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73)
“정말이지….”
귀찮아 죽겠다.
루비나드는 이를 득득 갈며 방 한쪽을 차지한 선물 더미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선물 하나에 편지 하나씩 조촐하게 가져다 놓았던 것 같은데. 어디서 소문이라도 돌았는지 경쟁이 붙은 모양이었다.
한 사람이 서너 개 이상 선물을 남발하는 바람에 선물 산의 높이가 달라졌다. 아침마다 이걸 정리해야 하는 제빌은 루비나드보다 한 시간씩 일찍 일어나 집무실로 향하곤 했다.
“이제 선물 확인은 그만두겠네.”
“네?”
“이건 도를 지나치지 않았나. 이런 걸 매일 확인하고 있다간 일을 못 하겠어. 그러니 다음부터는 사용인들에게 말해 확인하도록 한 뒤 정리시키도록 해. 그대가 일일이 볼 것도 없어.”
“그래도 폐하께 온 선물은 제가 확인하는 게….”
“그럴 시간이 있으면 차라리 한 시간을 더 자도록 하게. 이렇게 선물이 많아지면서 또 눈 아래가 거뭇해지지 않았나.”
예전이라면, 루비나드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 눈 아래를 손끝으로 매만졌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의 루비나드는 제빌에게 그리 가까워지지 않았다. 지난번 후원에서부터였나?
아니면, 그녀가 책을 읽던 그 밤부터였던가.
잠을 잘 땐 자연스럽게 제빌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왔다. 아마 익숙해져서, 그러지 않으면 허전한 거겠지. 제빌이 그런 것처럼.
하지만 그 거리에서 제빌의 얼굴을 보는 일은 없어졌다. 그저 이불과 제빌의 품속에 얼굴을 묻은 채 잠들 뿐이었다.
“심합니까?”
“조금. 늘 말하지만, 난 내 부관을 혹사시킨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긴 싫어.”
그건 오명이 아닌 거 같습니다, 폐하.
실제로 제빌이 소화하는 업무량은 ‘혹사’라고 평해져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루비나드의 곁에 있고 싶어서 부관 자리에 자원한 젊은 귀족들이 며칠 견디지도 못하고 나가떨어지기 일쑤였으니까.
일부 포기하지 않는 몇몇이 있긴 했다. 총 스물세 명이 지원했고 그중 세 명은 일주일을 버텨 냈다.
그런 자들은….
“주의하겠습니다.”
“그게 그대가 주의한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 쉬지 않으니까 생기는 것인데.”
“일을 좀 줄여 주신다면야.”
“업무를 좀 분담하래도 그대가 거부하지 않았나!”
울컥한 루비나드가 그리 말하자, 제빌이 소리 죽여 웃었다. 살짝 고개를 돌린 채 웃음을 눌러 참는 그를 보던 루비나드가 돌연 홱 고개를 돌렸다.
대체 뭐가 그리 재미있다는 건지. 어쩐지 장난감이라도 된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진 않았지만, 제빌의 웃는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건 좋았다. 언제나의 꾸며 낸 얼굴이 아니라 진심으로 웃는 얼굴을.
루비나드의 입가에도 엷은 미소가 스몄다.
하지만 고개를 돌린 탓에 제빌의 눈에는 그 미소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상황으로 봐선 그리 좋은 반응이 아닌 것 같아 서둘러 웃음을 지우고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제가 웃은 건….”
“웃은 건?”
뭐라고 얼버무리지.
그렇게 생각하던 제빌의 머리에 루비나드의 말이 떠올랐다.
-말을 하다 마는 게 가장 나쁜 거라고 했네.
시녀들이 자발적으로 그런 이야기를 했을 린 없으니 루비나드가 물어본 거겠지.
루비나드의 곁에 무언가를 질문하고 생각을 나눌 상대라곤 이제 제빌밖에 남지 않았다. 데거베일 역시 믿고 있겠지만, 목숨을 이어 나가는 것도 힘겨운 그에게 무언가를 묻는다는 건 루비나드 성격에 불가능하리라. 그러니 시녀들에게 물어본 거겠지.
그냥 바로 물어보셔도 되는데. 질투심에 그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가 이내 스스로가 부정했다.
바로 물어봤다면 아마 대답할 수 없었겠지.
“폐하께서.”
“…내가?”
루비나드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옆으로 돌아갔던 고개가 다시 제빌을 향했기에 그 표정을 고스란히 볼 수 있었다.
살짝 찌푸린 눈썹이나 입술 끝을 보니 대충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예상이 갔다.
아마도 제빌이 그녀를 놀리며 즐거워한다고 생각했겠지.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근본에 있는 건 그녀를 놀렸기 때문에 생긴 즐거움이 아니었다.
“폐하께서 귀여우셔서 그런 겁니다.”
“…뭐, 뭐?!”
평생 숨겨 왔던 말이었다.
제빌의 스물아홉 인생 중 이십삼 년을 숨겨 왔던 말이었다. 그녀가 환하게 웃거나 토라지거나 놀라서 휘둥그레진 눈으로 자신을 볼 때…. 그 모든 순간순간마다 참고 또 참아 왔던 말이었다.
아니 매 순간 참아 왔던 말이었다.
하지만 막상 입 밖으로 꺼내자 평생 해 왔던 말처럼 자연스러웠다. 목소리가 떨리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제빌의 얼굴은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담담했지만, 루비나드의 얼굴은 평소와 달리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폐하께서 귀여우셔서 웃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뭔…, 그대 지금….”
말이 조각조각 난다.
루비나드는 제 귀를 의심했다. 지금 대체 제빌이 무슨 소리를 한 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귀엽다니, 누가?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최소한의 이성을 찾은 루비나드가 버럭 소리쳤다.
“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제빌의 입가에 또 옅은 미소가 스몄다. 마치….
그 청회색 눈동자가 사랑스럽다고 말하는 것 같아 루비나드의 얼굴이 더 달아올랐다. 하지만 마치 쥐덫에라도 엉겨 붙은 것처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시선과 시선이 계속해서 맞닿았다.
“대중 앞에서의 폐하는 언제나 늠름하고 당당하고 오만한 인상이시지 않습니까. 그런 폐하께서 본심을 드러내시는 게 제 눈에는 귀여워 보입니다.”
한 번 터져 나온 진심은 끝을 모르고 줄줄 이어졌다. 뻔뻔하기까지 한 그 얼굴에 루비나드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공황 상태에 빠진 그녀를 모르는 척하며 제빌이 계속 말을 이었다.
“실은 지금 그 표정도 너무 귀엽습니다. 폐하께서는 모르시겠지만….”
방심한 그녀에게 제빌이 성큼 다가섰다. 루비나드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제빌이 눈앞에 와 있었다. 반사적으로 올려 보자 그가 씩 웃으며 루비나드의 뺨을 살짝 감쌌다.
“놀랐을 때 눈이 동그래지는 게 굉장히 귀여우시거든요.”
제빌의 엄지가 슥, 루비나드의 눈가를 따라 덧그렸다. 제빌이 살짝 고개를 내리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루비나드가 그의 어깨를 거칠게 밀어냈다.
“그대는…! 나, 날 놀리는 건가!”
“…….”
버틸까.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을 남자로도 보지 않는,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만 보는 루비나드에게 조금이라도 남자로서의 자신을 보여 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제빌은 순순히 뒤로 밀려나 주었다.
루비나드도 전력으로 밀어낸 건 아니라 버티려면 얼마든지 버틸 수 있었다. 아니, 이미 두 사람의 체격 차는 꽤 컸다. 속도로는 루비나드를 이길 수 없겠지만 힘으로는 분명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래도 아직은 필요하다. ‘연약하고 지켜 줘야 하는 제빌’의 이미지가.
아직은.
“그대는… 그대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루비나드의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아마 누군가에게 대놓고 이런 말을 들어 본 적은 없겠지. 어릴 때부터 그녀에게 향한 진심 반, 질투 반으로 이루어진 찬사들은 대부분 ‘아름답다’, ‘예쁘다’, ‘기품 있다’ 등이었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긴 했다. 루비나드가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건 자신뿐이었으니까.
그녀의 오라비들도, 아버지도 모르는….
오로지 제빌만이 알고 있는 모습.
“폐하께서 저번에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뭐, 뭐?”
“말을 하다 마는 게 가장 나쁜 일이라고.”
제빌의 목소리가 무거웠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마음을 강하게 담아서.
잠시 허공을 맴돌던 보라색 눈동자가 다시 제빌에게로 향했다.
창가에 서서 햇빛을 등지고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있는 그에게서는 표정 하나 보이지 않았다. 살짝 고개를 숙인 탓에 옆머리가 눈가까지 가렸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지금 침울해하고 있다는 것쯤은.
“언제나 제가 삼키던 말들은 이런 말이었습니다. 폐하께서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으시리라는 것도, 제가 놀린다고 생각하실 것도 알아서 삼켜 두었던 것뿐입니다.”
제빌의 말에 루비나드가 흠칫, 몸을 굳혔다.
언제나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말던 제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렇겠지, 하고 넘기던 그녀가 지난번 서고에서 처음으로 그를 몰아세웠다.
확실히…. 황제에게, 제 상관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제빌은 루비나드를 여자로 보지 않는다고 했으니 아마 여동생을 귀여워하는 감정이나 강아지 같은 걸 보고 귀엽다고 하는 감정에 가까운 거겠지.
감히 제 상관에게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제빌 경, 그….”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말은 입에 담지 않겠습니다.”
제빌이 고개를 들어 루비나드를 보았다. 그 입가에는 쓸쓸해 보이는 미소가 스며 있었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처음 보는 눈동자였다.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루비나드의 입술이, 그녀가 무언가를 생각하기도 전에 멋대로 열렸다.
“괘, 괜찮네.”
“…네?”
“그, 귀, 귀엽다든가 그런 이야기를 해도 괜찮다는 뜻이야.”
이건… 무슨 일이지?
루비나드의 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제 이미지를 이용한 것뿐이었다. 그의 진심을 아직 내뱉을 순 없었으니, 그런 식으로 넘기려고. 그런데 루비나드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해도 된다니. 설마.
제빌의 마음을 알고 이제 받아 주겠다는, 그런 뜻인 건가…?
그의 마음이 헛된 기대로 차올랐다.
하지만 이내.
“내게는 이해가 가질 않지만, 사람마다 취향은 제각각인 거고…. 우리는 오랫동안 함께 있지 않았나. 내가 그대를 보며 아직 어린 날의 그대를 떠올리는 것처럼 그대 역시 날 보며 그럴 수도 있겠지.”
아아, 역시.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다.
제빌의 마음이 또 가장 깊고 어두운 곳에 처박힌다. 언제나처럼.
“그러니 그…, 그대의 감상까지는 내가 막을 수 없지 않겠나. 그러니 이제 감추지 않아도 돼.”
아닙니다. 주제넘은 소리였다는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이 이야기를 끝내려 했다. 입을 여는 제빌보다 먼저, 루비나드가 말을 이었다.
“그, 둘이 있을 때라면 말이네. 남들 앞에선 좀… 쑥스러우니까.”
조금 진정된 얼굴로 그렇게 말한 루비나드가 힐끗 그를 보았다. 그리고 웅얼거리듯 속삭이며 중얼거렸다.
아마 그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말할 셈이었겠지만.
“생각보다 그런 칭찬이… 기분 나쁘지도 않고.”
제빌의 귀에는 천둥소리보다도 더 크게 들렸다.
말의 뜻을 이해하기도 전에 제빌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그렇게 두 사람은, 시녀가 차를 가져오기 전까지 한참이나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