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69)
“오늘도 서고인가. 최근 성도에 있는 도서관도 다닌다면서. 질리지도 않나.”
루비나드가 앞에 앉자, 레기안이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가끔 루비나드가 일찍 깰 땐 꼭 서고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럼 틀림없이 레기안이 있곤 했다.
“왕자는 잠이 별로 없나 보군.”
“일찍 잠들어서 일찍 일어나는 것뿐입니다. 하루에 일곱 시간은 수면을 취하고 있습니다.”
“아아. 규칙적이고 바른 생활은 중요하지.”
흘끗 책 표지를 본 루비나드가 엷게 웃었다. 오늘도 그의 손에 들린 건 연애 소설이었다.
그 시선을 눈치챈 듯 레기안이 슬쩍 손으로 제목을 가렸다.
“아, 미안하네. 비웃는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짐이 볼 때마다 연애 소설을 읽고 있기에. 많이 좋아하는구나 싶어서 웃은 것뿐이야.”
만약 레기안이 제빌과 비슷한 환경이었다면, 당한 처우도 비슷할 터였다. 저런 소설을 읽는 건 남자의 수치라고 생각하는 괴이한 놈들이 많으니 아마 비웃음도 꽤 당했을 터. 루비나드가 손사래까지 치며 부정하자 조용히 바라보기만 하던 레기안이 흐릿한 미소를 띠었다.
“알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이런 걸 비웃으실 분이 아니라는 건. 다만 반사적으로 움직인 것뿐이니 기분 상하지 말아 주세요.”
이상할 정도로 오늘은 입이 잘 움직였다. 어쩌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가 명료해서일까. 아니면 그녀가 편해져서일까.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오늘이라면 그녀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다.
“폐하께서는…, 책은 좋아하지 않으십니까?”
“음? 아마 남들만큼은 좋아한다고 생각하는데. 다만 오래 앉아 있으면 좀이 쑤셔서 말이야.”
“좀…이요?”
“…아니, 그, 음. 그렇지. 쿠온 경에게는 비밀로 해 주게.”
확실히 황족이 할 언행은 아니었다. 하지만, 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굳이 국서에게 말하지 말라는 걸까.
의아해서 물끄러미 바라보자, 루비나드가 슬쩍 입구 쪽을 살피고는 자세를 낮췄다.
“평소에 이런 말투 쓰지 말라고 쿠온 경에게 자주 혼나고 있다네. 아마 왕자에게는 마음이 편해서 말이 헛나온 모양이야.”
언제나 계산해서 말을 하는 그녀에게는 드문 일이었다. 아니,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사실 가장 당황한 건 루비나드 본인이었다.
제빌도 이렇게 빨리 편해지진 않았는데.
“아마도 왕자의 분위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제… 분위기 말입니까?”
“차분하고 시종 담담하지 않나. 그러다 보니 마음이 편해져서 그런 것 아닐까 싶은데.”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그런가?”
“네. 그동안….”
제 과거를 털어놓으려던 입이 멈췄다. 루비나드는 몰랐겠지만, 이 역시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레기안은 누군가에게 사랑받거나 호감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한 적이 없었다. 제 아비에게도 미움받는, 자기 자신에게조차 사랑받지 못하는 그가 누구에게 사랑받을 수 있단 말인가. 불가능한 일이라면 처음부터 시도하지 않는 것이 편하다.
그런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이 나라에 와서 처음으로 누군가의 호의를 입어 보았다. 처음에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그것은, 갈수록 간지러움과도 같은 감각으로 레기안의 안에 자리 잡았다.
루비나드와 제빌을 보면 피부가 간질거린다. 무언가를 말하고 싶고 해 주고 싶은데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 좌절감에 침울해져 있으면 다시 그들이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호감을 표해 준다. 그게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지 이제는 알고 있었다. 소설 속에서 판타지라고만 생각했던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걸 가르쳐 준 건 두 사람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루비나드가.
짙은 어둠 속에 있다가 끌어 올려진 기분이었다. 레기안 혼자만 존재하던 어둠만이 가득한 세계. 레기안은 거기에 갇혀 있는 것이기도 했고, 동시에 타인을 거부하여 스스로 틀어박혀 있는 것이기도 했다.
루비나드가 거기에 한 줄기 빛을 주었다.
레기안은 처음으로 잃고 싶지 않은 게 생겼다.
“그동안?”
반짝이며 빛나는 보라색 눈동자. 그녀는, 자신의 음습한 과거를 알고도 여전히 호의를 보내 줄까?
레기안이 얼마나 음울한 인간인지 알면 떠나 버리는 게 아닐까. 다른 사람들과 같이 오히려 비웃고 비아냥대는 건 아닐까. 그런 두려움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지금까지는 도리어 날 좀 내버려 두어 주었으면 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했었다. 사실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하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도 제빌과 닮았어. 왜 늘 뭔가를 말하려다 마는 건지.”
피식, 웃는 그녀는 익숙한 듯 보였다.
만약 국서가 황제에게 무언가를 말하려 말았다면…. 그건 아마도 틀림없이 자신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폐하께서는 어떤 책을 좋아하십니까?”
명백하게 화제를 돌리려는 의도를 내포한 한마디였다. 하지만 루비나드는 픽 웃고는 모르는 척 넘어가 주기로 했다.
“그렇군…. 일단은 검술서.”
“검술을 좋아하십니까?”
“으음. 왕자는 헤르젠 제일의 기사라지. 언젠가 왕자와도 검을 나눠 보고 싶다네. 강자와의 대결은 언제나 가슴이 두근거리기 마련이니 말이야.”
헤르젠에도 무술을 즐기는 여성은 꽤 많았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대련을 자주 하십니까?”
“음. 친위대의 기사들과 가끔. 하지만 주인이라고 짐을 너무 봐주는 통에 제대로 실력 발휘를 할 수가 없네. 대체 짐을 얼마나 약하게 보는 것인지.”
아마, 그게 아닐 텐데. 처음 만났을 때의 위압감과 평소의 몸놀림을 생각해 보면….
“폐하께서 정말로 강하신 것이 아닐까요.”
“음? 짐이 대련하는 걸 본 적이 있나?”
“아니요. 하지만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습니다.”
루비나드는 몸을 ‘사용’하는 게 능숙해 보였다. 반응 속도도 빠르고 전환도 빠르다. 때로는 생각보다도 몸이 더 빨리 움직이는 게 보였다.
만약 검술에서도 그렇다면.
“폐하는 틀림없이 강하실 테지요.”
“으음? 검을 쓰는 모습을 보지도 않고 어찌 안다는 건가. 이유도 말해 주지 않고 계속 그리 말해서야 그냥 아부로 들리지 않나.”
실없는 소리라는 듯 픽, 웃는 얼굴에 순간 시선을 빼앗겼다. 루비나드는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뭐, 그건 다음에 대련할 기회가 생기면 확인해 보도록 하지. 그 외에는… 그렇군. 역사서도 좋아하네. 과거를 아는 건 곧 미래를 아는 것과 같지. 아무리 문명이 발달해도 인과관계라는 건 그리 쉬이 바뀌지 않는 법이니.”
역사 안에는 미래에 대한 대답이 있다.
루비나드에게 역사를 가르친 선생의 말이었다. 그리고 루비나드 역시 그 말에 깊게 동감했다.
세상사라는 것에는 인과가 있는 법이었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하고, 마법이 발달하고, 타국과의 교류과 활발해져도 바뀌지 않는 것이 있다. 그걸 알면 최소한 과거에 있었던 문제들은 막아 낼 수 있었다.
“발전에 의해 새로이 생겨나는 문제들은, 그 또한 역사가 되어 후세에 발생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되어 줄 테지. 그래서 역사서를 좋아하네.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가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아서.”
황제를 보고 있으면 반사적으로 아버지를 떠올리게 된다.
-책? 그런 건 나약한 놈들이 보는 것이다. 진짜 강자는 검으로 말하는 법.
몇 살 때였더라. 채 열 살이 되기도 전이었을 것이다. 드물게도 네 가족이 함께 식사할 기회가 있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레기안만이 동떨어져 있었다. 형님은 그런 레기안이 신경 쓰였는지,
-그러고 보니 레기안에 대한 칭찬이 자자하더군요. 책을 많이 읽는 데다 이해력도 좋아서 선생들이 뭘 물어도 거침없이 대답한다고.
별것 아닌 칭찬이었다. 아마 형님의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서 한.
거기에 되돌아온 대답이 저거였다.
어린 마음에 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때의 레기안은, 아직 제 처지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했었으니까. 그래서 검술을 연마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자신이 형님보다 더 낫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그저 한 조각의 관심과 칭찬이 고팠던 걸까.
열여섯 살에 처음으로 검술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물론, 형님도 참가한 대회였다. 레기안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 뛰어난 스승의 지도를 받아 온 형님은,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던 선생 밑에서 거의 독학이나 다름없이 검술을 배운 레기안에게 졌다.
그것도 꽤 큰 격차로. 그러자 아버지는.
-사람의 강함은 무술이나 지식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인성이 중요한 것이야. 왕세자는 그 누구보다도 인품이 뛰어나니 틀림없이 성군이 될 테지.
그 뒤로는 모든 걸 놓아 버렸다. 가끔, 찌뿌둥한 몸을 풀어 주기 위해서 검을 휘두르는 게 전부였고 나머지 시간엔 책에 파묻혀 살았다. 그렇게 해도 그 누구도 눈치를 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하기를 바랐다.
감히 왕세자의 자리를 넘보지 않고 그렇게 조용히 살아가기를.
그래서 루비나드가 자신을 부정하지 않을 때면 늘 새로웠다. 같은 자리, 아니, 어떻게 보면 아버지보다 더 책임이 막중한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그녀는 막힌 사고 대신 열린 사고로 모든 걸 생각했다. 그게 신기했다.
“이런 소설은 좋아하지 않으십니까?”
생각을 거쳐서 나온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가벼운 질문에도 루비나드는 진지하게 고민하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닌데…. 읽을 시간도 별로 없었고 여유가 없었다고 하는 게 더 옳겠지.”
대답을 마친 루비나드가 레기안의 손에 들린 책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실 연애 소설에는 별 흥미가 없어서 거의 읽어 본 적이 없었다. 그녀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들이,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을 통해 표출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좀체 진도가 나가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혹시 추천해 줄 만한 책이 있나?”
“추천, 이요?”
“으음. 사실대로 말하자면 영웅 소설이나 모험 소설은 꽤 읽어 봤는데 연애 소설은 그다지 읽어 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 초보자도 읽기 쉬운 책이 있다면.”
초보자, 라.
연애 소설 속의 사랑은 어찌 보면 현실과는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 현실의 사랑은 그렇게 아름답고 애달프며 가슴이 아리지 않을 테니까. 현실에서 제빌과의 애정을 나누고 있는 그녀에게는 그냥 판타지로만 보일 텐데.
그래도 그녀가 자신의 관심 분야에 흥미를 보인다는 게 레기안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서고 한구석으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제가 처음 연애 소설을 읽기 시작한… 일종의 계기가 된 작품입니다.”
루비나드는 책을 받아 들고 표지를 보았다. 제목은 심플했다.
「 사랑에 대하여 」
사랑이라. 루비나드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이었고, 아마 앞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인 감정이었다. 하지만 모르는 걸 알아가는 건 항상 즐거운 일이었으니, 어쩌면.
“고맙네, 왕자. 왕자가 추천해 준 만큼 책임지고 끝까지 읽도록 하지.”
씩 웃어 보인 그녀의 눈이 시계로 향했다. 벌써 방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그럼 나중에 식사 시간에 다시 보도록 하지.”
손에 든 책의 뒷면을 살피며 루비나드는 서고를 나갔다. 그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레기안이 다시 읽던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맺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