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66)
“제빌 경. 물어볼 게 있는데.”
제빌이 고개를 들었다. 루비나드는 망설이듯 시선을 이리저리 휘두르다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저녁 식사 말이야.”
루비나드는 기본적으로 거의 제빌과만 식사를 함께했다. 일이 치여 시간이 일정하지 않을 때가 많아서이기도 했지만, 숨 막히는 식사를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일궈 낸 성과들을 겉으로 헐뜯을 수 있는 자들은 없었다. 하지만 그 뒤에서는 뭐라고 하는지는 제빌이 알려 주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언제는 그녀가 잘못한 게 있어서 구설에 휘말렸던가.
그런 검은 속내를 감춘 이들과 함께 식사하고 싶진 않다. 그런 루비나드의 의향에 따라 제빌 역시 가급적 공식적인 자리에서 식사하지 않아도 되도록 일정을 짰다.
그러니.
“왕자를 저녁 식사에 초대하면 너무 부담스러워할까?”
생각해 볼 것도 없이 루비나드가 먼저 누군가와 함께 식사하겠다며 나선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불안감이 들끓는다.
제빌이 에브니겔을 도발하는 데 레기안을 사용한 건, 그가 루비나드에게 호감을 느끼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비나드가 황제로 있는 이상 그는 절대 루비나드를 여자로 볼 수 없었다.
그런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루비나드 쪽이 이럴 줄은 몰랐다.
대체 뭐가 신경 쓰였던 걸까. 레기안 왕자의 무엇이 루비나드의 관심을 끌었던 걸까. 제빌은 치밀어 오르는 질투를 억누르며 웃었다.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요? 왕자는 타인과의 교류가 익숙지 않은 듯하니.”
“으음. 시녀들에게 물어보니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데는 같이 밥을 먹는 게 가장 좋다고 하더군. 운이라도 띄워 볼 수 없을까?”
왕자는 루비나드가 봐 왔던 그 누구와도 달랐다. 그나마 비슷한 게 제빌이었다. 처음엔 그래서 눈길이 갔다.
왕자는 제 감정을 죽이고 있었다. 그게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채 다 감추지 못한 감정이 눈에서 흘러내렸다. 제빌이랑 꼭 닮아 있었다.
루비나드에게 아부하려는 생각 따윈 보이지도 않았다. 다만 빨리 이 자리를 떠나고 싶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평소 주변에는 무심하지만 루비나드에겐 달랐던 제빌과 달리, 그는 루비나드에게도 무심했다.
심지어 왕자는 책까지 즐겼다. 그라면 제빌과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까워지려던 것이었지만.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동자가 제빌을 떠올리게 했다.
-감사하지만 저는 괜찮습니다, 저하. 앞으론 못 본 척해 주세요.
언제였더라.
이야기로는 자주 들었었지만, 실제로 제빌이 형들의 괴롭힘을 당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비열했고 유치했다. 하지만 제빌은 그들에게 감히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
심지는… 약하지 않다. 하지만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그런 대우를 당하는 데에.
마치, 루비나드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아아. 그런가. 루비나드는 어쩌면 제빌을 보며 자신을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도발했다. 그들의 그 썩어 문드러진, 기분 나쁜 시선을 제게로 돌렸다. 제빌이 그 시선에서 벗어나길 바랐다.
보기 좋게 크로반을 쓰러뜨린 후 루비나드는 제빌을 데리고 그 자리를 벗어났었다. 그런 그녀에게, 제빌은 그렇게 말했었다.
-확실히…. 언제나 내가 그대 곁에 있을 순 없으니 그대 스스로가 강해져야만 하겠지.
스스로 처리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런 뜻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어진 말이, 그녀의 생각은 틀렸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저는 약하고 보잘것없는 미물입니다. 아무리 강해져도 미물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럼 왜 내버려 두라고 한 걸까. 루비나드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홱 뒤를 돌았었다.
-그대는 나의 친우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그대의 말대로라면 나도 미물 취급을 받아야겠군.
텅 비었던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감정이 없던, 모든 것을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던 눈동자에 감정이 돌아왔다. 그는 곤혹스럽다는 듯 루비나드를 보았었다. 그게 기뻐서 피식 웃어 버렸다.
그리고 레기안은.
그때의 제빌을 닮아 있었다.
제빌은 루비나드가 그를 구해 줬었다고 말했다.
-저하께서는 제 은인이십니다. 제 일생의. 그런 제가 어찌 저하를 배신할 수 있겠습니까.
루비나드의 무엇이 제빌을 구했던 건지는 모른다. 물어본 적도 없고, 아마도 물어도 가르쳐 주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구할 수 있다면 구하고 싶었다. 레기안을 눈앞에 두고 있으면 어린 날의 제빌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그 어린 날 그대로 커 버린 제빌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폐하께서 바라신다면 제안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으음. 항상 그대에겐 감사하고 있어.”
그런 루비나드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제빌의 마음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아니, 그건 빨갛다기보다는 핏빛이라고 해야 어울리는 색일지도 모른다. 마치 경고라도 하듯 마음이 핏빛으로 물든다.
이대로라면 그녀를 빼앗길지도 몰라. 정말로 그걸로 만족해?
정말로 이 자리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어?
그렇게 묻는 것처럼.
만족하냐고? 이미 알고 있잖아. 그런 건 불가능해.
마음 같아선 루비나드를 가둬 두고 누구도 만나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그 보라색 눈동자가 온전히 자신만을 담아 두게 하고 싶었다. 하루, 아니 단 한순간도 그녀와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고 싶었다. 몸을 이어 그녀로 가득 채워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짓을 하면 루비나드가 죽어 버린다.
루비나드는 태양이어야만 했다. 제빌이 억지로 제 곁으로 끌어 내린다고 한들 그녀는 행복해지지 않는다. 그녀는 지금, 이 자리에 있을 때 가장 빛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만족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만족해야만 했다. 최선이 안 된다면 차선을 선택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별말씀을. 그럼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음? 그렇게 서두르진 않아도 되는데.”
루비나드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 손에는 아직 서명을 마치지 못한 서류 뭉치가 가득 들려 있었다.
“이런 건 미뤄서 좋을 일이 아니지요. 왕자에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요.”
“그런가.”
평소라면, 그대로 고개를 내렸을 터였다. 제빌의 감정 따윈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서류에 관심을 주었겠지.
하지만 왜일까. 오늘따라 루비나드의 반응이 조금 달랐다. 뭔가를 찾는 것처럼 제빌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흘러 버린 건 아니겠지. 그녀에게 들켜선 안 될 마음들이.
루비나드는, 적의에 민감하니까.
“오는 길에 가벼운 다과라도 가져올까요?”
애써 태연한 척, 감정을 밀어 넣고 웃자 루비나드가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아. 이다음에 또 알현 시간이지 않나. 괜히 체하고 싶지 않아.”
“알겠습니다.”
엷게 웃은 제빌은 그대로 도망치듯 방을 나섰다. 복도에 나선 후에야 제빌은 자신이 긴장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알지 못한다는 건…. 가장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걸 읽어 낼 수 없게 된다는 건 이토록이나 두려운 일이었다.
지금의 제빌은 종종 그런 생각이 들었다.
깜깜한 어둠 속을 빛 하나 없이 걷고 있는 것 같다. 한 발만 삐끗하면 곧바로 벼랑 아래로 추락할 것을 알면서도 앞으로 내디딜 수밖에 없는 아슬아슬한 줄타기. 멈추면 될 텐데 멈출 수가 없다.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끝이 오긴 하는 걸까. 사실 어디로 가도 헤매기만 할 뿐 루비나드의 곁으로는 갈 수 없는 게 아닐까. 그렇게 헤매다가 모든 길이 끊어져 있어서, 결국 어디로 가도 벼랑으로 떨어지는 게 아닐까. 아니면 거의 끝에 다다라 얼마 안 남았다고 방심하는 순간 결국 방해물에 발부리가 걸려서 벼랑 아래로 떨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나방도 분명 알고 있을 것이다. 불길 속에 뛰어들면 제 몸이 불타오른다는 것쯤은.
하지만 알면서도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의 제빌처럼.
“당신의 곁에 있을 수 없게 되는 게 더 두렵습니다.”
제빌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가다듬는다. 제 마음을 더 깊숙하게 후벼 파서 거기에 감정을 밀어 넣는다. 다시는 넘치지 못하게 단단한 뚜껑을 덮는다. 마음에 두려움이, 절망이 깊어질수록 감정 역시 숨기기 쉬워진다.
언젠가 이 감정을 당신 앞에 다 드러내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 너무나도 거대한 것에 놀라 도망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망가게 두진 않을 것이다. 몇 겹이나 몇 겹이나 그 팔과 다리에 사슬을 채워 두면 된다. 알아채지 못하도록 예쁘게 장식되어 사슬이라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사슬들을.
잔뜩.
“…….”
제빌은 눈을 떴다.
그 눈에서 흘러넘치던 감정들은 이미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걸음을 옮기며 왕자에게 어떻게 운을 뗄지에 대해 고민했다.
* * *
“그래? 루비나드가 후궁을….”
방은 따스했다. 무인 지대이기 때문에 도리어 사용인들이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다들 출퇴근하는 대신 숙식하며 일하기를 선택했다.
덕분에 엔도르빌은 시간에 상관없이 계속 보살핌 받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루비나드의 자비와 제빌의 섬세함에 감사했었다. 그토록 큰일을 저지르고 쫓겨난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해 준다는 게, 여전히 그녀가 자신을 오라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 같았다. 그래서 멀리서나마 두 사람의 앞에 행복과 축복이 함께하길 빌었었다.
그게 감시를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의외였습니다. 그 남자가 순순히 받아들일 줄이야.”
“글쎄.”
순순히? 엔도르빌의 입가에 비웃음이 스몄다.
아마 루비나드가 보았다면 틀림없이 눈을 의심했겠지. 한때 유약하다고 비웃음 받았던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었으니까.
오히려 광인 폐태자라는 이명에 더….
“그 남자가 겉으로 뭘 하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뒤에서 뭘 하는지가 중요하지.”
“…하긴, 그렇죠.”
베카르티는 주전자에서 차를 따라 엔도르빌에게 건넸다. 물끄러미 찻잔을 바라보던 그가 흠칫 놀라며 잔을 받아 들었다.
“미안하군. 그대를 믿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누구라도 저하와 같은 일을 당하시면 그렇게 될 테지요.”
차뿐일까. 물 한 모금, 빵 한 조각도 마음 놓고 먹지 못하겠지. 계속 의심하고 또 의심하게 되리라.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엔도르빌은 그 정도의 일을 당했으니까.
“…계속 지켜보도록 해. 그 남자는 뭘 할지 몰라. 지금은 제 자리가 위협당하지 않는다고 느껴서 얌전히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남자는, 제 목적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남자였다.
말 그대로 뭐든지.
설령 그게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일이라고 해도 개의치 않겠지. 그 남자에게 중요한 건 오로지.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해서 미안하네, 베카르티.”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알아차려서 천만다행이었던 거지요.”
그렇게 답한 베카르티가 이를 으득, 갈았다. 만약 그가 이 무인 지대에 방문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밤이 깊었다. 그리고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새로운 해가 떠오를 때가.
“빨리 아침이 오면 좋겠군요.”
“…그러게.”
엔도르빌은 조용히 찻잔을 기울였다.
아직도 날은 어두웠다.