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71)
“꽤 재미있었네. 덕분에 새로운 글을 읽어 봤군.”
내민 책과 생글 웃는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던 레기안이 손을 뻗었다. 지나친 긴장 탓인지 툭, 하고 그녀의 손끝을 살짝 건드렸다. 하지만 루비나드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웃는 채 말을 이었다.
“이 소설은 감정선보다도 서사 내용이 많아서 읽기 쉬웠어. 아쉽게도 끝까지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그냥 겉으로라도 입에 발린 소리를 하면 그만일 텐데. 루비나드는 제 솔직한 감상을 털어놓았다.
그게 아쉬우면서도 기뻤다.
“더 읽기 쉬운 소설을 발견하면 보여 드리겠습니다.”
루비나드가 살짝,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솔직하게 말하면 기분 나빠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는 새로운 소설을 추천해 주겠다고 이야기했다.
조금은 가까워진 것이려나. 그렇다면 다행인데.
“그래 주면 고맙겠네.”
보라색 눈동자가 예쁘게 휘었다. 그 눈웃음을 바라보던 레기안은 살짝 고개를 돌렸다. 언제 온 건지 입구에는 제빌이 서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두 사람 모두에게 하는 인사인 듯 호칭은 딱히 붙이지 않았다.
왜일까. 그의 눈을 보기가 어려웠다. 레기안은 이번에도 살짝 시선을 틀어 다른 곳을 보았다. 그 움직임이 제빌의 눈에 보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설마. 아니, 하지만. 폐하가 변한 이유는… 이 남자인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제빌이 사교적인 미소를 띠며 다가갔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위화감에 레기안이 저도 모르게 슬쩍 뒤로 물러났다.
“왕자께서는 이런 아침부터 독서 중이십니까.”
“아, 네. 일찍 일어나서 책을 읽다가 아침 식사를 하는 게 일과처럼 되어 버려서….”
“바라시면 더 일찍 식사하시는 것도 가능합니다. 주방에 이야기해 둘까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상냥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왜 이리 견딜 수 없는 위화감이 느껴지는 것일까. 당장 이 자리에서 도망가야 한다고 레기안의 본능이 경고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읽던 책을 집어 들었다.
“괜찮습니다. 두 분도 좋은 아침 되세요.”
가볍게 묵례를 한 레기안이 밖으로 나갔다. 고개를 갸웃한 루비나드가 제빌을 향해 물었다.
“뭔가 기분이 상할 일이 있었나?”
“제 탓일까요?”
“설마. 그대가 왔다고 왕자가 기분 상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럼 급한 볼일이라도 생각난 게 아닐까요.”
“흐음.”
어딘지 찜찜했다. 레기안은, 이 나라에 와서 아직 손님 대접을 받고 있기에 따로 해야 할 일이 없었다. 사교계에 얼굴을 내미는 것도 아니고 그저 책을 읽거나 극장에 다녀오는 것이 전부인 나날.
그런데 이 새벽에 갑자기 어디서 볼일이 생긴다는 걸까.
“화장실이라든가.”
“아, 그런가.”
예상치도 못한 제빌의 말에 루비나드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던 제빌이 엷은 웃음을 흘렸다.
“제빌 경.”
“네?”
“가끔 그대는 이유 없이 웃을 때가 있어.”
이유라면 차고 넘칠 정도로 많습니다만. 대부분은 아마 당신이 너무 귀엽거나 사랑스러웠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진짜 이유를 숨긴 채 제빌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습니까?”
“좋지 않은 버릇이라고 생각해.”
“보기 흉합니까?”
“그건 아닌데…. 내가 뭔가 우스운 행동을 한 게 아닌가 고민하게 되잖나.”
더 고민해 주면 좋을 텐데. 그 머릿속이 제빌로 가득 찼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겠지.
루비나드의 사고는 절대로 제빌의 진짜 이유에 닿지 못할 테니.
“폐하께서.”
“음.”
“오늘도….”
“오늘도?”
툭, 툭 말이 끊어진다.
충동적으로 꺼낸 말에 진심을 담아도 되는 걸까. 잠시 고민하던 제빌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게 더 나쁘다는 거 알고 있어?”
“글쎄요. 전 잘 모르겠습니다.”
“말을 하다 마는 게 가장 나쁜 거라고 했네.”
“누가 그러던가요?”
“시녀들이.”
“그거보다 더 나쁜 일은 산처럼 많습니다.”
윽.
제빌의 한마디에 루비나드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진짜로 화나게 한 건가 싶어 제빌이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베카르티 교수가 오는 날이군요.”
“…….”
“중간 보고가 있는 날이었죠. 잘 진전되면 좋을 텐데요. 냉장고라고 부르기로 했던가요, 이번의 사업 물품.”
“제빌.”
경, 이라는 호칭까지 생략되었다. 이럴 때의 루비나드는 둘 중 하나였다.
너무 편안해서 호칭조차 붙이지 않고 그를 다정하게 부르는 것이거나,
“말 돌리지 말지?”
정말로 폭발 직전이거나. 아무래도 이번엔 후자인 듯했다.
이걸로 넘어갈 수 없다면….
“말을 돌리는 게 아니라 일정 확인이었습니다.”
“나는 그대가 하려던 말이 궁금하다고 말하고 있어.”
“제가 왜 말을 하려다 말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들으면 안 될 말이라도 하려던 건가?”
“잘 알고 계시는군요.”
그런 거라면 애초에 말을 꺼내지 않으면 될 텐데. 괜히 운을 띄워서 궁금증만 생기게 만든다.
게다가 들어선 안 될 말이라니. 더 듣고 싶어지지 않나.
“나는 그대에게 진실을 말하라고 명령하고 싶지 않아. 그대가 끝끝내 숨긴다면.”
“저는 명령하셔도 좋습니다.”
협박인 셈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의외의 대답에 루비나드의 말문이 막혔다.
장난인가 싶어서 쳐다봤지만, 제빌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진심으로 명령하라고 이야기하는 건가?
…왜?
“난 그대의 의지를 존중하고 싶어.”
“그럼 묻지 말아 주십시오.”
“윽.”
말로는 이길 수가 없다. 제빌이 작정하고 루비나드의 말을 피하기 시작하면 도저히 이겨 낼 방법이 없었다.
정말이지. 루비나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저었다.
“아침 식사나 하러 가지.”
“네.”
얌전히 그녀의 곁에 서며 제빌은 생각했다.
진심인데.
제빌은, 루비나드의 명령이라면 뭐든 들을 수 있었다. 제가 한 일들을 이야기하는 것만 제외한다면. 죽으라고 한다면 기쁘게 죽을 수도 있었다.
명령해 주면 좋을 텐데. 좀 더 자신을….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을 밀어 넣은 채 그는 담담히 걸음을 맞춰 걸었다.
* * *
“악토그라토리아 황태자가 방문하는 것이 정식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으음. 제2 황자 쪽에선 반응이 있었나?”
루비나드의 질문에 제빌이 곤란하다는 듯 살짝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별 반응은 없었습니다.”
“아직 소식을 모르는 건 아니고?”
“그쪽에서 서신을 보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반응이 없다는 건.”
루비나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 뻔하겠지.
“돌아갈 마음이 없거나, 자신을 돌아오게 만들려고 본국에서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어느 쪽이건 황태자가 오면 갈 수밖에 없을 겁니다.”
제빌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루비나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황태자가 왔는데도 데려가지 못한다면 남은 건.
“설마 황제가 직접 미묘한 관계의 동맹국에 방문하도록 만들진 않을 테니.”
솔직히 지금까지의 행보도 일국의 황자가 보일 만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자신이 황족이라는 자각이 있다면. 그리고 생각이라는 게 있다면 황태자 방문 때 순순히 따라갈 터였다.
에브니겔이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 알 리 없는 루비나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사태까지 가는 건 저희로서도 곤란합니다.”
에브니겔이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 알고 있는 제빌은 엷게 웃었다.
루비나드는 절대로 에브니겔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 그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녀는 이걸로 모든 게 해결될 것이라고 믿을 터였다. 하지만 제빌은 아니었다.
사랑은 맹목적인 것이다. 제빌, 자신의 것이 그러하듯.
황자는 루비나드의 앞에 무릎 꿇고 애정을 갈구했다. 그가 줄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주겠노라 애원했다. 심지어 그의 손에 있지도 않은 것을.
루비나드는 그의 애원을 혐오했다.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같은 황족인데도 루비나드와 그가 바라보는 세계는 너무나도 달랐다. 그래도 그게 밖으로 새어 나가선 안 된다는 걸 알았기에 제빌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제빌은 제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작은 구슬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황태자는 일단, 연회에 초대받았다는 명목으로 방문하는 것이기에 첫째 날에 참여할 것 같습니다. 안전을 위해서 인사 정도만 하고 돌아가거나, 폐하와 제가 계속 같이 붙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으음. 로간 제국에서 악토그라토리아의 황태자가 해를 입었다고 하면 그건 농담으로 웃어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게 될 테니.”
만약 그가 중상을 입거나 죽기라도 하면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 호전적인 악토그라토리아의 황제가 제 후계가 입은 해를 방치해 둘 리 없으니. 아직 헤르젠과 완전한 동맹을 맺지 못한 상태에서 그렇게 되는 건 곤란했다.
“연회 준비는?”
“이번엔 꽤 준비 기간이 기니까요.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으음. 뭐, 말하지 않아도 그대가 알아서 잘 하겠지.”
거기까지였다. 루비나드의, 에브니겔을 향한 관심은. 제빌은 에브니겔을 떠올리며 옅은 미소를 띠었다.
분란의 씨앗은 남겨 둬선 안 된다. 씨앗은 언젠가 싹을 틔우기 마련이고, 소리 소문 없이 돋아난 싹은 순식간에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 마련이니까. 그 전에 뿌리까지 뽑아내야만 했다.
다시는 감히 클 수 없도록.
“이 기회에 황태자와 친분을 쌓아 두는 것도 좋겠지요. 지금의 황제가 물러나시면 황태자께서 계승하실 테니까요.”
“…흐음. 그건 그렇지. 황태자는 호전적이지 않은 성격이라면 좋을 텐데.”
“이야기 나눠 본 바로는 꽤 온화한 성격이신 것 같습니다. 오히려 제2 황자가 더 호전적인 성격인 것 같더군요.”
“그래.”
오면, 초대해서 이야기를 좀 나눠 볼까.
확실히 좋은 기회였다. 공적인 자리가 아니면 루비나드가 악토그라토리아의 후계자와 이야기할 기회 따윈 없을 테니. 게다가 친분을 쌓을 기회는 더더욱 없을 테고.
“우리는 연회에서 일찍 빠져나오도록 하지. 황태자와 다과 시간을 가질 수 있냐고 미리 일정을 타진해 주겠나.”
“알겠습니다.”
제빌은 정중하게 예를 갖추었다. 청회색 눈동자 가득 감도는 만족감을 숨긴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