갈수록 더. 오늘 그가 제 눈가를 쓸었을 때 얼마나 가슴이 떨렸는지 그는 알기나 할까.

“폐하께서도 좋은 꿈 꾸십시오.”

바로 귓가에서 들리는 목소리와 따뜻한 숨에 몸이 파르르 떨렸다. 배 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제빌은 이내 잠들었는지 고른 숨소리를 내뱉었다. 루비나드의 허리를 꽉 끌어안은 채. 평소에 등에 닿던 손이 배에 닿는 느낌이 이상하게 생소했다.

결국, 루비나드는 그의 품 안에서 꿈쩍도 하지 못한 채 밤을 새워야만 했다.

* * *

“못 주무신 겁니까?”

“음? 아니, 잘 잤는데.”

정말로 자신을 숨기는 데 미숙하신 분이다. 특히 제빌에게는.

지난밤, 꼼짝도 안 하고 제 품에 안겨 있기에 조용히 상체를 일으켜 얼굴을 들여다보았었다. 그 작은 움직임에도 반짝 눈을 뜨는 루비나드에게 놀라 바로 침대 위에 누웠다. 슬쩍 뒤를 돌아본 그녀는, 아마 제빌이 몸을 뒤척인 것으로 이해한 듯 다시 돌아누웠다.

그녀가 잠들지 않았다는 걸 알고 생각해 보니, 확실히 몸이 단단히 긴장하고 있었다. 밤새 잠들지 못했던 거겠지.

그걸 몰랐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루비나드를 보면 잠을 설쳤다는 건 확실했다. 왜냐하면….

“…….”

고른 숨소리에 슬쩍 그녀를 곁눈질하자, 펜을 든 채 반쯤 눈을 감고 턱을 괸 루비나드가 보였다. 햇빛 아래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그녀는, 제빌로서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금빛 찬란한 빛이 붉은 속눈썹 위를 수놓는다. 일부는 금색, 일부는 붉은색인 그 기묘한 조합이 가슴이 설렐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 길고 풍성한 것을 따라 시선을 옮기면 평소와 달리 사르르 내려간 눈매가 보인다.

언제나 사나운 눈매인 만큼 무방비할 때의 얼굴은 더 귀엽다. 눈매가 톡 내려가 사랑스러움이 더해진다.

그 눈매를 타고 손에 눌린 뺨을 스쳐 내려오면 살짝 열린 입술이 보였다. 그 사이로 보이는 가지런한 치열에 눈을 빼앗긴다. 저 붉은 입술에 제 입술을 겹치고 그 안을 헤집으면….

그러면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걸 처음으로, 기왕이면 유일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자신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모양 좋은 턱 선을 타고 내려오면 길게 뻗은 목 줄기가 보였다. 턱을 괴고 있어서, 손으로 받친 반대 부분의 목선은 유독 길게 뻗어 있었다. 햇빛이 그 위를 타고 미끄러져 내리는 걸 눈으로 훑던 제빌이 문득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저 목덜미에… 그녀가 제 것이라는 증거를 심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갈 곳 없는 욕망이 숨을 타고 흘러나왔다.

“…아.”

그 한숨 소리에 깼는지 루비나드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작은 목소리가 들렸지만, 애써 모르는 척 서류에 얼굴을 묻었다. 흘끗 그녀를 곁눈질하자 제빌의 기색을 살피며 입가를 손등으로 훔치는 게 보였다. 침이라도 흐르지 않았나 걱정되는 거겠지. 그게 또 귀여웠다.

이런, 중증인데.

루비나드가 하는 모든 표정, 모든 행동이 다 귀엽게 느껴진다. 다른 사람이 있으면 질투 때문에라도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는데. 이렇게 단둘이 있는 시간에는 점차 자제가 무너지는 게 느껴졌다.

“제빌 경?”

“네?”

“손이 멈춘 것 같네만.”

“아…, 어, 그, 네.”

“내가 아니라 그대가 피곤한 것 같은데.”

조금 전까지 졸고 계셨던 분이….

어이가 없어서 루비나드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녀가 오만한 표정으로 뻔뻔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그 모습조차 귀여워서 화내는 것조차 잊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폐하의 서명이 진행되지 않는 것 같아서요.”

루비나드가 흠칫, 놀라 제 앞에 놓인 서류를 보았다. 확실히 아까부터 전혀 줄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존 거지.

시계를 보자 이십 분이나 지나 있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이렇게 존 적은 없는데…. 제 뺨을 살살 문지른 루비나드가 다시 펜을 쥐었다.

“으음. 조, 조금 심도 있게 보느라.”

“뭔가 문제라도 있습니까? 말씀해 주시면 수정해 달라고 하겠습니다.”

그녀가 졸았다는 걸 모르는 척해 주기 위한 것이긴 했다. 그래도 묘하게 짓궂은 목소리를 낸 건, 사실 반쯤 놀리려는 마음이 있기도 했다.

왠지 모르지만, 루비나드가 귀여운 모습을 보이면 자꾸 짓궂게 굴고 싶어졌다.

“아니, 괜찮아. 신경 쓰지 말고 계속 서류를 넘기게.”

흠흠. 목을 가다듬은 루비나드가 다시 서류에 집중했다. 서명하는 소리가 한 다섯 번 정도 더 들렸을까. 다시 색색,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이런. 정말로 피곤하신가 본데. 나머지는 내일로 미뤄 두도록 할까. 당장 오늘 처리해야만 하는 서류는 아까 다 끝냈으니.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운 데다 제빌과 단둘이 있는 상황. 멀리 떨어져 있으니 두근거림보다는 편안함이 더 강하게 다가온 탓에 졸음이 몰려오는 것이었다. 그걸 알 리 없는 제빌은 루비나드가 진심으로 피곤해서 그런 것이라 느꼈다.

제빌은 발소리를 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창가로 다가갔다. 조명보다는 햇빛이 좋다며 언제나 묶어 두던 커튼을 풀고, 흘끗 그녀를 살폈다.

아까는 턱을 괴고 자더니 이번엔 엎드려서 잠들어 있었다. 살짝 열린 입을 본 제빌은, 그녀가 끌어안고 있는 서류를 조심스럽게 빼냈다. 혹시라도 침이 흘러 젖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제 외투를 벗어 그녀의 등에 덮어 주기까지 한 제빌이 그녀 옆에 무릎을 세운 채 꿇어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바로 앞에 엎드려 물끄러미 잠든 얼굴을 보았다.

“…안녕히 주무세요, 폐하.”

낮의 햇살이 커튼을 뚫고 안까지 스몄다. 어슴푸레한 집무실 안에서, 유일하게 빛나고 있는 루비나드의 얼굴을 바라보며 제빌은 숨을 죽였다.

조금이라도 더 그녀가 쉴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더 그녀를 오래 바라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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