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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 (67)화 (68/115)

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68)

“제빌 경!”

“네?”

“이리 좀 와 보게!”

다급한 목소리에 제빌이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루비나드는 화단 한구석에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은 채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싹이 텄어.”

…그게 그렇게 기뻐할 일입니까.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니 또 질투심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제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해서 자조의 웃음이 흘러나왔다.

다급한 그녀의 모습에 걱정되어 달려와 놓고 별일 없었다는 것에 안심하는 게 아니라 질투가 먼저 일어난다. 그녀의 안전에 안도하는 것보다 그녀가 이런 얼굴로 웃는다는 걸,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걸 질투하는 게 먼저라니.

자신은 어딘가가 이상한 걸지도 모른다.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질 않는다. 그 어떤 아픔도, 그 어떤 감정도. 아무리 겪어도 사라지긴커녕 더 커지기만 한다. 형들이나 다른 귀족들에게 받은 상처도 그랬는데 루비나드에 관한 것은 더했다.

매일 함께 있는데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질투심이 올랐다가 가라앉는다. 그녀가 누군가에게 웃어 줄 때마다, 눈길을 줄 때마다.

그때마다 상대를 치워 버리고 싶은 마음과 루비나드를 가둬 버리고 싶은 마음이 삐죽 뚜껑을 열고 나온다. 하지만 이내 그의 이성이, 그녀를 그녀로 있게 하고 싶은 마음이 뚜껑을 눌러 닫는다. 나오지 말라고.

너는 그녀를 망칠 뿐이라고.

“…왜 그런 얼굴이야? 무슨 일 있나?”

반응하지 않는 제빌이 이상했던 것인지, 어느새인가 루비나드가 그의 앞에 다가와 있었다. 가만히 제빌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녀가 제빌의 감정을 읽으려 할 때마다 흠칫 놀라게 된다. 제빌에 대해 더 알고자 해 주는 마음은 기쁘다. 정말 날아갈 것처럼. 하지만 동시에 두려웠다.

이 추악하고 더러운 맨얼굴을 보고도 그녀는 제빌을 알고 싶다고 생각해 줄까.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대로 싹이 터서 다행이군요.”

“으음. 싹도 금색으로 빛날 줄 알았는데 생각 외로 평범한 녹색이라 놀랐어.”

“꽃이 필 정도로 성장하면 금빛이 되겠지요.”

가만히 싹을 바라보던 루비나드가 또 엷게 웃었다. 입가를 비집고 나오는 미소가 미웠다.

이런 것에 웃어 줄 정도라면, 자신에게 웃어 주면 좋을 텐데.

“그러고 보니 악토그라토리아의 황자는?”

“아직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결국, 마지막 수단을 쓸 수밖에 없나.”

마지막 수단.

곧 로간 제국에서는 또 한 번 큰 연회가 열린다. 봄맞이 연회 때 데뷔탕트를 치른 영애들이 본격적으로 짝을 찾기 위한. 그때엔 그냥 연회장이 아니라 대연회장을 개방하게 된다.

황궁의 별채가 아예 커다란 하나의 연회장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보통 그걸 대연회장이라고 부르곤 했다.

이 연회에는, 원래라면 타국의 귀빈은 거의 부르지 않는다. 국내 귀족들의 일종의 맞선 자리였기에 타국의 귀빈을 불러도 별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참석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 역시 없었다.

“악토그라토리아 쪽에는?”

“연락해 두었습니다. 기일까지 황자가 돌아가지 않으면, 연회에 맞춰 황태자가 제국을 방문할 예정입니다.”

“음.”

제빌의 말로는 악토그라토리아의 황제 역시 난색을 표하고 있다고 했다. 본국 귀환의 명령을 내렸으나 황자가 계속 무시하고 있다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쪽에서도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진 않겠지. 자국의 황자가 타국의 황제에게 수작을 걸다가 차이고는 돌아가지 않겠다 버티는 상황이라니.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조용히 돌아갈 수 있도록 끝까지 신경 써 주게.”

“네.”

루비나드가 신경 쓰지 않아도, 일은 착착 잘 준비되어 가고 있었다.

단지 그 내용이 루비나드가 알고 있는 것과 조금 달랐지만. 어차피 루비나드가 알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그녀에게 문제가 되는 내용도 아니었고, 제국에 해가 가는 일도 아니었다.

그러니 제빌만 알고 있으면 충분했다. 평소처럼 제빌은 정중하게 예를 갖췄다.

“헤르젠의 왕자는?”

“최근엔 성도 내에 있는 도서관에도 들리는 모양입니다. 역사서나 정보서 위주의 황궁 서고와 달리 기호하는 소설이 많으니까요.”

“안전에는 유의하도록 해.”

“물론입니다. 이번에 새로이 구성한 친위대에게 호위를 맡기고 있습니다. 다만, 왕자 본인의 무위가 높아 스스로도 주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으음. 그래도 그는 독서를 할 땐 주위가 보이지 않는 모양이니까 말이야.”

진중한 얼굴로 연애 소설을 탐독하는 모습은, 다 큰 성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지만 꽤 귀여웠다. 루비나드가 엷은 미소를 띠자 제빌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레기안은… 필요한 존재였다. 최소한 악토그라토리아와의 관계가 안정될 때까진.

반대로 말하면 그 이후에는 필요하지 않았다. 로간과 악토그라토리아가 헤르젠을 신경 쓰는 이유는, 그들이 뒤통수를 칠까 봐서였지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데거베일은 언젠가 악토그라토리아를 정복할 생각이었으니 꼭 헤르젠을 동맹으로 끌어들이고 싶었겠지만.

제빌과 루비나드는 달랐다.

힘이 비등비등한 악토그라토리아와 싸우는 건 손해가 너무 컸다. 반대로 헤르젠은 다소의 손해는 있겠지만, 악토그라토리아와의 전쟁보다는 나았다. 그러니 차라리 반대로 진행하는 게 나았다.

물론 루비나드는 어느 쪽과도 전쟁할 마음이 없겠지만.

제빌 역시 지금까지는 루비나드의 생각에 동의했다.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고 하지 않아도 될 전쟁을 할 필요 또한 없었으니까. 하지만 여차하면.

“제빌 경.”

“네.”

“눈이 무서운데.”

“…네?”

적의가 흘러나왔나?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루비나드는 타인의 적의나 살기에 예민했다. 그래서 제빌 역시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런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서 제빌은 ‘무심하고 담담한 사람’이어야만 했으니까.

감정적이고 약한 사람이 아니라.

“눈이 무서웠어.”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루비나드는 그저 ‘무섭다’라고만 표현했다.

금방이라도 어디론가 가라앉아 버릴 것 같은 눈이었다.

적의도 살기도 없는데 왜 이리도 무서운 걸까.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루비나드는 그 눈이 두려웠다.

뭐가 두려운지는….

그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뭔가 이상합니까?”

“그건 아닌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루비나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얀 제복의 무릎 부분에 묻은 흙먼지가 신경 쓰였다. 제빌의 시선이 루비나드의 무릎께에 향해 있는 사이, 그녀가 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제빌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폐, 하?”

겨우 입을 뗀 제빌의 머리에 그 밤의 기억이 떠올랐다.

술에 취해 이성을 잃었던 루비나드. 점차 가까워지던 얼굴. 그리고 닿았던.

제빌의 귓바퀴가 반사적으로 붉어졌다. 하지만 그걸 알 리 없는 루비나드가 가만히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조금 전의 그 무거운 기색은 어디 갔는지 한없이 투명하고 반짝이는, 예쁜 눈이었다.

“그대한텐 내가 있으니까.”

“네…?”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꼭 말하도록 해.”

제빌 역시 레기안처럼 되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없었다면.

하지만 제빌에게는 자신이 있었다. 레기안과 달리.

루비나드는 가만히 그 얼굴을 살펴보다 그의 얼굴이 빨갛게 물드는 걸 보고 화들짝 놀라 손을 뗐다. 무의식중에 그의 얼굴을 감쌌지만, 뒤늦게 제빌과 같은 기억을 떠올린 탓이었다.

…어쩌면 자신은 제빌에게 너무 거리를 두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 조금 더 거리를 두자. 혹시라도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안 되니까.

“저기, 그… 미안하네. 응.”

“괜찮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제빌은 제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끼고 있었다. 손을 흔들어 바람을 만들어 내도 전혀 시원하지가 않았다. 도리어 더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앞으론 그, 조심할 테니까.”

“…네.”

그녀가 닿을 때는 기분이 좋다. 하지만, 확실히 선을 지켜 주지 않으면 곤란하다. 제빌의 이성이라고 언제까지건 유지될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 않을 테니까.

제빌은 스스로를 믿지 않았다. 그래서 끊임없이 의심하고 또 계산했다.

자신이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를.

제빌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했다.

괜찮다. 이 정도는 버틸 수 있다. 본의 아니게 루비나드 덕에 제 한계를 새로이 알게 되어 다행이었다. 제빌은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가만히 눈을 떴다. 그리고 툭툭, 제 무릎에 묻은 흙을 털어 내는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폐하.”

“음?”

“…감사합니다.”

최근 너무 가까워지는 걸 계속 피하던 루비나드가 갑자기 이런 행동을 한 건, 틀림없이 제빌을 위로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자신의 오랜 친우이자 함께해 온 동료인 제빌을.

그 마음이 고맙고 또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제빌은 웃었다. 웃을 수밖에 없었다.

“…별소리를 다 하는군, 그대는.”

루비나드는 아직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지 상기된 얼굴이었다. 살짝 눈가가 붉어진 것 같기도 했다. 그 모습 또한 귀여워서, 제빌은 눈을 떼지 못하고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이요?”

그녀의 말에 대답해야 한다는 생각에 무의식적으로 반문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더 뚱해졌다.

제빌은 저 얼굴을 알고 있었다. 쑥스러움을 감추려는 얼굴이다.

감사 인사를 받아서 쑥스러웠던 건가. 얼굴이 더 발갛게 달아오른 것 같기도 했다. 별것 아닌 것에 감동하는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인데.

“그대가 내 곁에서, 날 지지해 준 게 하루 이틀 일인가. 그런 그대를, 내가 돕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당연한 일 아니겠어?”

퉁명스럽게 내뱉는 말이 사랑스럽다. 제빌은 당장이라도 그녀를 끌어안고 싶은 제 마음을 억누르고 또 억눌렀다.

파르르 떨리는 손을 주먹 쥐며 제빌이 웃었다.

“부관인 제가 폐하를 지지하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인 것을요.”

“그래. 그러니까 새삼스럽게 감사 인사 같은 건 할 필요 없어. 그대가 그러면….”

루비나드가 휙, 고개를 돌렸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지 반사적으로 살핀 보라색 눈동자가 흘끗 제빌을 곁눈질했다.

그녀의 말이 이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제빌에게 홱 등을 돌린 루비나드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도 고맙다고 해야 하잖나.”

혹여 제빌이 붙잡을까 걱정이라도 되는지 루비나드가 후다닥 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제빌이 제 입가를 싸쥐었다.

사랑스럽다.

당장이라도 사랑한다는 말이 나올 것 같아 두려웠다. 그녀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고도 한참이나 더 지난 후에야 겨우 제빌은 제 얼굴에서 손을 뗄 수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처럼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사랑합니다, 폐하. 사랑하고 있습니다. 저는….”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듣는 이 없는 허망한 고백은, 그대로 허공에 흩어져 사라졌다. 그가 삼킨 눈물처럼 공허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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