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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 (69)화 (70/115)

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70)

“별일이군요. 폐하께서 침대에서 책을 다 읽으시고.”

“음? 결혼 후에 읽지 않았을 뿐이지, 가끔은 읽었네.”

그건 정말로 가끔이지 않습니까…. 거의 가뭄에 콩 나듯 그러셔 놓고.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루비나드에게 들킬지도 모른다. 아주 오래전부터, 제빌이 그녀에 관한 정보를 계속 수집해 왔다는 걸. 그래서 제빌은 모르는 척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책 표지를 보았다.

“…정말로 드문 일이군요. 연애 소설이라니.”

연애 소설 하면 떠오르는 인물의 얼굴에 제빌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걸 어떻게 해석한 건지 루비나드가 씩 웃으며 책을 들어 보였다.

“나도 가끔은 이런 걸 읽어.”

“전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만.”

“그대가 보지 않는 곳에서 읽었으니 그렇지.”

“…누군가의 영향을 받으신 건 아니고요?”

그 조그만 중얼거림을 어떻게 들은 걸까. 제빌의 귀에도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는데.

루비나드가 퉁명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대는 대체 날 뭘로 보는 거야. 나도 연애에 흥미가 전혀 없는 건 아니네. 언젠가는 나도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날이 오지 않겠나.”

거짓말.

루비나드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감정을 모른다. 그녀의 주변에 있는 이들 중 일부, ‘사랑’을 이유로 해선 안 될 짓을 한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뭐랄까.

사랑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폐하께서요?”

“…좀 그런 걸로 해 두면 안 되겠나?”

“하아,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말을 마친 제빌이 스윽, 이불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그때까지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루비나드의 모습이 어쩐지 얄미웠다.

“안 주무십니까?”

“으음. 그대가 자는 걸 보고 잘 거야.”

“저 혼자요?”

“아이도 아니고. 잠정도야 혼자서 잘 수 있지 않나.”

혼자서 못 자도록 길들인 건 당신이십니다만.

제빌은 부루퉁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지만, 책장에서 고개를 들지 않는 통에 실패했다.

“…그렇게 재미있습니까?”

“응? 으음…. 사실대로 말하면 좀 난해하네.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 별로 없어서. 다만, 사건이 꽤 재미있어.”

“어떤 내용입니까?”

“아직 덜 읽어서 확신은 못 하겠지만….”

루비나드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책 내용을 요약해서 들려주었다. 제빌은 그녀의 얼굴을 올려 보며 그 목소리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귀족 영애인 여자 주인공과 그녀의 호위 기사인 남자 주인공의 이야기야. 기사는 영애를 사랑하고 있지만, 영애는 기사를 그저 호위 기사로만 보고 있네. 하지만 다양한 사건을 겪으며 점차 기사에게 마음을 열어 가지.”

그저 그런 내용이었다. 기사가 불한당에게서 영애를 구해 주기도 하고, 갑자기 발발한 전쟁 속에서 영애의 주변을 떠나지 않고 보호해 주기도 한다. 함께 지내는 동안 정도 들고 감정도 생겨 두 사람은 미래를 약속하게 된다.

“지금 읽는 부분은 전쟁이 끝나고 난 후에 대한 것이네. 두 사람은 영애의 부모님에게 결혼 허가를 받고자 집으로 돌아오네. 하지만 부모님은 가문 재건을 위해 영애가 유력가에 시집가기를 원하지.”

뻔한 내용. 제빌은 눈을 가늘게 뜬 채 가만히 듣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폐하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음?”

“폐하가 영애라면 부모님의 뜻을 따르시겠습니까? 아니면 기사와의 약속을 지키시겠습니까.”

“그런 건 당연한 거 아닌가.”

루비나드가 탁, 하고 책장을 덮었다. 그러고는 전혀 잠들 생각이 없어 보이는 제빌의 등에 위를 토닥토닥 두드리기 시작했다.

“재우려 하지 마시고요.”

“그대가 잠들어야 나도 잘 수 있으니까.”

“그래서 대답은요?”

“…아, 그거.”

루비나드의 시선이 책으로 향했다.

사랑에 대하여.

사랑에 대한 걸 뭔가 알 수 있을까 했지만, 아쉽게도 그렇진 않았다. 대신 확실해진 게 있었다.

“나라면 내가 가문을 재건했겠지. 내가 유력가에 시집을 간다 한들 가문 내부가 변하지 않으면 일시적인 것에 불과해. 그야말로 깨진 바가지로 물을 뜨는, 어리석은 짓이 될 테지. 그런 것보다는 가문 내부를 바꾸는 게 더 빨라.”

역시, 당신이라는 사람은.

제빌의 예상에서 크게 빗겨 나가지 않은 대답이었다. 분명 루비나드라면 그렇게 대답할 것이라 생각했다.

안도감에 제빌이 스르르 눈을 감았다.

“연애 소설로 읽는 게 아니라 그냥 사건의 흐름을 보신 거군요.”

“무슨 소릴. 제대로 연애 소설로도 읽었네.”

반짝, 감겼던 눈이 뜨였다. 제빌의 눈이 루비나드의 얼굴로 향했다. 촛불 아래에서 그림자 져서 그녀의 표정이 잘 보이질 않았다.

“…뭔가 느끼신 게 있습니까?”

“으음, 나름대로?”

어떤 걸 느끼셨습니까, 당신께서는.

루비나드는 사랑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녀는 아마도,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영애를 버리지 않고 계속 보호한 기사조차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정말로 영애를 생각했더라면 빨리 가문의 사람들과 합류시켜야만 했다. 저 소설을 읽진 않았지만, 전화 속에서 영애를 끝까지 지켜 낼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였다면 분명 가문 사람들과 합류하는 것도 가능했을 터.

그런데도 기사는 영애를 가문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않은 것인가, 못한 것인가.

제빌은 후자라고 확신했다.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있는 매일. 그녀가 자신만을 바라보며 의지하는 오늘을 버리고, 그녀의 안전을 위해 다시 바라만 봐야 하는 곳으로 돌려보낸다는 건….

최소한 제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영애 말이야.”

“네.”

“기사는 안전을 이유로 계속 길을 돌아가고 있네. 그걸 알면서도 왜 영애는 순순히 그를 따랐을까에 대해 고민해 봤는데 말이야.”

제빌은 숨을 죽인 채 루비나드의 말을 기다렸다. 잠시 더 생각한 후 그녀가 말을 이었다.

“처음엔 두려움이 아니었을까 싶네.”

그럼 그렇지. 당신께서 낼 수 있는 대답이란 건… 언제나 그렇다. 잠시나마 긴장한 자신이 우스워서 제빌은 살짝 몸을 말았다.

“갑작스러운 전쟁은, 분명 고요한 나라에서 귀하게 자란 영애에겐 두려운 일이었을 거야. 혼자서 돌아가고자 해도 온 사방이 아비규환이니 틀림없이 그 모든 게 그녀를 공포로 밀어 넣었을 테고. 시작은 그랬을 것 같네.”

시작은, 이라는 건 나중엔 뭔가 달라졌다는 걸까. 제빌이 살짝 웅크렸던 몸을 펴고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루비나드는 시종 고요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함께하면서 분명 감정이라는 것이 생겼겠지. 생사의 갈림길에서 몇 번이나 자신을 구해 준 남자를, 자신을 던져서 그녀를 구하려 한 남자를 어찌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볼 수 있을까.”

루비나드가 그랬던 것처럼.

영애가 약해서가 아니다. 약해서 지켜지고 싶은 게 아니다. 그저….

세상에 혼자가 아니라는 그 기쁨. 누군가가 지켜 줄 필요가 없는데도, 누군가는 나를 지켜 주려 한다는 그 마음이 감정을 끌어내는 것이다. 남자가 아니었던 사람을 남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면서 영애는 가문과 동떨어졌다. 기사는 영애를 버리고 떠나도 문제가 없었다. 어차피 봉급을 줄 수도 없으니까.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나라가 멸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제 살길을 찾아가는 게 현명하겠지. 그런데도 기사는 영애를 버리지 않고 계속 그녀를 지켰다.

지킬 필요가 없는데도 지켜 준다. 그건 분명.

“기뻤겠지. 무척이나.”

그렇게 말하며 웃는 루비나드의 얼굴은….

제빌이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어딘지 애틋하고 아련한. 제빌로서도 딱 이름 짓기 어려운 무언가가 가득 담겨 있는 얼굴.

그건 분명 황제로서의 루비나드도 아니고 친우로서의 루비나드도 아니었다.

아니었다.

제빌은 모르는 무언가였다.

“그게 왜 사랑으로까지 이어졌는지는 아직 모르겠어. 언젠가는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을 마친 루비나드는 쑥스러운 듯 웃었다.

아마도 그녀 자신도, 그녀가 낯설겠지. 제빌이 그렇듯이.

제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루비나드를 보고 있었다. 그녀를 안고 싶다거나, 입을 맞추고 싶다거나 그런 저속한 욕망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의 낯선 얼굴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불이 켜져 있으니 그대가 더 잠들기 힘든 모양이야. 그만 자도록 하지.”

루비나드가 몸을 일으켜 후욱, 숨을 불어 촛불을 껐다. 순식간에 사위가 어두워졌다.

부스럭부스럭. 잠옷과 이불이 쓸리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평소라면 그 소리에 치밀어 오르는 욕망을 밀어내려 애쓰고 있었을 제빌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언제부터 루비나드는 저런 눈을 할 수 있게 된 걸까. 저런 얼굴을 할 수 있게 된 걸까.

…그렇게 만든 건, 누구지?

쑥스러울 때의 루비나드는 그걸 감추려고 일부러 뚱한 표정을 짓는다. 아니, 일부러가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되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루비나드는 아니었다.

그저 웃었다.

그런, 어른스러운 표정을 짓게 된 건 언제부터일까. 매일 그녀와 함께해 왔는데 왜 자신은 몰랐던 것일까. 대체 누구로 인해 그녀가 변한 거지?

그녀를….

‘여자로서의 표정’을 짓게 만든 건 대체 누구지?

“제빌 경?”

그녀가 누우면 등으로 휘감기던 팔이 잠잠했다. 나직한 목소리로 그를 부르자 제빌의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어둠 속에서 달빛이 커튼 사이로 새어 들었다.

청회색의 눈동자는 투명한 유리구슬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안에 깃든 감정이, 그게 구슬이 아니라 눈동자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제빌은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제빌 경?”

다시 한 번 그를 불러 보았지만,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루비나드가 손을 올려 그의 눈앞에서 흔들려던 그 순간.

“알고 싶으십니까?”

“음?”

“왜 그 기쁨이 사랑으로 변한 것인지 알고 싶으신 겁니까?”

청회색 시선이 그녀의 눈을 휘감고 놓아 주질 않는다.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그 시선을 보며 루비나드는 생각했다.

어째서인지 도망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글쎄.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네. 하지만 지금, 내가 예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걸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처럼….”

그래서 루비나드도 피하지 않았다. 그 시선을 똑바로 마주 보며 한 글자 한 글자를 또박또박 내뱉었다.

“언젠가 그 감정 역시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네.”

대답은 끝났다. 더 이상의 질문은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한참이나 그렇게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저, 하염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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