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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 (71)화 (72/115)

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72)

오후에는 예정대로 베카르티와의 알현이 진행되었다.

그는 알현 시간 내내 시종 담담했다. 큰일을 꾸미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전혀 예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평온하고 냉정한 얼굴이었다.

하긴, 그러니 당당하게 황제의 앞에 얼굴을 내밀 수 있었겠지. 서류로 끝내도 충분할 중간 보고를 굳이 대면 보고 하겠다고 할 정도로. 물론, 거기엔 제빌을 살피기 위해서라는 이유도 있을 테고.

“…이상입니다.”

“역시 대단하군. 이제 관건은 가격을 낮추는 일뿐이겠어.”

“냉기를 발생시킨다 해도 그걸 붙잡아 두는 것이 불가능하면 수명이 짧아지니까요. 그럼 자연히 마석을 많이 소모하게 될 테고 가격도 비싸질 것입니다. 그럼 한정된 일부 귀족들만 사용하는 물품이 되겠죠. 저희도 그런 사태가 오는 걸 원하진 않기에 계속 연구 중입니다.”

“필요한 소재가 있다면 언제든 이야기하게. 상단을 통해 구해 보도록 하지.”

제빌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지 않았다. 괜한 빌미나 단서를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저 고요한 눈으로 두 사람의 이야기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베카르티는, 평소라면 루비나드만 바라보며 이야기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루비나드를 바라보는 시간보다 제빌을 곁눈질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냉정하고 침착한 줄 알았더니 꽤 티도 낼 줄 안다. 역시 일부러 그러는 걸까. 적의 하나 흘리지 않는 주제에 일부러 보란 듯 힐끔거리고 있는 걸 보면 틀림없겠지.

루비나드는 보고서를 들여다보느라 그 시선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보였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제빌의 입장에서도 그들의 계획은 어느 정도의 성공은 거두어야만 했다. 그래야 귀찮은 벌레들을 한꺼번에 태워 죽일 수 있게 될 테니까. 지금 루비나드가 눈치채면 조기 진압을 해야 하니 생각보다 규모가 더 작아질 수도 있었다.

“생각한 것보다 기간이 더 필요해질 수도 있겠군.”

“생각보다 신경 쓸 것이 많아져서…. 본래 계획은 마법으로 냉기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었는데 상자의 크기가 커지니 소모되는 마력이 계산한 수치를 뛰어넘더군요.”

“그럴 수 있지. 이런 실험에는 언제나 예상 밖의 변수가 존재하는 법이니까. 그래도 그대가 참여하는 사업인 이상 분명 성과를 낼 것이라 믿고 있네.”

루비나드는 베카르티라는 사람 자체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능력은 신뢰하고 있었다. 그동안의 성과로 겨우 쌓은 신뢰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곧 무너질 테지. 제빌은 씰룩이는 입가를 이성으로 억누르며 가만히 눈을 내리떴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베카르티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으음. 조금 더 이야기를 들었으면 좋겠지만, 그대에게는 지금 일분일초가 아까울 테지. 다음 보고에서는 더 고무적인 이야기를 들려줄 것을 기대하겠네.”

베카르티는 대답 대신 제 가슴께에 손을 대고 정중하게 예를 갖추었다. 그리고 또다시 제빌을 힐끔 바라보았다.

따라 나오길 바라서 일부러 도발하는 건가. 넘어가 줄까? 아니면 무시할까.

잠시 고민하던 제빌이 자세를 바로 했다. 베카르티의 행동은 계산하에 나온 것이었다. 그러니 피하면 분명 이상하게 여길 터.

게다가 그 속내를 직접 듣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럼 전 이만. 이 주 뒤의 보고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그 말만 남긴 채 베카르티는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가만히 지켜보던 제빌이 루비나드를 향해 입을 열었다.

“폐하.”

“음?”

“잠시 차를 데워 오겠습니다.”

“벌써 식었나?”

“네. 오늘은 봄 날씨답지 않게 쌀쌀해서 그런지 금방 식는군요.”

“그래…. 그럼 난 이걸 살펴보고 있도록 하겠네.”

베카르티가 제출한 보고서를 툭, 친 루비나드가 다시 시선을 종이 위로 흘렸다. 엷게 웃는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제빌이 찻주전자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예상대로 베카르티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계셨습니까, 교수. 뭔가 말하지 못하신 것이라도?”

몰랐다는 듯 제빌이 시치미를 떼자, 짙은 어둠을 머금은 눈동자가 그 속내를 파헤치려는 듯 청회색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런 것에 속내를 드러낼 정도로 제빌은 미숙하지 않았다.

그의 침묵에 의아하다는 듯 엷은 웃음으로 대응하자, 베카르티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정원이 아름다워서.”

꽃에는 관심도 없는 남자가. 어차피 제빌더러 믿으라고 댄 핑계가 아니었다. 오히려 제빌이 속내를 드러내도록,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어디까지 파악했는지를 알고 싶어서 일부러 보이는 틈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그렇습니까? 그러고 보니 솔라탄의 봄도 아름답다지요.”

빙긋 웃는 얼굴에 옅은 적의를 섞는다. 루비나드의 앞에서는 절대 보여 주지 않는 표정에 베카르티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베카르티 역시 제빌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진 않으리라. 다만 그가 공식적으로 엔도르빌을 방문한 것은 겨울과 봄의 경계가 모호하던 시기였다. 아직 추운 날씨에 꽃 역시 피지 않은.

솔라탄에 꽃이 핀 것은 지극히 최근이었다. 정확히는 베카르티가 마지막으로 솔라탄을 ‘비공식적으로’ 방문한 날 즈음이었다.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남자는. 그 생각에 베카르티의 무표정이 깨어졌다.

“…그렇습니까? 저도 보고 싶군요.”

“제2 황자 저하와는 오랜 친우 사이시라고 들었습니다. 꽃을 보러 가는 김에 친우와의 회포를 푸시는 것도 좋겠군요.”

생긋 웃는 얼굴에서 싸늘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베카르티는… 처음으로 눈앞의 남자가 두렵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 마음은 제 마음 깊은 곳으로 밀어 넣어 두었다.

이미 늦었다. 저지른 것은 되돌릴 수가 없다. 그러니 제 마음에 생긴 작은 위화감은 그냥 밀어 넣어 두는 수밖에.

“배려 감사합니다, 전하. 전하의 말씀대로 해 봐야겠습니다.”

베카르티는, 성의 없이 예를 차리고 뒤돌아 걸었다. 그 뒷모습을 청회색 눈동자가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저 가만히.

때를 기다리며.

* * *

제빌에게 새로운 일과가 생겼다.

집무실 앞에 가득 찬 선물을 한구석으로 옮겨 두는 것. 그리고 거기에 들어 있는 편지의 내용을 미리 확인해 두는 것이었다.

『 폐하의 눈부신 자태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술렁입니다.

지금의 저는 마치 불길에 뛰어드는 나비 같습니다. 』

『 폐하의 붉은 머리카락에 잘 어울릴 것 같은 머리 장식을 발견했습니다.

금의 반짝임과 붉은 보석의 영롱함이 폐하를 한층 더 돋보이게 해 줄 터.

폐하께서 이걸 장식하시는 날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

언제나 그렇듯 별 볼 일 없는 문구가 적힌 편지들이었다.

대필이라도 시켰는지, 유려한 글씨체가 어딘지 다 비슷비슷했다. 이런 걸 대필하는 자들이 있다고 듣긴 했지만….

폐하께서 퍽이나 못 알아보시겠다. 굳이 스스로의 인상을 나쁘게 만들겠다는 걸 방해할 생각은 없었다. 제빌은 피식 웃고는 선물에 편지를 되돌려 두었다. 그러는 사이, 다소 투박하고 거친 글씨체 하나가 그의 눈을 끌었다.

『 겔라드 디 다휜 올림 』

하.

커드닐도 그러더니, 이 남자까지 후궁 경쟁에 끼어들 생각인 모양이었다. 커드닐은 그나마 이유라도 있었지. 이 남자의 이름은 제빌조차도 다소 흐리게 기억할 정도로 접점이 없었다.

‘그쪽’에 관해서는 계속 조사 중이지만, 겔라드의 이름이 올라온 적은 없었다. 다휜가 자체가 황제에게 충심이 깊은 가문이라 그녀에게 반목하는 그 어떤 일에도 참여할 리가 없었다.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했나.”

어느 날 갑자기 반했다며 툭 튀어나온 커드닐과 달리 겔라드는 루비나드의 놀이 친구로 선정된 이들 중 하나였다. 첫 만남 때는 마차가 고장 나는 바람에 뒤늦게 도착해 굳어 버린 분위기에 어리둥절해하기도 했었고, 사정을 들은 후엔 그 누구보다도 제빌을 배척하며 미워했다.

유력 후작가의 차남. 비실비실한 제 형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주가 될지도 몰랐던 그는 꽤 장래가 유망한 영식으로 손꼽혔다. 그런 그가 제2 황자인 엔도르빌도 아니고 루비나드의 놀이 친구를 자처한 이유는….

-만나 뵙게 되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저하.

여덟 살의 겔라드. 그의 첫사랑은 다름 아닌 루비나드였다.

당시의 루비나드는 지금의 다소 나른하고 오만한 분위기보다는 귀엽고 또랑또랑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화려한 드레스를 입으면 인형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그 용모에 한눈에 반했던 것이었다.

평소 거칠 것 없고 호승심 강하던 그가 루비나드의 앞에서는 벌벌 기어 다녔다. 하지만 루비나드는 그가 제게 이성적 호감을 품고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짐작도 하지 못했다.

대놓고 드러내는데도 마음을 알아주지도 않고, 늘 제빌과 붙어 다니는 루비나드의 모습에 겔라드는 애가 탔다. 그리고 그 애타는 마음은 질투가 되어 제빌에게로 향했었다.

-꼴에 공자라고 나대는 꼴에 웃음만 나오네. 그렇게 달라붙어 있으면 저하께서 널 봐 주시기라도 할 거라고 생각해? 넌 그냥 예쁜 강아지에 불과해. 곁에 두고 끌고 다니기 딱 좋은.

겔라드의 말에 아홉 살의 제빌은 진심으로 생각했다.

강아지라도 좋다. 그렇게라도 곁에 있을 수 있다면 무슨 상관일까. 차라리 쓸모없는 자신보다는 귀엽고 사랑스럽기라도 한 강아지가 더 나을지도 몰랐다.

그때의 제빌은 제 마음이 사랑이라는 건 짐작도 하지 못했다. 사랑해 본 적은커녕 받아 본 적도 없었으니까.

지금의 제빌이라면 아마 그리 생각했겠지. 그녀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면 개가 되어 기쁘게 그 손을 핥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령 그게 남자로서의 사랑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이.

하지만 겔라드에겐 불가능할 것이다. 그는 자존감이 높고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던 남자니까. 아마 진짜 사랑을 몰랐던 거겠지, 그는. 겨우 그 정도 독설에 제빌이 떨어져 나갈 거라는 어설픈 생각만 봐도 그랬다.

“…차라리 잘됐나.”

다휜가의 유일한 오점. 이 남자는 위험 요소였다.

만약 성장했는데도 여전히 몸이 허약한 형을 밀어내고 겔라드가 가주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귀찮은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겔라드를 후궁에 넣어 주지 않으면 다휜가 전체가 적으로 돌아서게 된다거나. 혹은 그걸 빌미로 루비나드를 협박할지도 모를 노릇이고.

한때, 쿠온 가문이 몰락하면 그 자리는 다휜가가 채울 것이라는 말까지 있었던 가문이다. 적으로 돌아서게 되면 귀찮아진다.

“이참에 위험 요소를 제거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렇게 중얼거린 제빌이 편지는 읽어 보지도 않고 꽃다발 안에 넣어 두었다. 어차피 그 남자에겐 루비나드의 마음을 사로잡는 게 불가능하다. 그는 이미 한 번 ‘끈이 떨어져 버린 연’이니까.

그 연은 다시는 하늘을 날 수가 없다. 이어 주면 그만이지만, 루비나드는 한 번도 제 손으로 끊어 버린 연을 이어 본 적이 없었다.

“여전히 당신은 혼자만의 사랑을 하는군요. 폐하를 전혀 보려고 하지 않아.”

그렇게 중얼거린 제빌의 마음이 갑자기 훅, 가라앉았다.

자신은…, 그녀를 잘 알고 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녀가 청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모든 일은 그의 계산대로 돌아갔다. 그리고 국서가 되어 달라는 청혼을 받은 그날부터 모든 것이 어그러졌다.

루비나드는 조금씩 그의 계산에서 벗어났다. 크게 벗어나진 않았고 대부분은 제빌에게 더 유리한 쪽으로 벗어난 것이었다. 그래서 신경 쓰지 않고 있었는데.

-언젠가 그 감정 역시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네.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두려워하던 루비나드. 그녀가 변해 버린 계기는 아마도….

제빌은 으득 이를 갈았다. 그의 손아귀 안에서 꽃다발이 일부 어그러졌다. 장미 가시가 손을 파고들어 피가 흐르는데도 아픔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루비나드가 집무실에 들어서기 전까지 제빌은 한참이나 허공을 노려보며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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